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에 해당하는 글 2건

제 대학시절은 완전 아날로그였지요. 선생님이 분필로 판서하시고, 학생은 노트에 필기합니다. 다행히 XT (8086)나 AT (80286) 등 성능이 개량중인 PC가 있어서 과제는 컴퓨터로 제출했습니다. 보석글은 일찍 갖다 버렸고, 아래 한글이면 행복했지요. 숙제 끝날즈음, 9핀 라인 프린터가 찍찍거리면 퀭한 눈으로 담배 한대 꼬나 물고 다소 느긋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프리젠테이션이란 말조차 낯선 채 학부를 졸업했습니다. 대학원에 가서야 갑자기 프리젠테이션을 집중 교육 받았지요. 제 사수인 선배는 랩에서 내려오는 비기를 자상하게도 전수해 줬습니다. 빈 종이에 스토리보드 만드는 법, TEX으로 수식 적는법, 그래프를 출력하고 복사해서 오려 붙이는 법 (copy & paste를 직접 손으로 해보신 분?), TP 뜨는 법, OHP 쓰는 법 등 말입니다. 당시는 그래프 인쇄 자체도 skill set이 필요하고 복사기도 한번은 배워야 쓰던 시절이었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OHP를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프로그래머가 천공카드 전해듣기만 했듯 말입니다. 나름 OHP를 이용하는 기교들이 있었습니다. TP 갈아끼우는 테크닉, 볼펜으로 라인을 포인팅하여 강조하는 법, 종이로 문단 아래를 가리기, TP 두개를 겹쳐 비교와 애니메이션을 하는 등.

그리고는, 회사에 들어가자 마자 신입사원 시절부터 많은 프리젠테이션을 도맡아 했습니다. 임원 보고, 영어 발표, 학술 발표, 강의 등등.

MS사에서 파워포인트가 나오고 얼마나 편해졌는지. OHP에서 사용하던 모든 기능이 더 잘 구현되어 있어서, TP 만드는 수작업보다 발표에만 집중해도 되니 참 좋았습니다.

막 배운 프리젠테이션을 좀 더 체계화한 계기는 단연 비즈니스 스쿨이지요. 전문적인 강좌를 통해 제가 알던 지식과 팁들이 하나의 구조로 설명 가능해졌습니다. 물론, 이 때도 포인터를 쥐고 살았습니다. 팀 발표를 주로 맡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Garr Reynolds

(원제) Presentation Zen: Simple ideas on presentation design and delivery


최소한 프리젠테이션은 이골이 난 저입니다. 그리고 세상엔 MS 파워포인트가 있습니다. 아무나 그 소프트웨어에 글 적어 놓고, 프리젠테이션 한다고 나서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 열광하는 이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프리젠테이션의 핵심을 잘 정리한 책입니다. 대부분 공감하고, 배울 점이 많습니다. 프리젠테이션에 대해 입문서로도 추천할만 합니다.

다만, 모두가 좋다하면 무비판적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Good to great에도 일부러 딴지를 놓은 바 있습니다. 이번에도 저는 이 책의 주의사항만 말하고자 합니다.

1. 프리젠테이션 젠의 원칙을 이해한 후 잊어라.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만, 보고서를 방불케 하는 발표 자료 (slidecument)가 유행하듯, 젠 스타일도 또 하나의 일시적 유행(fad)이 될까 우려스럽습니다. 실제로, 인터넷 다니다 보면 겉멋만 든 zen 스타일의 발표자료가 심심찮게 보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제발 부탁인데, 이 책 무조건 따라하지 마십시오. 초식 좋아하다가 주화입마에 빠집니다. 책에서 말하는 감성적인 접근, 핵심을 때려주는 촌철살인은 어마어마한 내공이 받쳐줘야 가능한 일입니다. 프리젠테이션의 禪師나 가능한 일입니다.
어설피 그림 몇장에 메시지 몇줄로 때우려다가는 정말로 큰 코 다칩니다. 전해줄 스토리가 없고, 책 한권을 한 문단으로 요약할 능력이 안되는 이가, 자료만 zen 스타일로 만들었다고 안 되던 발표가 잘 될리 없습니다. 글의 양이 비슷해도, 의미는 '지나가다'님 댓글과 하이쿠간 간격과도 같습니다.

