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뇨리아 광장까진 계획대로 멋졌는데, 그 다음은 여행객의 법칙이 슬슬 작용합니다. 계획대로 되는 일이란 없다는 여행객의 법칙 말입니다.

시뇨리아 광장 근처에 값싸고 구미 당기는 음식점을 몇개 봐 두었는데 죄다 휴장입니다. 아마 피렌체 최대의 관중 동원력을 지닌 우피치 미술관의 휴관일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배는 고프지, 당장 갈데는 없지, 식구들은 피로한데다 실망감이 가득하지, 참 답답하더군요. 일단 진경으로 허기를 달래려 베키오 다리로 향합니다.

아르노 강을 가로지르는 베키오 다리는 명불허전입니다. 베네치아의 리알토 다리와 유사하게 다리 위에 건물이 들어선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다리를 한참 보다가, 고픈 배보다도 결국 화장실이 급해져 드디어 식사를 합니다. 주린 만큼 맛도 깊습니다.

이어져 피티 저택을 갑니다. 예전 메디치가와 대결하던 피티 가문의 집입니다. 메디치에 명백히 반대를 표명하는 입장이어서 언덕위의 피티 일당을 언덕당, 아르노 건너편 두오모 근처의 메디치를 평지당이라 했으니 명칭도 재미 있습니다. 게다가 피티는 돈으로 메디치를 이기려 이 큰 저택을 지었지요. 아이러니컬하게도 메디치는 화려한 디자인을 제출한 브루넬레스코를 떨어뜨리고 수수한 미켈로초의 설계를 승인합니다. 브루넬레스코는 피티의 대저택을 설계하게 됩니다.

결국 의도된 겸손으로 몸을 낮춘 메디치가 승리하고, 결국 후손 대에는 메디치 가문에서 피티 저택을 매입하니 아이러니입니다.

하지만, 메디치가 피티 저택을 매입할 당시는 코시모의 유지도 다 잊어버린 나약한 후손의 시대입니다. 겸손을 망각하고 오만으로 무장하지요. 이미 독재자의 위치에서 베키오 궁전을 차지한 메디치는 강건너 언덕위의 피티 저택까지 서민들 사이로 다니기도 귀찮다고 강을 건너 건물을 연결합니다.

이게 바로 베키오 다리 2층이지요. 베키오 다리는 메디치 전용 고공 도강 통로였던 것입니다. 늘 몸을 낮춘 국부 코시모 메디치는 말도 높아 안 타고, 불가피할 때는 망아지를 타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후손 메디치는 시민들이 향유하던 미술 작품까지 베키오 이층에 갖다두고 독점했지요. 피렌체의 진짜 명품 미술품들이 프라이빗 피트니스 센터의 장식물로 전락했습니다.  
이탈리아 여행 이전부터 피렌체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석양에 물든 도시입니다. 한번 본 사람들은 모두가 찬미하는 풍경입니다. 미켈란젤로 광장에 서둘러 올라가면 딱 맞도록 여정을 짜서 움직였는데, 그만 여의치 않게 되어 광장에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택시잡고 부지런 떨면 가능은 한데, 지친 가족들이 내켜하지 않습니다. ㅠㅜ 여행에서 에너지 관리는 시간관리만큼이나 중요합니다.

결국, 가까운 아르노 강으로 갔습니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난 산타 트리니타 다리에 좋은 자리를 잡습니다. 해는 땅끝으로 꺼져가고, 도시는 금빛으로 물듭니다. 아무 말도 필요없습니다. 그저 노을에, 실루엣에, 살랑이는 바람에 육신을 맡기고 무념의 상태 자체를 즐깁니다.


어느 위치에서 보든, 피렌체의 석양은 매혹적임에 틀림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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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Inuit
@inuit_k / CxO / Author ("가장 듣고 싶은 한마디 YES!") / Making better world, every min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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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 다리를 보니까 영화 향수가 생각나네요. 귀족들은 땅에 절대로 내려오지 않으려고 그러고 서민들이 다녀야 하는 바닥은 더러운 흙으로 더럽혀져 있어서 질병이 우글우글한것이 아주 대조적이었거든요^^;
    • 맞습니다. 향수에서 저도 저런 타입의 다리를 보고 참 신기하다 했어요. 실제로 보니 당시 다리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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