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uit Blogged

천년의 금서 본문

Review

천년의 금서

Inuit 2009. 10. 23. 23:18
명절 즈음 안 보이면 섭섭하고, 항상 비슷해도 보는 동안만큼은 홀딱 빠져 보는 성룡의 영화처럼, 김진명 책도 독특한 포지션이 있습니다. 낯 간지럽다면서도 막상 읽다보면 가슴 뛰는 내셔널리즘, 음모론을 허구의 세상에서 펄떡거리게 만드는 구성력, 그리고 검증하기보다는 그냥 신앙하고 싶은 또렷한 결론까지 말입니다.

김진명

대한국인인 우리가 정확한 유래를 모르는 韓의 실체를 좇는 소설입니다. 신화와 선사(先史)가 뒤섞여 삼한과 삼국 이전의 역사가 아리송한 우리 역사에서 한의 의미를 살펴보는 일은 꽤 의미있습니다. 조선이 고조선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면 대한제국은 삼한보다는 더 큰 상징을 표방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의외의 중국 문헌, 그리고 천문학적 연구결과를 조합해 韓나라의 시공간적 위치를 드러내는 줄거리가 꽤 재미있습니다. 그 결론도 수긍할만 하구요. 이런 면에서 팩션은 편리한 툴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과학적 엄정함에 에둘리지 않고 가설만을 순수하게 무한히 추구할 자유가 있으니 말입니다.

반면, 이번 책은 김진명 답지 않다는 점에서 아쉽습니다. 손에 땀을 쥐게하는 그 필력이 어디로 갔는지. 2009년에 다시 보는 기연체 소설이랄까요. 우연과 운수의 남발은, 이게 있음직한 이야기로 느껴지기 보다 그야말로 '소설'로 느껴져서 몰입이 안됩니다. 타자화해서 보게 되지요.

목반장이 구태여 현장을 들러본다고 갔다가 나오는 찰나 우연히 만난 정서가 피살자 주변의 모든 단서를 다 해석할 수 있는 막역한 사이라든지, 대통령과 국회의장을 독대하고 국제적으로 요인으로 보호 받는 중요인물이 돌연 중국에 가서 몇 주를 지내도 별 문제 없는 직장상황이랄지, 엄친아이긴 하지만 한자 좋아해서 중국어 조금 한다는 사람이 중국 가자마자 학계의 고수와 토론하고 시골에 가서 돌아다니면서 단서를 모은다거나, 캠퍼스에서 우연히 길 물은 사람이 결정적 단서를 지닌 교수의 조교라든지, 버스 탄 옆자리에 우연히 다가온 사람이 결정적 문헌의 후손이라든지, 왕씨와 마을 돌 때 제일 연장자 집에 들르면 바로 은원의 단서가 줄줄 나온다든지, 악독한 앞잡이 펑 교수가 반전 사건 이후 갑자기 회개해서 국제 컨퍼런스 자리임에도 스스로 참회하고 동북공정의 부당함을 고백한다든지.. 뭐 거론하자면 수두룩합니다.

더 이상 기묘한 것들은 그나마 책에서 어떻게든 설명을 했으니 믿기로 한다쳐도, 실제 내가 주인공이라면 단 하나도 벌어지기 힘든 우연의 도움이 줄줄히 이어지고 그 중 하나의 우연만 없어도 그 다음 이야기가 전개가 안되는 상황이니 이건 옥루몽도 아니고..

결정적인 의문이라면, 고종이 삼한을 이어받은게 한반도 남단의 삼한이 아니라 더 큰 삼한을 시사한다는 비판적 의구심에서 출발했다면, 최소한 고종 시대에 韓의 존재에 대해 실체적 접근을 했다고 봐야하겠지요.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이므로 고종 주변을 뒤지는게 더 빠르고 무언가 나올 가능성이 큰데 그런 가능성은 아예 배제하고 중국만 뒤지는 점은 몇가지 결정적 단서의 가치를 '소설 수준'으로 떨어뜨리고 마는 느낌입니다. 국수 이야기보다도 팩트에 대한 천착이 부족해 보입니다.

어찌보면 이러한 우연의 연속이 황당해도 싫지는 않았습니다. 바빠서 소설은 거의 못보는데 마치 다이제스트판을 읽듯 요점만 간추려진 장점이 컸으니까요. 뭐 재미난 씬이라면 굳이 채색한 그림 기다려 보기보다 크로키만 봐도 좋잖습니까. 색감이나 터치의 감동은 희생해야겠지요 뭐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머니해킹  (14) 2009.10.29
언어의 진화  (16) 2009.10.27
누들로드  (32) 2009.10.14
제7의 감각 - 전략적 직관  (14) 2009.10.07
귀곡자  (4) 2009.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