2. zen 스타일이 부적절한 프리젠테이션은 수두룩하다.
이 말 오해 없기 바랍니다. 선수는 어떤 장비로도 플레이가 가능합니다. 저 역시 어떤 프리젠테이션도 zen 스타일로 할 수 있습니다. 미분방정식을 사용한 금융공학을 젠 스타일로 설명하라해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게 효율이 있느냐의 이슈입니다. 디테일한 부분을 논의한다든지, 과정과 협의가 중요한 부분에서 젠 스타일로 어설피 접근하면 사실 호도 내지는 일방적 주장에서 그치고 말 뿐입니다.

3. 이 책은 관행적 프리젠테이션 스타일을 안 써도 된다는 면죄부가 아니다.
다만 다른 방법으로 생각해볼 옵션을 주는겁니다. 목마를 때 물이 무난하지만, 10시간 수술 마친 환자와 2시간 축구하고 나온 선수의 갈증 푸는 방법이 다르면 더 효율적인 이치와 같습니다. 효과는 결국 동일합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서재에서 사색하고, 산사에서 선을 닦듯, 때와 장소의 맥락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물론 공부의 깊이를 더하는건 똑같습니다.
그런면에서 책의 주장은 '프리젠테이션 스타일로서의 zen'입니다.

4. HD Presenta禪
이 책을 격하게 단순화하면 HD presentation입니다. 젠 스타일하면 퍼뜩 짚이는 그 부분이 그렇습니다. 순전히 기술적으로는, 관성적 평균보다 정보 취득-가공-처리-검색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에 그만큼 해상도를 올려보자는 의미입니다. 비주얼의 장점을 극대화하자는 뜻입니다. 감성이 온전히 대화에 집중하도록 여유를 주자는 방식입니다.

5. 프리젠테이션의 원칙은 늘 그대로이다.
그 외의 모든 사항은 전통적인 프리젠테이션의 황금률입니다. 핵심 메시지에 집중하고, 청중과 교감하는 발표말입니다.

이 책을 보고 내내 끄덕끄덕 공감했다면, Garr의 뛰어난 프리젠테이션에 설득되었을 뿐입니다. 사실, 그도 TED의 위대한 연설가들 비디오를 지하철 출근길에 ipod으로 보며 공부하는 영원한 수련자의 입장일 뿐입니다. 저는 연말 전사 프리젠테이션에 zen 방식을 사용해 봤습니다. 당시의 분위기에 적절히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프리젠테이션은 다른 방식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결국, 그가 정제해서 전달한 교훈을 삶 속에 어찌 들여 놓을지는 독자이자 프리젠터인 당신의 몫입니다.

신고

'Biz >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5가지만 알면 나도 스토리텔링 전문가  (28) 2009.01.31
성공하는 사람들의 대화술  (10) 2009.01.25
프리젠테이션 젠  (20) 2009.01.17
코끼리와 벼룩  (6) 2008.12.27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전략  (8) 2008.12.17
Toyota 무한성장의 비밀  (12) 2008.12.13

WRITTEN BY
Inuit
@inuit_k / CxO / Author ("가장 듣고 싶은 한마디 YES!") / Making better world, every minute.

트랙백  4 , 댓글  20개가 달렸습니다.
  1. 참으로 필요한 지적입니다. 프리젠테이션의 원칙은 늘 변함없지요. 어설픈 젠 스타일 추구가 오히려 속 빈 강정이 되는 경우를 많이 봐왔어요. 무작정 따라하기는 금물.
    • 네. zen 스타일 자체가 문제겠습니까만, 겉만 따라하는 조류는 경계할 일이겠습니다.
      LUV님 댓글 고맙습니다. ^^
  2. 갠적으로 무조건 심플 단순한 디자인을 선호해여...
    저도 대학3학년때가정 리포트 손으로 써 냈다는...
    복학하고4학년때 워드사용한다는 사실에 얼마나 떨렸었는지...

