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문화

Culture/Review 2013.09.29 10:00
테러집단에 미개하고 공격적인 문명.

이희수

우리나라를 포함한 서구에서, 이슬람처럼 그 많은 환상과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는 개념체계가 있을까.


나 역시 그런 시각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부지런히 읽고 공부하고 있다.

첫번째 오해
기독교와 이슬람은 매우 상극인 종교인가.
아는 사람도 많지만, 모르는 사람도 꽤 많은 부분이다.
이슬람과 기독교는 한 뿌리다.
수녀님의 복장과 무슬림 여성의 복장이 유사한만큼이나, 이슬람과 기독교는 차이보다 공통점이 더 많은 종교다.
이름만 보아도, 이브라힘(아브라함), 무사(모세), 이사(예수), 이스마엘(이스마엘), 야꾸브(야곱), 누르(노아), 아뎀(아담), 마리얌(마리아), 슐레이만(솔로몬), 다우드(다비드) 등 수많은 무슬림 이름이 유대의 이름들을 그대로 이어 쓴다.

다만 이슬람은 무함마드를 아담-이브라함-모세-예수에 이은 마지막 예언자로 보는 부분에서 두 종교는 갈라진다.
또한, 이슬람의 시각에서 보면, 하느님의 계시가 오역, 변질되는 부분이 많아 무함마드 이후로 강한 원칙을 고수하여 순수한 고대종교의 정신을 더 잘 갖고 있다고 믿고 있다. 어쩌면 이런 결벽적 원리주의가 이슬람의 정체성과 브랜드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두번째 오해.
'한손엔 칼을, 한손엔 꾸란을'에서 보듯 매우 공격적인 종교 아닌가.
이 말은 근대에서 이슬람에게 덧씌운 망령같이 추잡한 이미지이다. 
꾸란에는 '종교는 어떤 강요도 있어서 안된다'고 규정되어 있다.
되려, 무슬림에게 면세 혜택이 있기 때문에, 정복자 무슬림들은 현지 인원이 개종하는 것을 오히려 싫어했다.
다만, 경제적 동기로 자발적 개종을 막기 힘들어 demarketing을 했음에도 정복지의 개종자가 많이 늘었다는게 책의 견해다.
(개종에 대한 중립적이되 유럽식의 분석은 '고대세계의 만남' 리뷰를 참조)

셋째 오해.
무슬림은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미개한 인간들이다.
이 부분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즉, 이슬람 종교의 특징이 아니라, 사막 부족의 특성이다.
이 부분은 '공간의 힘'에서도 힘주어 이야기하는 부분 중 하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유대교와 기독교도 사막 부족의 토대 위에 생긴 종교다.
그래서, 유일신에 타종교 배타적이고 가부장적 카리스마가 근간이다.
반면, 각박하지 않고 먹을 것이 풍부한 열대나 온대, 열대 종교는 다신교가 근간이다.
어쨌든, 무슬림 국가인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터키에서는 여성이 수상까지 갔고 이 나라들은 사막적 정서가 없는 지역들이다.

이슬람의 문화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은, 생소한 부분도 많지만 매우 흥미롭다.

중매 및 형사취수
이 부분은 우리나라와도 유사하다. 무슬림은 결혼을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 아닌, 가족과 가족의 결합으로 본다. 따라서, 재산권 및 혈연공동체간의 연대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바로 수계혼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서 형사취수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라마단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가 동일 조건을 공유하게 해서 사회적 연대를 강화한다. 라마단 이후 엄청난 사회기부가 이뤄지는데, 세금을 통하지 않고 부가 재분배가 되는 유효한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부수적 효과도 있다. 장기 단식을 통한 체중감소 및 잔병 치유의 효과로 인적 자본의 정비효과도 얻는게 라마단이다.

