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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판테온에 갔습니다. 구의 지름과 천장의 높이가 같은 독특한 기하라든지,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빛이 들어오는 구조 등은 잘 아는 바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처럼 기대를 뛰어 넘는 정서적 만족을 준 곳도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웅장한 규모에 압도됩니다. 근방에서는 사진을 찍어도 전체 모양이 잡히지 않을만한 크기입니다. 이것을 고대 로마시대에 만들었다는게 짐작이 되지 않지요.

이 독특한 구조는 바티칸 미술관이나 파리를 비롯해 무수한 후대 건축가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오죽하면 브루넬레스코는 로마 유학 시절에 판테온의 벽을 몰래 깨서 그 공학적 비밀을 습득했겠습니까.

그러나 판테온의 매력은 넉넉한 공간 사이로 들어오는 서광입니다. 판(pan)테(the)온이란 뜻 그대로 모든 신을 섬기는 범신전입니다. 그래서 사방 어딜 둘러봐도 둥그런 평등한 구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특정한 신에게 바쳐지지 않은 모든 신을 위한 신전, 그래서 오히려 인간을 위한 신전 판테온입니다. 그 크기로 인해 실내이면서 답답함이 없고, 위가 뚫렸지만 안에 앉아 있으면 한없이 포근합니다. 


그리 유명 장소는 아니지만, 판테온 근처에 미네르바 성당(Santa Maria sopra Minerva)이 있습니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종교재판을 받은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들, 로마에서 당당히 외칩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다음 행선지는 나보나 광장입니다. 

나보나 광장은 한쪽이 매우 긴 직사각형의 광장입니다. 과거 경기장이었기에 갸름합니다. 벤허 같은 전차 경기도 열렸겠지요. 이름 자체도, 경기장을 뜻하는 아고네(in agone)라는 말이 변해 나보나라고 불리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또 천재조각가 베르니니의 4대강 분수로 유명한 곳입니다. 로마의 거실이라는 별명처럼, 현지인들의 사교 장소이기도 하지요. 

비록 비싼 돌은 아닐지언정, 하나하나가 어디 고이 모셔 두어야 할 작품들인데 분수 하나에 오글오글 모여있습니다. 
더 놀라운 건, 자신들의 신이나 이상을 새기는게 아니라 세계의 모습을 담으려 애썼다는 점입니다. 남미의 플라테 강, 아프리카의 나일강, 동양의 갠지즈강, 유럽의 도나우 강 이렇게 4대 강입니다. 세상 지리에 밝고, 세계의 으뜸이라는 로마의 자신감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지요.

분수를 한참 즐겨보고, 다음 목적지로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성 아녜제 성당(Sant'Agnese)이 눈에 띕니다. 이런, 놓치고 갈 뻔했군.

아녜제는 흔히 말하는 성녀 아그네스입니다. 너무 예뻐서 빗발치는 구혼을 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종교에 귀의해 동정으로 죽기를 원했던 소녀, 결국 기독교도라는 죄목으로 창녀의 집에 넘겨졌어도 끝까지 동정을 지키다 사형을 당한 아그네스입니다.

과연 종교란게 무엇이길래, 어린 소녀가 목숨까지 하찮게 여기며 귀의했을까요. 또 그 꽃다운 정념을 기독교란 낙인 하에 꺾고 만 그 이들의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있었을까요. 모두가 신을 모신 마음은 같았고 진실했을텐데 왜 그리 광적이었을까요. 아니, 그나마 이성이 좀 더 자리를 잡은 지금은 광기가 좀 사그라들었을까요.

어린 성녀 아녜제의 성당은, 수많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소통하는 그 공간 곁에 물러서, 무수한 화두만 던진 채 고혹적인 우아함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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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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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상에 종교적 광신만큼 무서운게 없지요. 그렇기에 어린 소녀의 순수한 열정을 무참히 짓밟을 수 있었을 겁니다. inuit님 포스팅이 왠만한 가이드보다 더 좋은 것 같아요. 올겨울에 로마로 가족여행을 갈까 생각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 로마는 정말 아는만큼 보입니다. 가이드 써도 좋지만 지금부터 열공하시면 재미날겁니다. ^^
  2. 아그네스가 누구인가하여 찾아보았습니다. " 집정관 아들의 구혼을 이미 그리스도와의 약혼을 이유로 거절" 했다니..대단한 사람이군요.
    저도 신혼여행기 후기를 빨리 올려야겠는데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으하하하하.
    • 네 미모도 뛰어났지만 의지도 대단했던 소녀입니다.