    항상 유익한 글 감사드려요 ^^
    • 금드리댁님, 워드 처음 사용할 때 그 야릇한 심정이 이해갑니다. ^^지금이야 익숙한 일이지만, 새로운 프로그램은 낯설고 경이로운 세상이었지요.
  3. 잊고 있던 보석글 이야기가 나올줄이야.. 그리고 보니 프리젠테이션도 뭔가 왕도가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원래라면 전 프리젠테이션을 아주 잘해야 하는 위치이지만 그런것들이 안되서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 혼자서 생각한것이 진실을 정직하게 적어라입니다. 기교는 그 후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뭐, 이렇게 생각은 하지만 정작 많이 어설프죠.
    어떤것이 좋은 프리젠테이션인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글을 읽다보면 한가지는 확실히 느껴집니다.
    쉽지 않게 긴 시간 차근차근 공들여 배우고 노력한 프리젠테이션의 길이라는 것을요.
    • 동안의 mode 소녀님께서 보석글 어찌 아시는지. ^^

      진실.. 가장 중요한 덕목이자 재료입니다.
      그리고, 그 진실을 예쁘고 먹기 좋게 담는 기술도 필요합니다.
      재료도 좋고 레시피도 좋아야 좋은 음식이죠.
      mode님은 현재 어떤 프리젠테이션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부분의 개선을 원하시는지 그런거요..
  4. 맞습니다.
    제 레포트도 손으로 손목 아프게 쓰다
    찍찍 소리내는 프린트에서 잉킂젯이 나와 어찌나 신기하고 깔끔하던지요..ㅎㅎ

    좋은 주말 보내고 계시죠?
    전 어제밤 친구네가 놀러와서 이제사 헤어지고 블러그소풍다닙니다.
    재밌는 1박 2일!! 이었답니다..^^
  5. 이 책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말이죠..
    서점가서도 몇번 들었다 놓았다 했는데...
    또하나의 유행을 쫓아가는게 아닌가 싶어 아직 사진 않고 있었네요..
    뒷북치는게 저의 특기이기도 하구요 ㅋ

    좋은 서평 감사합니다. 좀더 큰눈으로 볼 수 있게됬습니다 :)
    • 제가 말한 부분을 염두에 두시고 보면 휘리릭 읽을만 합니다.
      저도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
  6. 늘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할 때마다 프리젠테이션 젠의 기법을 조금이라도 가미해볼까 생각하지만, 사실 때와 장소, 대상에 따라서 달라지는 게 프리젠테이션이라 뜻대로 되질 않더라구요.

