[London 2009] 세계의 교차로, 런던

Travel | 2009/07/20 00:05 | 비회원
항상 어느 도시든 짐 풀고 나면 지도 들고 시간 날때마다 거리를 걸으며 도시와 친해지려 애씁니다. 몸으로 부딪히고 느끼면서, 기록으로 보는 텍스트 이면을 읽으려 애씁니다.

그런 면에서 런던은 좀 당황스럽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여행객이 몰리는 도시 중 하나인데 전 수긍이 안 갑니다. 유적과 역사와 예술이 널려 있는 파리나 이탈리아 도시들보다 더 매력적인게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게다가 관광객으로서 갈 데가 몇군데 정해져 있는지라 온통 사람에 치이기만 합니다. 그 시간과 노력 들여서까지 보고 싶지 않다는게 제 마음이었습니다.

현지인들과 이야기해봐도 런던은 여행보다 살기에 좋은 도시 같습니다. 제가 대화한 많은 사람들이 외국 태생이지만 런던을 사랑하고 런던 이외 지역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제가 꼽아본 런던의 매력들입니다.

Popular royalty
한 프랑스인은 영국에 대한 적대감을 이렇게 표시하더군요.
걔들은 아직도 여왕을 모시고 살잖아.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 독특한 영국의 왕실 시스템은 수백년을 건너 중세가 박제된 형상입니다. 폭압적인 군주의 위험성이 거세된 채로 아름다운 공주의 동화만 남습니다. 이만큼 상상과 낭만을 자극하는 관광자원이 있을까요.
버킹검 궁전에만 제가 헤아린 바로 3천명이 바보같이 기다렸습니다. 유럽은 유럽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동양은 동양대로 각자의 환상을 확인하러 런던에 옵니다. 화석화된 건물이 아닌 살아있는 생체는,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관광적 매력이 있지요.

Democratic London
이러한 영국 시스템의 이면에는 섬나라 특유의 기질이 있습니다. 내면적 실용주의지요. 명분이 있다면 변화를 내적으로 수용하여 담아냅니다. 스스로 군주시스템을 의회로 바꾼 여러가지 역사적 사건을 통해 민주주의의 종주국이 되기도 했지만, 실제로도 명예혁명이라는 단어만으로 스스로 가슴벅찬 영국인입니다. 이렇게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외부와 뒤섞이지 않으면서 스스로 변화를 이끌어내는 건 섬나라 특유의 현상입니다. 곳곳에서 이러한 자기번복적 보수주의가 부드럽게 펼쳐지는게 런던이 지닌 또 하나의 매력입니다.

Recent Star
남들이 다 지탄하는 해적이지만, 내적으로는 당당한 사략함대의 장군인 드레이크의 배를 보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처녀의 몸으로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맞선 엘리자베스 여왕의 강단은 어떻습니까. 인도의 용병 노릇하면서 기회를 노렸던 영국이, 변방의 낙후국에서 빈곤을 벗어나려 애쓴 한 나라의 염원이 응축된 순간이기도 합니다.

Engineer
타워 브리지의 지하로 가면 도개교를 개폐하는 커다란 엔진이 있습니다.
증기기관을 통해 산업혁명을 이끈 영국을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엔진을 다루는 사람(engineer)이 공학자가 된 사건이기도 하지요. 이 산업혁명을 통해 숙적 프랑스와의 전세를 영구히 바꿔 놓게 되지요.

금융의 런던
금융섹터에서 흔히 참조하는 이자율이 LIBOR입니다. London Inter-Bank Offered Rate이지요. 여기에 몇백 bp를 더해 실제 이자를 정하는데, 그만큼 금융의 런던은 유명합니다. 제국시대, 해외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자본과 또 그만큼 나가는 사람들의 투자자금이 순환하면서 보험과 증권 등 수 많은 금융기법을 탄생시킨 런던입니다. 뉴욕이 나타나면서 그 예봉이 꺾였지만 아직도 런던은 짱짱했습니다. 금융쪽 미팅도 가졌는데, 전 세계는 몰라도 아직까지 유럽에서는 맹주임이 자명하더군요. 섬에 앉아 대륙의 돌아가는 상황을 훤히 꿰고 있는데 저으기 놀랐습니다.

