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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더 이상 한줄도 못 쓰겠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느낌입니다. 지금 쓰는 책은 힘겹게, 힘겹게 한줄씩 뇌신경을 뽑아내듯 한계를 돌파하고 있는 중입니다. 마음에 안 들어도 일단 저기까지만 가보자, 스스로 달래고 얼르며 말입니다. 책은 엉덩이로 쓰는거라는 산나님 조언대로, 되든 안되든 시간 정해놓은 만큼은 앉아있으려 합니다. 벌써 석 달째 주말들입니다. 어제 밤엔, 잠시 쉰다고 읽던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순례자의 팍팍한 피로와 갈증을 느끼며 사막과 숲길을 따라 타박타박 걸었습니다. 글맛을 즐겨 야금야금 읽겠다는 각오와는 정반대로, 카미노를 단숨에 내달아 한 밤에 산티아고 끝까지 도착해 버렸습니다.

문제는 책을 다 읽어버린게 아닙니다. 이 책을 읽으니 너무 비교가 되어 맥이 탁 풀리고 글 쓰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물론, 저랑은 주제도 다르고 목적도 다른 책입니다. 산나님은 기행과 수필의 믹스고, 전 정보와 레슨이 범벅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책이라면 읽는 맛이란게 있는데, 산나님 글이 천상의 목소리라면 제 글은 삑삑거리는 기계어군요. 맥이 탁 풀어지는 느낌입니다.

김희경

원래, 육체가 야생에 놓이면 인류라는 종이 공들여 발달시킨 내면의 기제가 작동하게 마련입니다. 생존에 몰두하고, 존엄과 투쟁해야 합니다. 예리한 감각과 명료한 집중력, 정신과 육체가 호응하는 그 순간 해방감과 몰입을 느끼게 되지요. 동서의 현인들이 육체 노동을 신성시한 까닭이기도 합니다. 

코엘료가 걷고 삶의 전기를 맞았다하여 그 명성을 더한 산티아고 가는길, 카미노(Camino)입니다. 800km 길을 한 달 남짓 걷다 보면 같은 길을 걷는 순례자들끼리 교감하고 소통하고, 무엇보다 스스로와 깊이 대화하면서 어떤 답을 얻게 되어 치유의 길(therapy route)라고도 불리웁니다.

오프에서 산나님을 뵈었을 때 몇 마디 주어듣고 상상했었습니다. 그러나 제 상상은 빈곤했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걸었다' 했는데 사소한 무게에 일희일비하게 되는 그 고행의 의미가 어땠는지 책을 보니 조금이나마 짐작을 하게 됩니다. 외길이라 '만난 사람 또 만나는' 인연의 살랑거림과 묵직함, 여러 사람 만나서 '파티했었다'는 그 우주적 융합은 형용하기 어려운 생의 압축일테지요. 함께 걸음한 짧은 시간, 그리고 무언의 몸짓에서 서로 어루만지고 북돋우는 시간들은 타인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화해와 소통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며 관계의 선함에 대해 많은 생각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부러웠던건, 글쟁이로서 산나님이 이룬 돌파(breakthrough)입니다. 전작인 '흥행의 재구성'과 비교하면 극명합니다. 장르적 차이 이면의 본질적 성장 아닐까 싶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스스로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 이야기와 직조합니다. 남의 이야기 써서 날로 먹는다 미안해 하던 마음의 보상인지, 결국 남의 삶에서 내 삶을 보게 됨인지, 내밀한 저자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진솔하게 적어 내립니다. 읽으면서 마음이 함께 뜨끈해지는 느낌입니다. 수호천사와 함께 찾은 크루즈 데 페로 장면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묘하게도 슬프기만 한게 아니라 정화의 느낌이 강했지요. 

산나님 스스로 표현하기를 광화문 한복판에서 벌거벗고 선 느낌이라고 하는데, 딱 그렇습니다. 자의식 강한 기자 출신의 저자로서는 무궁한 용기가 필요했을겁니다. 그러나, 이젠 글쟁이로서 오롯이 길을 가실 수 있겠다 싶어 느꺼웠습니다. 마음의 짐을 훌훌 벗어야 자유롭게 글을 쓸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 힘든 마음을 정결하게 써내릴 수 있다면, 무슨 글을 못 쓸까요. 만일 카미노가 신통력이 있다면, 산나님은 내면의 강함을 끌어내는 마법을 선물로 받았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며 소원한건, '카미노에 가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제가 거기 간다는건, 마음 속 평화가 사라졌음을 의미할테니까요. 어쩌면, 유사시에 가볼 데를 안 것 자체로 이미 위안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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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uit
@inuit_k / CxO / Author ("가장 듣고 싶은 한마디 YES!") / Making better world, every min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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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은 엉덩이로 쓰라는 말에 밑줄 좌악 했습니다. 직장에서 하는 일도 그와 같지 않나 생각합니다만, 시간내에 주어진 분량(업무량)을 처리하는 것을, 시간을 어긴 성과물은 결코 좋은 결과가 아니라고 사무실 식구들에게 얘긴 하곤 합니다. 그래도 진듯히, 꾸준히... ^^