    그래도, 취미로 하고 있는 동호회 내에서 재미삼아 발표하는 자리에서는 효과만점의 방식이더라구요. 프리젠테이션은 아무튼 공부를 많이해야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 맞습니다.
      상황따라 적절히 가려 쓸 내공이 중요하겠지요.
      젠 스타일이 아니라 사무라이 스타일, 쿵푸 스타일까지도요. ^^
  7. 프리젠테이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오랜만에 보는 OHP란 단어는 반갑네요. 예전 생각납니다. 히힛.
    • 예전에 OHP 좀 쓰셨나봐요.. ^^
    • 학창시절에 필기할 때 만나고 싶지 않아도 만날 수 밖에 없었지요. 크크. 자리가 ohp 옆이면 ohp필름을 바꿔줘야 했고 그걸 사용하시는 선생님 수업이면 달려가서 기계를 가져와야 했고 조절해서 준비해 놓고. 크크크. 그런 시절도 있었네요. 뭔가, 딴 세상이야기 같네요. 시간이, 시간이 어찌나 빨리 흐르는지요. ^^ / 이래 봤자 이십 대 후반이지만요. 하하. 무슨 40대처럼 말하고 있네요. -_-;ㅋㅋ
    • 학창시절 반장이셨나봐요.
      아니면 OHP담당.. ^^;
      암튼, 뭔가 권력의 핵심부 냄새가 물씬 납니다. ^^;;
  8. 역시 주객전도가 되면 안되겠죠.
    말씀하신대로 메세지를 이렇게 뽑아낼 수 있는 정도의 실력과 완벽에 가까운 스토리텔링, 이러한 단순한 메세지가 필요한 환경이 뒷받침 되어야 하겠지요. 트랙백합니다. : )
  9. 저는 아직 이 책을 접하지 못했습니다만,
    경영서적 등등을 읽으면 새로운 아이디어, 접근방법을 소개하는 책들이 많더군요.
    이런 것을 읽으면서도 '도대체 이런게 실제로 통할까?'라는 의심이 들다가도 베스트셀러에 등록된 책일경우에는 '바로 이게 대세다, 이 방법은 만병통치약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모든 현상의 해결책으로 그 책에서 배웠던 방식을 적용하고 했습니다. 물론 성공할 때도 있었지만 현실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inuit님이 글에서 지적하신 부분이 바로 제가 경험했던 케이스였네요.
    반드시 정도(正道)가 어떤 것일까 라는 고민이 전제되어야 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동감입니다.
      정도가 무엇일까, 본질이 무엇일까, 핵심에 집중해야 합니다.
      나머지는 다 잔기술입니다.
      기본이 충실하면 응용력도 커지지요.
      덕분에 저도 다시 기본을 되새겨 보게 되어 고맙습니다. ^^
secret
What a book!
톰 선생의 '미래를 경영하라'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몇 장 넘기지도 못했지만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이 책 대단합니다. 정가 35,000원이라는 중량감있는 가격도 가격이지만, 크기도 보통 경영서적의 판형이 아니고 대학 교재 정도의 크기입니다. 좀 세게 나가지요.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부분은 파격적인 편집입니다.


컬러풀한 화보를 많이 사용했고, 책 내용과 그래픽이 혼재되어 있으며, 텍스트 이외의 하이퍼 정보가 라인이나 마크 등 비주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reading과 watching의 퓨전입니다.

아직 간도 제대로 못 본 책의 편집 이야기를 꺼내든 이유는, 바로 이 책이 제가 상상하는 뉴 미디어1) 시대의 컨텐츠가 소지할 가치 제안(value proposition)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Becoming Digital
뉴 미디어의 근간인 디지털 기술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요.
우선 일부 제품과 서비스가 디지털화 되면 무게와 마찰이 없는 비트(bit)로 변환됩니다. 그 이후는 막대한 파급력이지요. 뛰어난 압축성과 효율로 저장, 전달이 극소의 비용으로 순식간에 이뤄집니다. 거리와 시간이 소멸하는겁니다. 이 상태에서 비트화된 컨텐츠는 필연적으로 대량 소비를 전제하게 됩니다.  규모의 경제를 갖추고 가치사슬마저 압축하고 들어가는 상황에서 아톰(atom)으로 대변되는 실물 제품이 디지털 컨텐츠에 경쟁력을 갖기는 어려워진 셈이지요. 음반, 비디오 테입, DVD, 도서 등이 디지털 컨텐츠와의 경쟁에서 노른자위를 내주도록 예정된 제품의 사례일것입니다. 그 뒤를 기다리는 제품들이 신문, 지상파방송, 작년과 똑같은 학교 강의 등의 범주입니다.

그렇다면, 실물 제품은 곧 사라질까요? 당연히 아니지요. 디지털의 last mile은 항상 아톰의 중재를 받아야 사용자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온라인 쇼핑이 발전해도 택배는 필요하듯 말이지요. 디지털 컨텐츠의 소비 역시 이런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소비자 접점은 두가지로 분류 가능합니다. 멀티미디어 통합 인터페이스와 컨텐츠 전용 인터페이스입니다.