얇지만 임팩트가 있는 책이다. 핵심은 이거다.
유대족과 아랍족은 언어마저 같은 셈계 언어를 쓰는 셈족의 분파다.
다만, 근대 유대족이 땅을 비집고 들어가는 과정, 그리고 중세 이후 기독교인과의 부의 쟁탈전을 통해, 증오의 감정으로 유럽에서 씌운 단단한 오명이 무슬림을 감싸고 있을 뿐이다. 문명의 충돌 따윈 없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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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슬람문화, 이슬람 사람들에 대해 친구들끼리 이야기하거나 보도되는 것들을 보면 '과연 같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 맞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었는데, 말씀하신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군요. 물론 종파나 개인차도 있긴 하겠지만요.
  2. 서구국가는 가족문화(명절이나 중요한날에나 봄.)를 그리중시하지않고 우리나라와 일본은 1인가구비율이 높아져서 가족과 같이살아도 대화가 안되는 무언가족으로 살고있으니...!
secret

Saul Frampton

(Title) When I am playing with my cat, how do I know that she is not playing with me?


정말 매력적인 책이다.

에세, 또는 수상록으로 유명한 몽테뉴지만, 딱 그 지점까지다. 
중고등시절, 필독 목록에 있었고, 한두장 들췄는지 좀 읽었는지 기억도 안나므로 내겐 안 읽은 책이니까.
뭔 바람이 불었는지, 몽테뉴를 재포장한 이 책을 집어 들었는데, 어느 순간 이후에는 그만 홀딱 매료되어 읽었다.

그 매력의 근원은 진솔함이다.
솔직함이 힘이고, 개인적 스토리가 주는 위대한 교감이다.
키가 작다는 컴플렉스, 여성에 대한 개인적 선호도는 물론, 먹고 마시고 냄새 맡는 모든 일, 심지어 배변과 지병인 요로 결석에 대해서도 가식없이 걱정과 생각을 적어 간다.
그 개인적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냥 역사책 속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명사라는 생각을 건너, 먼 친척 아저씨의 소싯적 이야기를 듣듯 친근감과 애정을 느끼게 된다. 정말 개인화 스토리텔링의 진정한 힘을 보여준 몽테뉴다.

물론, 개인적 잡문이 솔직하면 곧바로 위대한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솔함이 몽테뉴의 레시피라면, 특별 재료는 몽테뉴의 사유다.
몽테뉴 사유체계의 핵심은 자유분방함이다.
그리고, 그 자유분방한 사고의 줄기는 인본주의다.

어려서 우리아들 독서교육의 모태가 된 유럽식 귀족교육을 받았던 몽테뉴는 성장기와 중년 이전까지 마음의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그리스의 스토아 주의와 종교 내에서의 안정감이 강하게 깃들어 있었고 여기까지는 동시대 귀족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종교전쟁과 전염병으로 인한 마을사람들의 몰살, 그리고 낙마로 인한 사경을 경험한 이후 몽테뉴는 각성하게 된다.
즉, 금욕적 스토아주의 또는 데카르트적 이성본위의 이상론의 틀을 깨고, 인간 본연과 관계 중심의 새로운 사고를 하게 된다. 이는 동시대 르네상스적 분위기와도 상통했고, 결과적으로 몽테뉴가 프랑스의 초기 르네상스를 연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게 된다.

책의 제목 또한 여기서 유래한다. 
결과적으로 문화적 상대주의를 표방한 몽테뉴는 당시 야만으로 표현되던 남미나 제3세계 원주민도 동등한 관점으로 다뤘다.
이를 넘어 동물까지 사고를 확장한 결과가 제목의 사유다.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놀아주지 말란 법은 없잖은가.
지금봐서는 그냥 재미난 말장난이나, 또는 있을 수 있는 시각이지만, 당시 인간과 동물의 자리매김 상 이런 발상은 감히 꺼내어 말하기 어려운 관점의 전환이었다.