    여행기로 알고 있는데, 치유가 주제인 듯 합니다. 여행자는 느끼는 것을 정갈된 글로 표현했다는 것이 그 치유의 느낌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그 이야기가 궁금해 지는군요.

    비가 그친 일요일 오전. 다시 남산을 갈까 합니다. 그러다 보면 저도 치유가 있지 않을까요? 뱃살이 빠지는 뭐 그런... ㅡ.ㅡa;;;;
    • 뱃살 빠지는 치유.. 저도 원합니다. ^^

      오후에는 해가 나면서 날씨가 좋아지고 있네요.
      걷기 좋은 날입니다. ^^
  2. inuit님 책 나오면 이 책과 비교 이벤트라도 해야겠군요=_=
  3.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 걷는것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
    올레길 1km에 아쉬워했으나 800km 카미노 길을 걷는
    여정이라... 또 다른 나로 거듭나는 길이 될 것 같군요..
    무작정 가보고싶다라는 이 치기는 제 무지함 때문인 것 같습니다..
    • 네. 평소 걷기랑은 완전히 다른 걷기 같아요.
      재미난건 제주 올레길도 카미노를 다녀온 분이 만든거죠.
      우리나라에도 그런 멋진 걷는 길을 만들어보기로 하고 말입니다.
  4. 아깝지만 저도 모르게 다 읽어버린 책입니다. 산나님이 카미노를 걷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폭 빠져서 읽고나니 아까워서 다시 읽고 있습니다.
    • 와.. 저랑 같은 느낌.
      전 나중에 필요한 시기가 오면 다시 읽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5. 비밀댓글입니다
    • 아. 뭔가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했는데..
      유명한 그분일까요..

      암튼, 나중에 이야기하지요..
  6. 산나님은 좋으시겠습니다. ^^
    자신의 지난 날을 보듬고, 지금 상태를 알아보며, 앞 날을 응원하는 그 속깊은 배려에 누구인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 모든 것이 블로깅에서 시작된 우정이란 것이 거듭 놀랍습니다.

    저도 산나님의 책을 리뷰할 생각이 있었는데, 이누잇님의 리뷰를 읽고나니 쉽지 않겠습니다그려.
    • 미탄님의 들여다보는듯한 그 눈매가 참 부럽습니다. ^^
      미탄님 리뷰가 너무도 궁금해요.
      산나님의 정신적 서포터 시잖습니까. ^^
  7. inuit님에게는 사람을 끄는 '무엇'이 있는 듯?
    이미 하나의 기호가 된 '카미노' - 저 역시 가고싶지 않았거든요..- 근데, 이 산나님이 누구신가 궁금증과 함께 이 책을 읽어봐야지 싶어지니요.
    이미 내가 '좋아하지 않는' 과일인지 채소인지로 분류되었었던 방울토마토때와 같은 일이 벌어지니요.
    • 엥 카미노 다녀오셨나요?

      산나님 블로그 한번 보셔도 좋고, 아무튼 글로 느껴지는 이상으로 멋진 분입니다. ^^
    • ㅎ 시제를 잘못 쓴 탓에... 저도 깜짝 놀랐네요.
      '가고 싶지 않은 산티아고' 임에도 불구하고.