멀티미디어 통합 인터페이스는 현재의 PC에서 IPTV, PMP, UMPC에서 Wearable Computer와 멀티플렉스를 망라하는 복합형 디바이스를 의미합니다. 한 제품을 통해 영상, 음향, 텍스트의 조합으로 다양한 컨텐츠를 소비하게 됩니다. 이 세그먼트는 컨텐츠의 대량 소비와 초저가가 키워드인 시장입니다.

반면, 컨텐츠 전용 인터페이스는 기존의 제품과 유사한 형상이지만 독특한 가치를 담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텍스트는 책에, 영화는 DVD에, 음악은 CD에 담기더라도  디지털 컨텐츠의 편의성과 가격 경쟁력을 상쇄할 다른 가치를 제공하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이 세그먼트는 소비자 가치 및 몰입이 중히 여겨지는 시장입니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전용 인터페이스인 책을 왜 굳이 살까요. 저같은 경우 내용이 탁월하여 곁에 두고 싶은 경우는 이렇습니다. 가끔 참조해야 하는데 그 내용이 외울만한 성질이 아니므로 손 가까이 있어야 효율적인 경우, 그리고 펜으로 줄도 긋고 메모와 낙서도 하는 소비 과정 자체의 즐거움 때문에 돈을 주고 책을 삽니다. 단지, 내용을 전달 받기 위해서라면 1메가 바이트 정도의 정보를 PC나 PDA로 받는 것으로 족합니다. 아직 e-Book으로 볼만한 책이 없다는 것은 지금의 현상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이 소비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제품이 나오게 마련이니까요.


Provide Something They Would Chase After
제가 공식, 비공식적으로 만나는 기존 컨텐츠 산업 관계자들께 제언했던 부분은 항상 이 부분입니다.
소장 가치를 갖도록 하라.
아주 쉽고 진부한 말 같지만, 막상 이에 호응할만치 리마커블한 제품은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어렵지만 향유할만한 시장이지요.

책만 해도, 중국의 책공장에서 조선족 여공들이 직접 타자를 쳐서 저가로 순식간에 디지털화 해 내는 세상입니다. 저 같이 지향(紙香)을 자체를 즐기는
돈 안되는 취미를 가진 부류가 아닌 한, 종이책에 얼마를 지불하리라고 생각하나요? 책의 내용을 손닿는 디바이스에서 편하게 그리고 싸게 소비할 방법은 무궁무진하니 말입니다. 지금도 누가 복사기만 있으면 3000원짜리 문고본 만드는건 일도 아닌 상황이란거죠.
최소한 서두에 소개한 톰 아저씨의 새 책은 확실히 비싸지만 확실히 예쁩니다. 갖고 싶습니다. 그 책에서 텍스트만 뽑아내면 책의 정보를 많이 잃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어차피 저 책에 관심 갖는 사람은 지불용의가 높은 비즈니스 맨입니다. 기업 고객이 많을지도 모르지요. 호화 양장으로 도배하고 만원 더 청구하면 안 내겠습니까. 바로 이런 생각이지요. 소장가치를 제공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라.

음악을 볼까요. 구매도 불편하고 좋아하는 음악은 딱 한 곡인데 한장의 CD를 통째로 사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것도 그 비싼 매장 유지비, CD 운반비, 보관비가 다 포함된 가
격을 지불하고 말입니다. MP3의 승리는 태생적으로 예견된 일이고 단지 산업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과연 MP3는 음반시장을 고사시키는 주범인가?) 음악은 공짜로 뿌려 인지도를 획득하고, 돈은 콘서트를 통해 직접 체험을 제공하여 받는 부분도 한가지 모델이 되리라 봅니다. 물론 그 공연은 뮤지컬에 버금가는 크로스 오버면 더 좋겠지요. 아니면 블로거 가수인 와니님처럼 소통의 채널을 열어 놓고 손에 잡힐 듯한 가수, 함께 만들어가는 가수라는 새로운 소장가치를 제공하는 모델도 가능하겠습니다.