      정말 엘윙님 신혼여행 이야기가 빨리 듣고 싶군요. ^^
  3. 저도 로마 관광의 백미는 판테온과 나보나 광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판테온 돔 천장의 커다란 구멍, Oculus? 설명을 들으면서 정말 비가 와도 신전 안으로 안 들어올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지요.
    • 더운 기운이 밖으로 나오면서 비가 잘 들이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가 들어오긴 하지요.
      내부의 복도가 가운데가 솟아 올라 물이 쉽게 빠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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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마 입성입니다.

테르미니 역 근처, 숙소에 여장을 풀고 제일 먼저 성모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Maggiore)에 갑니다. 한 부자가 성당을 기부하려고 하던 차에 교황이 꿈을 꾸었는데, 한 여름에 눈이 내리는 곳에 지으라는 계시를 받지요. 설마 했는데 과연 흰 눈이 내린 곳이 있어 성당을 지었다는 매력적인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입니다. 그래서 별명도 설지전(雪地殿)이에요. 로마 4대성당 중 하나입니다.


7월의 이탈리아는 일광절약시간을 운용중이라서 9시나 되어야 해가 집니다. 그러니 저녁 때도 덥지 않아 오히려 다니기 쉽습니다. 가벼운 산책삼아 나선 길이지만 내쳐 걷습니다. 매일 순례자처럼 걷다보니 꽤 피곤했지만, 마침 로마오는 기차에서 한참 잘 쉰 덕에 멀리 걸을 수 있을듯 했습니다.

베네치아 광장 쪽으로 가다가 뭔가 멋져보여 길을 들어선 곳이 퀴리날레 궁전 앞이군요. 사고뭉치 대통령이 사는 곳입니다. 다시 베네치아 광장 쪽으로 갈까 하는데, 로마 담당관인 아내가, 여기라면 트레비 분수가 가깝다고 하여, 베네치아 광장은 무시하고 바로 신나게 내려갑니다.

분수의 여왕이라는 트레비 분수. 사실 분수가 아니더군요. 엄청난 조각 모듬 세트 사이로 물이 날아들 뿐이었습니다. 그 규모와 조각의 아름다움은 왜 트레비가 그리 유명한지 스스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보려던 계획을 바꿔, 물가에 걸터 앉아 한참을 보고 또 봤습니다. 이 분수를 만든 아그리파와 고대 로마의 수로 이야기부터, 헵번의 로마의 휴일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지루한 줄도 몰랐습니다.

하긴, 한참 봤다고 생각해도 또 새로운게 보이고, 누가 또 저거봐라 하면 신기한게 다시 보이는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한 볼거리가 많지요.


트레비 근방에서 식사를 하고 스페인 광장까지 걸었습니다.

여행 전부터 정이 가던 스페인광장과 스페인 계단은 실제로 봐도 참 좋더군요. 특히, 공간자체를 가득 채운 젊음의 열기가 인상적입니다. 아버지 베르니니가 만들었다는 배모양 분수도 흥겨운 볼거리였지요.


마침 어둠이 내리고 가로등이 켜져 로마의 야경을 본격적으로 감상하려던 차에, 비가 오기 시작합니다.

여행이 일상의 일탈이라면, 그 비일상을 충분히 즐기는 것이 여행의 참맛이기도 할 것입니다. 피할 수도 있었지만, 하루의 마지막인지라 온 식구가 비를 흔쾌히 비를 맞았습니다.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 비를 줄줄 맞아봅니다. 더위도 식고, 비 피한다고 다들 급한 움직임 속에 오히려 스틸 사진처럼 느린 우리 가족만의 동작이 품고 있는 여유도 좋습니다. 애들도 아내도 다 재미있어 합니다. 

그렇게 로마의 첫날은 온갖 낯설음, 설레임, 노곤함 속에서 저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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