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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Inuit 2010. 12. 8. 22:16
몇번 이야기했지만, 전 소설 잘 안 봅니다. 깔봐서가 아니라, 메시지 찾기에 강박적인 현대 독서인의 초조함이겠지요. 

John Coetzee

(Title) Waiting for barbarians 
@paperroses님의 소개로 알게 된 작가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읽는 내내 책장 덮는게 아쉬워 야금야금 아껴 읽은 소설입니다. 소설이라, 글쎄, 스토리를 중심으로 늘여 쓴 문장이라는 형식면에서는 분명 소설이지만, 읽는 내내 상상을 자극하는 면에서는 우화집 같고, 깊이 생각 속에 잠기게 만드는 성향은 철학책 같고, 옳고 그름에 대해 다각적으로 돌아보게 만드는 점은 도덕책 같습니다. 
그보다 더 큰 매력은, 생경한 세팅임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인간의 본성을 묘사하고, 솜씨 좋은 외과의사처럼 몸 속 숨어있는 감정선을 끄집어내어 백일하에 드러내는 필치로 인해 끊임없이 상황에 몰입하고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입니다.

부러 시공간을 뭉개버려 짐작 안가게 낯선 환경에서 인간성의 궁극을 드러내는 화법은 젤라즈니에서도 즐겁게 경험했습니다만, 쿳시는 '지금, 여기'의 언저리에 설정한 제국주의의 시공간을 활용합니다.

@paperroses 님의 지적처럼, 쿳시 글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품격입니다. 한없이 나약한 지식인이지만 내적인 도덕심을 끌어올릴만큼은 지적이고,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인간이지만옳음을 위해서 고통을 각오하는 착한 인간인, 소설속 화자에 동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류의 보편적 감정인지, 책 읽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선별된 특성인지 몰라도, 책 읽는 내내 주인공을 따라 독자도 번민합니다. 편안함에 숨을지, 위험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갈지. 또한, 실체가 모호한 야만인을 타자로 설정함으로 존재하는 제국주의의 모습에 우리 주변 불가시한 부조리의 흔적을 섬짓섬짓 느끼기도 합니다. 시대와 말과 풍물이 다른데 2010년 제게 어찌 그리 큰 울림을 주는지 신통합니다.

또 하나 이 책의 강점은 명품 번역이란 점입니다. 네덜란드 혈통으로 남아공에서 자랐고 영어를 사용하는 작가의 풍성한 감성 세계를 쫓아가기가 쉽지 않으린 점은 그냥 보입니다. 하지만, 역시 영어를 전공으로하고, 글쓰기도 업으로 삼는 역자는, 남아공 대학교 faculty라는 쿳시와의 인연을 활용해서 매끄럽고 아름답게 번역을 했습니다. 제가 가장 스타일리쉬하다고 꼽는 김훈 문체의 찬란함을 번역서에서 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사실, 노벨 문학상은 별 다섯개 짜리 영화마냥 재미없다고 지레 짐작하던 제게, 2003년만큼은 재미와 품격이 제대로 반영된 수상이었다고 확신하게 만든 쿳시와 '야만인을 기다리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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