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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초삼걸

Inuit 2011. 3. 19. 21:00
아주 먼 옛날. 정치경제 시스템이 발달해 사상과 철학이 융성했고, 먹고살만 하니 생존 아닌 번영을 위한 살육이 근간이 되어 전쟁이 일상이었던 시대가 있지요. 이름 자체도 전국시대라 불리웠던 그 시기의 끝은 진나라가 맺었지만, 결국 초와 한의 대결에 의해 중국은 통일 왕조를 이뤘습니다.

한나라 시조 유방의 먼 후손인 황숙 유비와 조조, 손권이 각축하는 삼국지에 비해 초한지는 그 유명세가 퍽 시들한 요즘입니다. 아무래도, 수많은 호족들의 각축 속에 정립된 3대 세력은 제갈량의 계책 그대로 변화가 무쌍해 관전의 재미가 더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스토리텔링의 매체가 풍부한 점이 크겠지요. 우선은 나관중에 의해 삼국지연의라는 형태로 소설화된 이야기는 구전설화라는 형태로 민간에 검증된 여러 이야기와 엮이며 매력적인 서사구조를 갖게 되었고, 근년만 해도 코에이를 비롯한 일본 게임의 영향으로 일상 속에 살아 숨쉬는 고전이 된 까닭일겝니다.

반면, 유방과 항우의 대결은 장기라는 동양의 양대 보드게임 중 하나로 구현되어 지금까지 내려왔지만, 약자 유방이 강자 항우를 이기는 단선적 구조로 인해 삼국지에 비해 다소 밋밋한 내러티브를 갖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만 해도, 삼국지는 지금까지 다양한 형태로 열번 이상 섭렵했다면, 초한지는 끽해야 두번 정도 봤을겁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유방과 항우의 대결을 인물 중심의 시각으로 다
시 볼 수 있었던 즐거운 기회였습니다.

장따커, 쉬르훼이

한나라의 개국에 큰 공을 세운 세명의 영웅, 장량, 소하, 한신을 일컬어 한고조 유방은 삼걸이라 불렀지요. 이 책의 독특함은 군주 레벨의 시점을 유지하는 기존 책과 달리, 공신 레벨에서 이야기를 재편합니다.

예를 들면, 귀족의 자제로 진시황을 못잡은 한을 품고, 유방과 제휴하여 개국한 장량의 경우는 유방과 군신 뿐 아니라 사제라는 맥락을 갖고 느슨한 동맹을 맺습니다. 반면, 소하는 시골에서 유방과 함께 봉기한 친구이자 동지지만, 안살림을 도맡은 천하의 재상이었고, 충성스러운 신하였습니다. 그 유명한 대장군 한신, 그는 뜻을 펼치기 위해 유방과 의탁하여 세상을 평정했으나 개인적 야심과 치솟는 명성간의 조화를 못이루고 결국 토사 후의 팽구로 전락합니다. 그외에 독한 계략을 잘 쓰는 진평의 이야기는 또 하나의 재미기도 합니다.

읽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난세의 정의, 난세의 처신에 대한 부분이 가장 주목할 부분입니다. 평민인 포의(布衣)가 세상의 주인으로 나서는 과정에서 이합과 집산, 그리고 명분과 실리, 들어가고 나오는 타이밍 등 모든 것에 대한 통찰이 결국 성패의 요건이지요. 널리 보는 비전과 사람을 담는 그릇도 중요한 덕목입니다.

몇번을 작은 성공에 안주하며 후궁에서 주색에 빠져있던 유방을 꺼내온 유방의 신하들과, 성공의 계책이 있었음에도 채택하지 않아 범증을 내쳐 죽게 만든 항우의 용인술은 그 차이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점이기도 합니다.

한신 또한, 괴통의 천하 삼분지계를 받아들이지 않아 유비의 운명이 될 수도 있었던 그가, 왕도 아닌 회음후로 격하되어 끝내 척살 당하는 운명이 된 점도 재미납니다. 반면, 욕심을 내지 않고 영예와 영화를 모두 누린 장량의 노회함은 고대 중국의 정치 시스템을 꿰뚫은 전략가 다운 면모가 잘 드러난 사례입니다.

복잡한 의미 다 빼고도, 동네 건달의 형님이었던 유방이 세상을 제패하는 과정, 모든걸 다 가진 엘리트 항우가 서서히 몰락하는 과정을 다양한 프리즘으로 보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한 책입니다. 우리 아들도 매우 재미나게 읽은 이야기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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