      '좋아하지 않았던 토마토'임에도 불구하고 토댁님네 것에는 끌렸던 바로 그 이끌림을 말한다는 것이 그만^^
    • 아직 안 다녀오셨군요. ^^
      나중에 편한 마음으로 걷는다면 그게 행복일듯해요.
      책에 다섯번 카미노를 걸은 분도 나옵니다. ^^
  8. 점심 때 사서 다 읽었습니다. 그럴수밖에 없었지요. 아주 잘 쓰셔서 저도 책 쓰기가 두렵습니다. -_-; 기회가 되면 sanna님 뒤를 따라 카미노를 걷고 싶습니다.
    • 유정식님도 그랬군요..
      산나님은 글쟁이 킬러! OTL
    • sanna님의 글은 여러 가지 맛이 났습니다. 어떨 때는 달디단 쵸코 케잌 같기도 하고, 어떨 때는 푹 고아 삶은 설렁탕 같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지리산 산기슭의 샘물 같기도 했습니다. 웃다가 울다가 명랑해지다가 심각해지면서 오늘 오후 내내 책 읽느라 작파했지요. ^^
      그나저나 sanna님 때문에 저도 글 한 줄 못 쓰게 생겼으니 대략 난감입니다. -_-;
    • 그게.. 제 좌절의 단초지요 ^^
      여러 맛이 나는데, 또 하나로 어울리는 그 부분이요..
      유정식님도 참 감성적이시네요. ^^

      그나저나 직접 타격은 저 아닐까요.
      원고 넘길 날은 자박자박 다가오고.. 제 글은 흉해서 보기 싫고.. ㅠ.ㅜ
    • 어허~ 두 분 왜 이러십니까..
      고춘자와 장소팔 만담처럼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태워주시는 비행기에 현기증이 납니다 그려~ ㅎㅎㅎ
      두 분 필력이야 제가 익히 아는데, 두 분 좌절시킬 일이야 절대 없다는 거 제가 장담하고요.
      잘 봐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
    • 장소팔, 고춘자라니.. -_-

      전 젊어서 누군지 모르겠거등요. ;;;;
    • 유정식님이 그정도라면 저는 금서목록에 넣어야할 것 같습니다 ^^
    • 글 다쓰고 읽으시면 됩니다. ^^;
    • 장소팔, 고춘자를 모른다고라고라~~~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왜 이러서염~^^
    • 전 아직.. 젊은걸로 되어 있습니다.
      제 블로그 손님들에게 거짓 폭로를 하시려고 하시나이까.. ^^;;
  9. 산티아고의 길을 걷는 건 제 삶에 하나의 목표처럼 되어있습니다. 그 길을 걸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긴 알게 되면 늘 찾아 읽곤 합니다. 질투도 들고, 설렘과 그리고 내가 그 길을 걷는 모습의 상상 등으로 한번 읽고나면 몇일을 정신도 못차리지만.. 그래도, 거부할 수 없는 뭔가가 또 책을 집어들게 하지요. 언제 가게 될지 확실치 않은 카미노지만.. 늘 느끼는 건, 그 곳에 분명 스스로와 마주할 마법 같은 무언가가 있다는 거죠. 소개해주신 책도.. 기대됩니다.
    • 정말 산티아고를 동경하시는군요.
      다녀온 사람 질투할 정도면 말입니다. ^^

      만일 그렇다면, 이 책 읽지 마세요.
      몸살 나실겁니다. ^^;;
  10. 저는 inuit님의 이 서평을 아껴가며 읽었습니다 ^^ 글 쓰는 사람으로 나보다 더 잘 쓰는 사람에 대한 선망이 왜 없겠습니까. 넘어설 수 없는 벽이라 느껴지면 절망이 되기도 하구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다들 잘 쓰시는 분들이라 그런 걱정은 안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 다들 겸손하셔서 그렇지요.

    저도 이 책은 꼭 읽고 싶네요. 기다리겠습니다. 이 책을 만날 수 있는 날을요 ^^
    • 재주로 치면 어찌어찌 흉내는 내는데, 저 깊은 마음 엉킴없이 풀어내는 솜씨는.. 그냥..
      '속을 진솔하고 담담히 드러낼 수 있어야 글쟁이'라는 하나의 criterion을 얻었습니다.
  11. 짧게 쓴다고 계획했던 글이 지루하게(?) 길게 되었네요. 트랙백이 안되는 것을 아시죠? 아래에 글 링크를 남깁니다. ^^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http://zizukabi.blogspot.com/2009/05/my-santiago.html
    • 아.. 지저깨비님 글쓰기 싫어하신다고 해서 전 기대도 안했는데
      너무 감동적입니다. ㅜ.ㅠ
  12. inuit님^

    저 드뎌 산나님과의 여행을 끝냈습니당..
    너무 아쉬워용^^
secret

흥행의 재구성

Biz/Review 2006.11.19 19:15
자, 영화를 하나 보려고 합니다.
영화 사이트에 갔는데 몇개의 모르는 영화들만 있습니다. 참조할 만한 정보라고는 영화 전문가란 사람들의 별점만 있습니다. 어떤 영화를 고르시겠습니까?