영어, 영어
런던이 가진 최고의 매력은 언어입니다. 영국이 가진 매력도 그러합니다. 영어만 할 줄 아는 저로서는 도시 곳곳에서 말이 통하는 런던이 너무 편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같은 느낌이었지요. 세세한 것을 물어도 좋고, 농담을 나눠도 좋고 그랬습니다. 첫 기착지가 런던이어서 긴 여정은 적응이 더 쉬웠습니다.

단절 없는 전통
영국의 세계적 흥행문학이 많지요. 해리 포터,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셜록 홈즈 등등.
특히 영국이 더 이상 문학적 종주국의 위상을 자랑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졌던 저를 기분좋게 한방 먹인 해리포터는 아직도 면면히 흐르는 영국의 창의적 저력을 실감케 합니다. 다만, 이번에 알게 된 점이 하나 있습니다. 해리 포터는 순수한 상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런던 거리를 걷다 보면 해리포터의 묘사들이 자연스럽게 와 닿습니다.
마치 저 속을 걸어가면 다이아곤 앨리가 나올 듯 합니다. 지하철이나 역 건물도 그래요.
게다가 아직도 강변에서 찬란히 빛나는 저 용의 문장은 어떤가요. 다음 건물에 그리핀도르 문장이 걸려 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공원마다 널려 있는 거대한 수목만 해도 그렇습니다. 밤에 걸어다니는 엔트로 변신하지 않는다는걸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전 결코 롤링 여사를 낮게 보는게 아닙니다. 하지만, 해리 포터의 많은 부분은 런던이 지닌 단절 없는 전통 덕이란 점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런던의 백미는 공원 (park)
런던의 진짜 매력은 공원이라고 느꼈습니다. 야생을 옮긴듯 투박하지만 깊은 숲의 공원은 도시에서 단박에 원시림으로 이동하는듯한 착각을 줍니다. 가까운 교외 정도의 느낌을 훨씬 넘습니다. 귀한 햇살, 시원한 바람, 자연과 일체감은 필설로 형용이 불가합니다. 해가 좋다고 훌렁훌렁 비키니 차림으로 굴비처럼 누운 아가씨들도 재미나지만, 자리 하나씩 펴고 도시락 먹으며 한참을 웃고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평화와 여유를 느꼈습니다.

국제도시 런던
Americans live with Indians, So do Englishmen.
-Inuit
시내를 걷다 보면 순수 영국인을 만날 일은 열에 두어명입니다. 비슷한 숫자가 인도인, 또 비슷한 숫자가 명백한 여행객이고 나머지가 기타 다채로운 인종의 사람들입니다. 문자 그대로 국제도시입니다. 사람들의 개방성은 물론이고 실제 구성원이 그만큼 국제적입니다.

이 모든 면에서 런던은 거대한 세계의 교차로란 생각을 했습니다.
종적으로는 신화시대부터 중세 왕국에서 제국시대를 거쳐 산업화를 담아낸 단단한 그릇, 그리고 수평적으로는 각 세대마다 세상과 어떤 방식으로든 교류하여 지금은 세계를 하나의 도시에 담은 표본실입니다. 시대와 세상이 만나는 진정한 교차로였지요.

사실 저 테마들이 각강 하나의 글로 담아낼만큼 제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시간도 없고 글의 부피가 너무 커져서 여러 개의 단평들으로 런던 글을 맺습니다.

넷째 던전의 봉인을 아직 못 풀어주셨네요.
어딘지 맞추실 분 없으신가요? ^^
지역태그 : 유럽>영국>런던
  1. 띠용 2009/07/20 00:35 답글수정삭제

    넷째 던전은 잘 모르는곳이 태반이라서 맞추기가 힘드네요^^;

  2. 오업 2009/07/20 04:59 답글수정삭제

    십수 년 전에 한 번 갔었는데 또 가고 싶어지는군요. 넓은 공원, 정말 빨리 걷던 사람들, 한 쪽으로만 선 에스컬레이터 (당시엔 이게 낯선 광경이었죠), 비싼 물가, 엄청나게 먼 거리의 지하철 환승 등이 기억에 남는데 여전히 그럴지요.
    그런데 비키니 차림으로 누운 아가씨들을 보고 굴비!가 생각나셨단 말입니까.. ^^

    • Inuit 2009/07/20 08:10 수정삭제

      네. 마치 이번에 저랑 함께 다녀오신듯 설명이 지금도 똑 같습니다.
      특히, 짐들고 계단을 낑낑대는 사람들은 참 인상적이에요. ^^

      굴비는... 배가 고파서 그랬을까요. ^^;;;

  3. mahabanya 2009/07/20 06:22 답글수정삭제

    영국...영드를 몇 개 보면서 매력이 솔솔.