DVD만 해도, 그 구입의 용이성, 보관의 간편함, 소비의 편의성에서 WiMAX+PMP+TV 조합을 이길 턱이 없습니다. 하지만, 요즘 나오는 대로 감독의 커멘터리나 영화 촬영장면 기타 에피소드가 포함되는 경우 팬들은 꼭 그 제품을 갖고 싶어합니다. 30년전 제품이 아직 팔리는 스타워즈를 보면 알겠지요. 저 같은 경우 Band of Brothers라는 영화를 무척 재미나게 보았는데, 영화를 다 보았음에도 DVD 밀리터리 팩을 보고 지름신이 들락달락 고생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방송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는 광고라는 스폰서 모델을 통해 소비자의 주머니를 직접 접촉하지 않아 이러한 기술 발전의 반탄력에 노출이 적었습니다. 하지만, 광고라는 모델 역시 소비자의 관심에 엮인 관계로, 뉴 미디어로의 전이는 존립의 근간을 흔든다는 점을 말한 바 있습니다. 그 방향은 올드 미디어가 취약한 부분이 집중 부각될 것입니다. 바로 역방향 소통 능력 (uplink capability)이지요. 나와 내 이웃이 만드는 동영상이나 블로깅, 통칭하여 UGC와 같은 참여와 맞춤 서비스입니다. 늘 하늘에서 내려오던 방송과 신문에 내가, 또는 내가 동질감을 느끼는 그가 들어가 있는겁니다. 완전히 소유한 느낌이지요.

급기야 올드 미디어 산업은 대 퇴각을 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산업의 맹주였던 헐리웃 영화사가 올해들어 시험적으로 온라인 다운로드 서비스를 조심스레 적용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똑같은 컨텐츠를 가지고 재래 기술과 등가의 소비구조를 강제하기에는 시장 효율성과의 갭이 너무 커져 버린겁니다.


Digital is the Shadow of the Analog
결국 아날로그 제품의 존재 가치는 소장 가치에 비례합니다. 그리고 그 소장가치는 디자인이 되었든 체험이 되었든 감성과 binding하는 부분이 필요합니다. 경제학적 가치는 개인화 (personalization)에서 나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앞서 말한 디지털 시대의 총아, 정보 기술의 도움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아날로그 제품은 이 부분을 잘 성찰하면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예를 들어, 드러커 선생의 책을 사는데 마케터와 전략가, 학생이나 CEO 등 사는 사람의 프로파일에 맞춰 챕터의 구성이나 사례를 달리 한다면 어떨까요.
위찬 교수님의 블루오션이 대박이 났었는데, 이 책을 사는 사람이 미리 보낸 개인적 소회를 구매자 서평으로 페이지를 구성해, 저자 서문, 역자 평과 함께 엮어 책으로 만들면 그 책의 가치는 얼마가 올라갈까요.
DVD를 주문하면, 음성과 영상합성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영화의 주인공이 구매자에게 'This is for you, Jack.' 하며 생생하게 인사를 하는 동영상 클립이 첫 머리에 들어간다면 어떨까요.
아이디어는 무궁하겠지요.