이번도 뭐 정답 없는 문제입니다. 요즘은 댓글이라는 부가적 정보가 있고, 영화 전문가가 따로 필요한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마추어 리뷰어(I mean, non-paid reviewer)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별점이 감탄사나 이모티콘으로 격하된 감이 있지만, 몇년 전까지만 해도 별점은 의미소였습니다. 그리고 쓸만한 영화는 바로 별점 세개 짜리라는 농담이 있었지요. 다섯개가 아니라.

흥행의 재구성

김희경

부제: 히트하는 영화의 진실 혹은 거짓


전문 비평자의 높은 평가를 받는, 즉 별 네개나 다섯개 보다 별 세개를 선택하면 실패하지 않는 이유야 쉽습니다. 지나친 작가주의는 피곤할 뿐이고 흥행은 대중성이 담보하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러한 영화 흥행의 구조에 대해 현장의 목소리와 구조적 성찰을 엮어낸 책이 바로 '흥행의 재구성'입니다.
이 책은 1) 기획 과정, 2) 개봉 마케팅, 3) 관객의 수용자적 특성 그리고 4) 히트 영화의 사업적 속성이라는 네가지 갈래로 나뉘어 있습니다. 워낙 영화라는 재료가 친근한 까닭에 이 책이 아우르는 다양한 깊이는 어떤 의도로 책을 읽던 원하는만큼의 만족을 얻도록 텍스트와 컨텍스트가 잘 안배되어 있습니다.



Nobody knows anything
정말 하늘도 미리 알기 힘든 것이 영화의 성공여부입니다. 의외성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영화산업에서 세계 최고의 위치를 점하는 헐리웃 영화는 나름대로의 생존법칙이 있으리라 믿어집니다.
헐리웃 영화의 특징이라면 무엇을 꼽을까요? 단순한 내러티브, 해피엔딩, 불에 타고 폭발하고 물에 떠내려가는 막대한 자금. 이런거겠지요. 헐리웃 영화의 기획과정과 성공공식은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흥미롭습니다. 제가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가장 근원적인 부분은 무수한 아이디어를 제한된 시간에 presentation 해야하는 상황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니 한줄로 복잡한 개념을 요약하는 one line pitching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에일리언은 '우주선의 죠스'였다고 합니다. 유사하게 말해 인디펜던스 데이는 스타워즈가 V를 만났을 때이고, 맨인블랙은 고스트버스터스가 ET를 만난겁니다. 결국 이렇게 클리어하게 전달되는 '하이컨셉' 영화가 작업의 자금을 지원받을 확률이 무척 높으니, 원래부터 오리지널인 영화는 애초에 헐리웃의 품에 안길 가능성이 희박한 겁니다.

그리고 거액의 스타 개런티와 제작 비용 마케팅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헐리웃이 그동안 학습해온 여러가지 기법을 동원합니다. 예컨대 프리 마케팅과 테스트 스크리닝을 거쳐 결말을 다시 고치고 촬영도 다시 합니다. 어찌보면 QC 작업이기도 하지요. 이 과정에서 또 모든 영화는 서로를 닮아가고 과거를 모방합니다. 이제 리마커블 해질 여지는 더더욱 줄어듭니다.
이렇게 전형화된 헐리웃 제작 패턴은 성공의 평균 확률을 높이고 분산을 줄이는 과정이라고 간주해야겠습니다.

그렇게 뻔한 영화를 왜 볼까요. 어차피 관객도 기대하는 부분이 딱 그만큼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집을 떠나 어두컴컴한 극장안에서 판타지를 맛보는거지요. 스토리가 너무 복잡하거나 생경한 내러티브는 부담스럽습니다. 책에도 나오는 바처럼, 오히려 경제나 삶이 스트레스로 가득한 시절에 영화산업은 상종가를 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과거 성공한 스토리의 변종을 통해 새로운 영화를 만드는 동종교배는 생물이 그러하듯 다양성의 상실로 멸절하기 십상입니다. 헐리웃은 그에 대한 대비책도 있습니다. 바로 인디 영화입니다. 인디로 성공한 영화 제작자를 영입하거나, 우리나라 영화의 대본을 사서 재작업한다든지, 작은 돈으로 다양성을 보충해 가며 지금 가진 우성의 유전자를 이어나갑니다. 얼마나 오래갈지는 몰라도 당분간은 이런 패턴을 반복하겠지요.