    근데 영국에 자주 드나들었던 예전 지인의 말을 들어보면 영국에 도착하는 순간에 특유의 노린내(일본에 간장냄새, 한국의 마늘냄새 같은)가 난다고 그러던데(반 년 묵고 오면 한 달간 옷과 가방에서 냄새가 안빠질 정도라고 호들갑을...) 후각에 의한 감상은 어떤가요?

    • Inuit 2009/07/20 08:12 수정삭제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나라마다 독특한 냄새가 있어요.
      그런데 영국 등 유럽은 후각적 생경함이 그리 크게 느껴지진 않네요.

  4. grace 2009/07/20 10:11 답글수정삭제

    음.. 신혼여행지를 유럽으로 정하고 제일 먼저 열외시킨 것인 파리와 런던이었어요.;;
    너무 도시적이고 세련되어서 대표적인 유적을 제외하고는 유럽의 역사와 전통을 느끼기엔 힘들겠다 생각했는데 포스팅을 보니까 호기심이 드네요. 밟아봤다면 터닝포인트가 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 Inuit 2009/07/20 20:55 수정삭제

      어차피 살다보면 한번쯤 갈 기회는 있지 않겠어요. ^^

      특히 신혼여행은 둘만이 오붓하게 즐기는게 더 낫죠. 그레이스님 처럼. ^^

  5. mooo 2009/07/20 13:35 답글수정삭제

    가만 앉아서 런던 여행을 다녀온 기분입니다.
    박물관이나 관광 명소를 여행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발로 다니는 여행을 더 좋아하기에 이 글이 너무 고맙습니다. :-)

  6. 마음으로 찍는 사진 2009/07/20 14:04 답글수정삭제

    오래간만에 inuit 님의 글을 몰아서 읽었네요. 이번 던전이 사진만큼이나 멋진, 그리고 성과가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7. 지구벌레 2009/07/20 14:23 답글수정삭제

    이번에는 구경거리를 많이 주시는 군요.
    영국이라는 나라가 참 여러가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섬나라라서 특히 그런 것 같기도 하구요.
    글 잘 보고 갑니다.

  8. 프뢰 2009/07/20 23:21 답글수정삭제

    아.. 2월달에 갔다 왔는데 또 가고 싶어지네요ㅠㅠ
    8일동안 영국에 있었는데 그 중 5일을 런던에서 보냈지요.. 휘유. 저 공원이랑 홈즈박물관 그립네요.. 저 잘생긴 직원 그때도 있었는데.. 흐흐.
    제법 놀랐던 게, 다른 유럽 갔다 온 사람들이 치안문제에 대한 상당한 불편을 느꼈던 반면(소매치기 등) 영국에서는 그런 문제를 느낄수가 없었다는 거. 물론 저녁 8시쯤에는 숙소로 돌아와 있었지만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 나았었습니다.

    • Inuit 2009/07/21 20:05 수정삭제

      맞습니다.
      영국에서 치안으로 크게 불안하진 않았어요.
      전 밤 10시 넘어까지 돌아다녔지만, 다들 아랑곳하지 않는 분위기.
      한국과 거의 유사했어요. ^^

  9. 눈콩 2009/07/20 23:57 답글수정삭제

    말씀하신 대로 런던의 공원은 진짜 부럽기 그지없어요. 제 런던 사진은 메모리에러로 거의 다 날라가서 덕분에 눈이 즐거웠습니다. ^^
    그리고 넷째 던전은 독일이 아닐까 하는데, 아니라고 하신다면 힌트 좀 주세요~ :)

  10. FROSTEYe 2009/07/22 00:27 답글수정삭제

    우째 사진이 전부 환합니다?

    런던은 안개와 비의 도시라고 알고 있었는데 고정관념일 뿐이었을까요?

    • Inuit 2009/07/23 01:24 수정삭제

      저때 비 정상적으로 해가 좋았고 날도 더웠다네요.
      런던 사람들은 광분하고, 시원할걸 기대하고 간 저는 더워서 진이 빠지고.. 그런 아이러니의 며칠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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