롱테일의 군침도는 도톰한 그래프만 쳐다볼 일이 아닙니다. 아톰과 비트는 상보관계입니다. 물과 기름처럼 반목하지만은 않습니다. 그 둘이 그림자처럼 어울릴 때 세상은 더욱 편해집니다. 어떤 이는 돈도 벌게 되지요. 그러려면, 어떤 가치를 미디어 소비자가 원할지, 무엇을 소장하게 도울지를 먼저 고민해야 합니다. 기술은 항상 필요한만큼 충분히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디지털은 아날로그의 그림자입니다. 해를 가리는 그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Appendix
1. 미디어 산업은 두가지의 하위분류를 갖습니다. 저널리즘과 엔터테인먼트.
저번 글의 뉴 미디어는 저널리즘 우위의 개념이었습니다. 오늘은 엔터테인먼트 위주입니다.
2. 글이 길어 부담스럽다는 단골 블로거들의 피드백과 정확히 반대로, 글만 썼다 하면 장타입니다. 주중에 바빠 글을 못쓰다보니 주말에 한을 푸나 봅니다. ㅠ.ㅜ

3. 전에 인도 시리즈도 그랬고, 이번 두바이 글타래도 그렇고 한 시리즈가 길면 제 스스로가 지겹고 따분해져서 그러니 이해해 주세요. 두바이는 아직도 최소 두 편은 더 남았거든요. -_-ㆀ
신고

WRITTEN BY
Inuit
@inuit_k / CxO / Author ("가장 듣고 싶은 한마디 YES!") / Making better world, every minute.

트랙백이 하나이고 , 댓글  13개가 달렸습니다.
  1.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유학 와서 느낀 점 중에 하나가 우리가 디테일에 좀 약하다는 사실입니다.
    숲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무 하나하나의 상태를 정확하게 아는 것도 중요할 듯.
    결국 성공한 상품이나 서비스는 어찌보면 기본적이다 못해 참 사소한 것들이더라구요.
    • 맞는 말씀입니다. 기본을 잊기가 가장 쉬운듯 해요.
      저부터도 디테일에 약하지 않으려 늘 다짐하곤 합니다.
  2.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항상 잘 읽고 있어요~
  3. 블로그용 article 치고는 좀 길다 싶지만 워낙 딱딱 떨어지는 내용이라 읽는 재미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리고 10년전 제가 SI하던 시절에는 맨날 사용하면서도 가슴에 딱 와닿지 않던 Value Proposition이란 용어가 참 쉽게 풀어져 있군요.
    주말 오후에 정말 잘 읽었습니다.
    • 너무 길다. 너무 길다... ㅠ.ㅜ

      맞습니다. 사실 블로그의 포스팅치고는 너무 길지요. 두회정도 분량으로 나누는 방법도 생각했지만, 제가 한 주제를 두개 글로 나누는걸 매우 싫어해서 그냥 뒀습니다. 그나마 다슬아빠님은 재미나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
  4. 훌륭한글 잘 읽었습니다. 이런 글은 웬지 소장하고픈 욕심이 생기는군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소장가치가 있는 글이라니 기쁩니다..만 kikiki님, 제게 돈을 지불하셨던가요? ^^;;

      즐거운 주말 지내세요. 맛난 것도 많이 드시고.
  5. 저는 아직 아날로그가 남아있어 그런지
    글만큼은 손에 잡히는게 훨씬 좋아요
    물론 모르는게 많아 찾아봐야하는게 많은 글들은 인터넷으로 보는게 편하지만말이죠
    저는 아마 저만의 서재를 만들고 싶단 꿈은 계속될듯
    앞으로 로망중 하나에 서점 운영도=)
    • 그래요. 저도 글은 책을 선호합니다. 그리고 좀더 향상된 가치라면 기꺼이 살 생각도 있습니다. astraea님 서점 운영하면 거기서 책을 사도록 하지요. 멤버십 카드 발급해 주세요. ^^
    • 여러 형태로 구상중이에요
      시대 변화에 맞는쪽으로다가
      물론 실천에 옮기려면 한참 남았지만

      오픈하면 꼭 모시겠습니다=)
    • 저도 할인 좀 -_-;
      중국 온 사이에 yes24가 일반회원으로 강등되었더군요 ㅠ_ㅜ
    • astraea// 기대하겠습니다. ^^

      이승환// 얼마나 할인을 받을지 궁금해 하기전에, 얼마나 매출을 올려줄 수 있을지 생각해보세요. ^^;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