Business Drives Movies
이 책은 저자가 미국에서 문화과정의 MBA를 이수하며 배운 프레임웍과 자료를 바탕하였기에 사업적 관점의 조명이 탁월합니다. 저는 비즈니스와의 놀라운 유사성과 시사점이 있어 책을 잡은 내내 신이 나서 줄을 긋고 낙서하고 메모하며 읽어댔습니다.

예컨대 고딘씨의 리마커블이란 개념을 영화판에서는 'shock value'라 부르며 성공의 요소로 쳐줍니다.
멀티플렉스가 등장하며 생산설비의 discountinuity가 오히려 완화되는 점은 경제학 개념에서의 short run, long run에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capacity의 연속성은 마찰을 줄여 디지털 산업의 특징인 수렴성과 양극화 현상을 촉진하여 오히려 소규모 극장이 늘어도 소규모 영화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현상을 보입니다.


또한, 시사회와 대규모 선전의 심리학도 그렇습니다. 서로 판단이 힘든 낯선 상황에서 한명이 킥킥 웃으면 모두 와 하고 웃어버리며 재미있는 영화가 되는 효과를 얻거나, 엄청난 광고비를 쏟으걸로 보아 분명 대단한 영화구나 하는 인상을 심어줍니다. 유사하게 기업에서도 viral marketing 뿐 아니라 좀 더 복잡한 상황에서의 정교한 signaling 기법을 많이 사용합니다. 물론 마케팅의 기본적 tool이므로 영화라고 다르기를 기대할리 없지만 말이지요.

이 뿐인가요. 시간이나 여력이 없어 판단하기 힘든 영화는 시나리오를 사서 캐비넷에 감금해 버리는 행위 조차도, 거대기업이 작은 벤처가 경쟁사로 가서 얻을 damage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그냥 사버리는 practice와도 매우 닮았습니다.

사업적 접근법을 문화에 적용하여 성공한 사례는 프랜차이즈 영화(franchise movie)라고 생각합니다. 프랜차이즈 영화는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처럼 성공한 원작을 시리즈로 만들어내는 영화입니다. 프랜차이즈 영화가 헐리웃에 가져다 준 첫째의 공은, 영화의 주도권을 스타가 아니라 캐릭터로 귀속시킨 점입니다. 스타의 후속영화에 대한 제어권을 일정부분 캐릭터가 소유하므로 과다한 개런티를 지급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나이들어 가슴 봉긋한 헤르미온느보다 1편에서 만큼 깜찍한 헤르미온느가 있다면 전 후자를 절대적으로 선호합니다. 제가 매료된 것은 롤링 여사의 판타지 세계관이지 엠마 왓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정적인 원가 절감을 가져옵니다. 둘째로, 캐릭터는 영화사가 보유하면서 후속 사업을 지속하게 합니다. 잘만 관리되면 미키마우스처럼 100년도 가겠지요. 물리적으로 지치지도 않고 세계 어디도 마다않고 가니 레버리지 효과가 큽니다. 무엇보다, 영화 흥행의 주된 비용 계정인 마케팅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점입니다. 1편이 성공했고, 그 다음 스토리 구조를 완전히 이해하고 눈으로 확인하러 가는 관중에게 이 영화가 무슨 영화인지 설명할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만 이렇게 멋지게 찍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크리스마스까지 납품하겠습니다. 이 두가지 메시지면 충분하지요. 흥행의 변동성을 최소화하면서 마케팅 비용까지 줄이니 금상첨화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장화홍련을 필두로 대두된 기이한 현상입니다. 이른바 어설픈 내러티브의 흥행성공입니다. 2000년대 들어와 전통적 관점으로는 말도 안되는 스토리가 성공하는 이유가 바로 관객이 한번 상황에 몰입만 된다면 모자라는 스토리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더 만족스러운 스토리 소비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소극적 UGC 개념으로 봐도 되고, prosumer라는 관점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다. 인터랙티브가 부족한 영화라는 전통 미디어에서 상상을 통해 소비자가 참여할 여지를 남긴다는 점이 신선한 발상 아닙니까.
이 모든 유사성과 시사점이 어차피 영화를 산업화 한 헐리웃의 공이고 업보겠습니다.


