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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Inuit 2010. 6. 12. 14:53

천명관

아, 이것은 대단한 구라다!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되뇌이게 되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속어를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속어에 대해 경멸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속어에 기대지 않고도 원하는 뜻과 뉘앙스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한 단어로 요약하라하면, '구라'라는 말 밖에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소설은, 두 여인이 세 세대의 시간을 두고 시공간으로 얽혀 살아가는 이야기지만, 이야기 자체에서 교훈과 메시지를 찾으려는 노력은 허사입니다. '고래'의 진미는 글맛이기 때문입니다. 굳이 운명애니 현재주의적 박애니 말을 갖다 붙일 수는 있지만, 소설의 관조적 냉소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천명관의 최대 장점은 그 주절주절 구수한 '썰 풀기'입니다.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를 기발하게 다음 이야기로 눙치고 넘어가며, 의뭉스런 구석이 있어도 다음이야기 듣다보면 또다시 매혹당하고, 지루할라치면 새로운 이야기로 급히 넘어가는등, 이야기는 끊이지 않습니다. 소설의 화자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이야기라고 설레발을 치면서도 집요하게 '소설'을 씁니다.

'고래'의 미덕이 문체일진대, 저는 수 많은 기시감을 봅니다. 신화적 환상을 현실에 버무려 놓은 모습은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과도 닮았습니다. 어쩌면, 매우 현실적인 묘사 속에 살짝 섞여들어가 의도적 거리감을 형성하는 환상주의적 도구는 쥐스킨트의 '향수' 냄새가 나기도 합니다. 멀리 올라가면 화자가 존재감을 드러내는 헤로도투스적 스토리텔링도 보이고, 가까이는 어릴적 동네 입담 좋은 아저씨의 '구라'가 겹쳐 보입니다.

신경쓰일 정도로 화자가 독자와 이야기 사이를 가르는 독특함은 흥미롭습니다. 수백가지 이야기를 한 줄에 꿰느라 생기는 허술함에 대한 스스로 방비일지, 스토리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남의 일 보듯 몰입없이 즐기기만 하라는 배려일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내러티브는 잊어도 보이스 톤은 잊혀지지가 않는 그런 소설입니다.

드라마도 시들하고 복잡한 책은 머리에 안 들어올 때 '고래', 즐거이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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