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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Project L

프로젝트 알샤밥: 마드리드에서 미역국을

Inuit 2010. 11. 12. 21:37
이번 여행 중 아내의 생일이 있습니다. 아내도 이번에는 생일이 있는걸 알고는 있지만 나름 그랜드 투어니까 생일이라고 별 다른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와 아이들은 저번 자카르타에 이어 또다른 비밀 작전을 준비했지요.

작전개요
여행 3주전 쯤, 아이들과 몰래 대화중 엄마 생일을 어떻게 멋진 추억으로 만들지 의논을 했습니다. 금번 깜짝 파티의 컨셉은 '여행지에서 따뜻한 밥상 차려주기'입니다. 

프로젝트 코드
우선 작전명이 필요하지요. '밥'이란 점과 당시 성남일화의 알 샤밥 경기가 화두인 때이므로 자연스럽게 이중성에 의한 보안이 지켜지는 '알샤밥'을 코드명으로 했습니다.

노래 연습
매번 듣는 평범한 생일 축하 노래는 좀 그렇다고 생각하던 중, 딸이 아이디어를 냅니다. 엄마가 평소에 좋아하는 'You are my sunshine'을 부르면 어떠냐는 겁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1절은 아들이, 2절은 딸이, 마지막은 저까지 모두가 합창입니다. 영어 노래 가사를 외우고 음정 연습하느라, 틈틈이 준비하는 내내 키득키득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통신 확보
기밀 유지에 가장 중요한 건 비밀 통신 라인을 유지하는게 기본. 이제 아이들도 그 쯤은 다 압니다. 우선 비밀 회의와 노래연습은 아내가 운동하러 간 사이에 합니다. 나머지 평상시 연락은 각자의 아이폰, 아이팟에 있는 gmail로 합니다. 그 외에 엄마 없이 아빠만 스킨십을 갖는 시간인, 잠자리 굿나잇 인사 시간에 살짝 귀엣말로 진척을 점검합니다.

물품 확보
행사의 메인 아이템인, 햇반과 끓는 물 부어 만드는 냉동건조 미역국은 아이들이 조달합니다. 아들의 시험날을 잡아, 둘이 산책한다고 나가서 사왔습니다. 물품 확보후 컨펌 전화도 잘 하더군요. 


물품 은닉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물건을 숨기는게 어렵습니다. 집안에 엄마의 손길과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이 어디 많겠습니까. 하지만, 집안의 숨은 구석은 아이들의 공간인 것. 이번에도 아이들이 좋은 의견을 많이 냈습니다. 물품을 아예 집으로 들이지 않고, 차에 있는 아이들만의 공간에 숨겼습니다. 그리고 여행 떠나는 날, 딸 아이가 고의 로 출발을 지연시킵니다. 자연스럽게 아빠와 아들은 먼저 짐을 갖고 집을 나서고, 딸아이가 확보한 3분 동안 남자방 여행가방에 물품을 옮겼습니다. 여행은 남자방, 여자방 두방을 쓰므로 남자짐에 있는건 비행 후 내내 비밀스럽게 숨기기가 가능하지요.

위기
마지막에 서두르다보니 작은 실수가 있었습니다. 자동차에 가서 생각하니 숟가락을 안 챙겨 나왔습니다. 급히 후방의 딸에게 연락하여 몰래 숨겨 오는데 성공. 그러나, 젓가락은 못 가져왔습니다. 다행히, 비행기 기내식에 젓가락이 나옵니다. 덤으로 진공포장 김치까지 아이템 획득입니다. 아이들과 비행중 좌석에서 의미가 가득한 눈웃음을 주고 받았습니다.

마드리드의 시련 1
호텔에 와보고 깜짝 놀란게, 웬만한 호텔이라면 다 있을 전기 포트가 없습니다. 물을 끓일 수가 없는겁니다. 도착하자마자 아이들과 함께 어찌나 놀랍고 실망스럽던지. 이 문제는 뜨거운 물 중탕으로 해결키로 했습니다.

마드리드의 시련 2
처음 설계 당시 깊이 생각하지 못한 문제인데, 미역국을 담을 그릇이 없습니다. 도착해서 이튿날에야 발견했지요. 그래서 그릇을 구하러 밤에 몰래 마트에 나갔습니다. 마드리드의 상점들은 왜 그리 빨리도 문을 닫는지. 일정 마치고 티안나게 일찍 들어와 이틀을 시도했지만 그릇 구하기에 실패했습니다. 급기야 Plan B를 발동합니다. 당일 아침에 호텔에서 그릇을 빌리리고 했습니다.

마드리드의 시련 3
가기 전부터 가장 걱정했던 사항은 현지에서 케익 구하기가 쉽냐는 거였습니다. 케익 파는데야 당연히 있겠지만, 밤에 몰래 나가 살 만큼 가까운 거리에, 늦게 문 연집이 있어야 하니 쉽지 않은 제약조건이지요. 다행히, 호텔 건물에 빵집이 있어 안도를 했습니다. 전날 아들과 몰래 나가서 작은 케익과 초까지 성공적으로 구했습니다. 어찌나 기쁘던지.. 룰루랄라 휘파람 불며 호텔에 들어오다가 생각해보니, 초를 켤 방법이 없습니다. 라이터가 없으니 말입니다. 빵집부터 해서 성냥을 이리저리 물어보며 구해봤지만 요즘 그런거 구하기가 쉽나요. 아깝지만, 호텔 기념품 가게에서 1유로짜리 라이터를 샀습니다. 그나마 늦은 시간에 물건 팔아주는게 고맙습니다.

D-day
평소처럼 여덟시에 아침먹으러 내려가기로 약속된 상황입니다. 저는 다섯시, 아들은 여섯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합니다.
한시간 전부터 뜨거운 물을 계속 갈아가며 미역국물을 준비하는 아들 모습이 사골국이라도 우려낼 정성입니다.

식당문이 여는 7시반. 아들과 식당에 내려갑니다. 말도 안통하는 주방 아저씨에게 집사람 생일이고, 잠깐 쓰고 가져갔다가, 다시 갖다 놓겠다고, 손짓 발짓 했지요. 사람 좋은 스페인 아저씨 답게 활짝 웃으면서 가져가라고 흔쾌히 손짓합니다. 가장 어려운 부분을 해결했습니다. 아니면 plan C인  양치컵에 미역국을 담을 뻔 했습니다. -_-

전날 밤 준비한 케익과 촛불에 1유로짜리 라이터로 불도 켰습니다.

이제 준비 끝. 아차.. 
여덟시 약속이라고 해서 식구사이에 분단위로까지 약속을 지키지는 않습니다. 여자방에 전화해서 딸에게 상황 물어보니 정각에 오긴 글렀습니다. 아들은 여덟 시에 딱 맞춰서 미역을 뜨거운 물에 이미 풀어 놓은 상황입니다. 결국, 준비 안 되었어도 당장 우리방에 오라고 급히 이야기했습니다.

불이 꺼지고 어두컴컴한 방.
촛불 두개. 
희미하게 보이는 케익. 
이제 서서히 눈에 들어오는 밥 
그리고 뜨끈한 미역국. 

아내가 점점 놀람이 커지는 순간 아들의 선창. 

You Are My Sunshine
My only sunshine.
You make me happy
When skies are grey.
You'll never know, dear,
How much I love you.
Please don't take my sunshine away..

아내는 왈칵 울어 버렸습니다.

알샤밥은 실패했나 봅니다. 
엄마를 햇살처럼 환히 
웃게 해주려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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