Excerpts
현직 문화담당 기자가 쓴 책이라서, 글이 재미있습니다. 딱딱한 재료를 양념 치고 조리를 하여 말랑말랑 잘 읽히지요. 공감이 가는 섬세하고 힘있는 펀치라인이 많습니다.
영웅은 개처럼 맞는다. 영웅은 끝까지 두들겨 맞고 멸시를 당해야 한다. 그래야 그때까지 당한 것의 총합보다 더 무시무시하고 센 반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부활한 예수의 벌거벗은 허벅지가 터미네이터를 연상시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폭력의 강도를 높여 스펙터클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며
요즘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영화를 만드는 생산자들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관객들의 분노보다 관객들의 무관심이 되었다. 엔터테인먼트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심박수를 높이는 것이다. 관객들은 자극받고 도발당하고 분개하고 도전받기 위해 돈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다.
-오리지널 영화가 되기 위한 노력보다 타협의 산물이 받아들여지는 현상에 대해
영화관람은 집단으로 겪는 일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개인의 고독한 행위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영화관람은 강한 사회적 제의와 개인이 소설을 읽으면서 겪는 백일몽의 합성된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영화가 주는 경험의 가치에 관하여
책은 영화 자체보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과 그 물밑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리고 영화 자체의 재미 뿐 아니라 흥행에도 촉각을 기울이는 현 세태의 궁금증을 효과적으로 해소합니다. 어찌보면 공식에 의해 만들어지는 영화판을 들여다 보았기에 더이상 영화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재미가 없을 듯 하지만, 어차피 알면서 원해서 속는게 영화입니다. 그래서 밑바닥을 알고 보면 영화보는 일이 더 즐거워 질 듯 합니다.

대단히 무거울 가능성이 높은 내용을 매우 깔끔하고 섬세하며 단정히 엮어낸 책입니다. 책은 주인을 닮는다던데, 이 책의 주인공이 궁금해질 따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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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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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러고 보니, 어째서 "영화"라는 문화에만 별점이 활성화 되어있는지 궁금해지는군요.
    • 재미난 궁금증입니다. 저도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언뜻 생각나는 부분은 이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1) 일단 경험재다. 미리 소비한 남의 의견이 궁금하기 때문 2) 이리저리 길게 말하면 귀찮으니 딱 얼마나 좋은지 쉽게 표현해주라

      그러고보니 마찬가지 이유로 20자평도 영화에서 잘 쓰이는 듯 합니다.

      더 궁금하시면 이부분은 이 책의 저자인 김희경 님께 여쭤 보도록 할까요? ^^
    • 별점 평가는 레너드말틴이 원조라고합니다. 시초라고 하기에는 이견들이 있지만 30년전부터 별갯수로 점수를 매기는 방법으로 유명해졌으니까요.

      우리나라에서 처음 그런방식으로 점수매긴분은 고 정영일씨구요....

      손가락으로 up,down해서 평가를 하는방식은 유명한 평론가인 로저 애버트가 원조라고합니다.

      ^_^
    • 20자평 원조는 씨네21
    • 2)번 말씀 공감합니다. 미국영화는 보통 엄지손가락으로 하죠..^^
      그리고 냉혹하게 수우미양가 혹은 점수보다는 조금더 인간적인듯.
      음식점과 호텔 평가도 "별"로 많이 합니다.
    • 주성치님//
      영화평의 역사를 꿰뚫고 계시는군요. 덕분에 좋은 사실을 많이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isanghee님//
      그러고보니 음식점과 호텔도 영화와 유사한 상품이군요. 주저리주저리 이건 좋고 이건 어떻고 골치아프지 않은 분류도 의미가 있겠네요. zagat survey는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2. 비밀댓글입니다
  3. 서점에서 제목만 보고 떡밥인줄 알고 지나쳤는데...
    지렁이였군요 ㅡㅡ;; 저에게 상당히 도움이 될듯한... ㅋㅋ
  4. 이미 아시겠지만, 저자 분의 블로그입니다. http://www.bookino.net/
    저는 한 주 전에 처음 만나뵙게 되었는데, 아주 묘한 매력이 있는 기자님이셨습니다.
  5. 포스팅도 멋지지만 마지막 문장이 참 재미있습니다. 궁금해하던 그 책의 주인공과 지금은 꽤나 친밀한 관계가 되셨으니까요 ^^
    • 그렇지요.
      저때도 산나님하고 댓글로 친한 상태였지만, 지금처럼 깊은 존경과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될줄은.. ( 저혼자만의 생각일진 모르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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