여기서 더 나가면, 당시 왕정과 종교 사회가 억압하고 규정해 놓은 다양한 사고적 틀에서 벗어난 논의가 가능하다.
성(性)과 인간관계, 종교에 대한 태도, 다문화에 대한 개방성, 죽음에 대한 수용성까지.
일례로 몽테뉴는 종교를 절대적 신성으로 보지 않고 사회적 관계망의 연장선상으로 보기도 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죽음을 내포한 반역의 사유였다.
중요한 점은, 지금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고 당연히 여기는 많은 가치와 사상이 당시에는 발칙하거나 위험한 논의였다는 사실이고, 몽선생은 에세란 형식을 빌어 이를 공론화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쓰다보니 복잡한 이야기가 많을듯 하지만, 책은 클래식 음악을 듣듯 우아하고 부드럽게 흘러간다.
이 부분은 저자 프램튼 씨의 공이다.
원문을 적절히 응용하되, 필요한 부분을 뒤섞어 몽테뉴의 삶을 독자가 함께 여행하도록 도와주는 가이드 역할을 충분히 한다.
없는듯 개입하지 않되 잘 설계된 길을 따라 흥미진진한 투어를 하고, 여객의 배경지식이 모자랄만한 부분에 슬쩍 나타나 설명을 해주고 뒤로 빠지는 프로 가이드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즐거웠던 부분은 디테일일 살아 있다는 부분이다.
그냥 추상적 주장이나, 요약에서 절대 느낄 수 없는 풍성한 디테일은 에세나 수기, 일기류가 갖는 독특한 매력이다.
뭘 먹었는지, 무슨 냄새가 났는지, 어떤 대화를 나눴고 누구를 만나 어디를 갔는지 시시콜콜 적었던 몽테뉴는 트위터적 부지런함을 지녔다.
그리고 그 디테일을 읽으며 지금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할 중세 유럽의 정서를 절절히 느낄 수 있다는 점이 감동이었다.

지금은 쉬운 해외여행이지만,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까지 2년을 잡고 다닌 여행이다. 규모의 방대함과 비용, 시간 그리고 목숨의 위험 정도에서 지금과 견주기가 어렵다. 예컨대 중세 저자가 여행은 정말 도움이 되는 일이라해서 요즘 독자가 그 텍스트를 수긍한다고 치자. 그것을 지리적 이동이란 관점에서 지금의 컨텍스트와 같이 해석한다면 얼마나 많은 의미를 유실할까.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여행 중 와인에 물을 섞지 않고 마시는 법을 배운 몽테뉴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대체 로마식 물탄 와인이 16세기 프랑스 귀족 문화까지 이어져 왔었단 말인가.

아참, 흔히 몽테뉴라고 부르는 이 인물의 이름은 미셸 뒤켐 드 몽테뉴다. 
즉 몽테뉴 성의 뒤켐 가 자손 미셸 씨다.
마치 상산에서 온 조자룡에게 상산을 호처럼 쓰는 것도 모자라 상산이라 부르는 것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몽테뉴 성이 그 가문을 뜻하고, 또 그 가문에서 유일하게 세계적 명성을 얻은 미셸이니 뭐 꼭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어쨌든 부르주 몽테뉴에 살던 미셸 씨의 솔직담백하며 발랄한 사고는 그 후 프랑스와 유럽에도 큰 영향을 줬지만, 인간 몽테뉴 미셸의 향기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키보드로 블로그 적는 Inuit씨에게도 감명을 준다는 점이 재미있다.

또 하나 생각해 본다. 지금 내가, 또 우리가 시시콜콜 남긴 기록들이, 먼 훗날 시공간을 지나 지적 충격과 감성적 공명을 일으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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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다음에 도서관에 가면 빌려다 읽어봐야겠어요. ^^
secret

인간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가 있을까?
그런데, 왜 어려울까?
가장 큰 이유는 본성과 자유의지의 임의적 조합 때문일 것이다.

Mark Buchanan

(Title) Social atom


종교, 철학 그리고 사회과학의 역사는, 어찌보면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무수한 시도의 기록이다.
20세기까지는 경제학에서 정의하는 합리적 존재(rational being)이 인간상을 규정해 왔다.
모든 사람은 개인의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가정이다.
예컨대, 합리적 인간상에서는 자선 역시 자기충족적 보상이 전제된 이기적 행동으로 본다.
또한, 범주를 확대하면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 자기희생 역시, 종의 보존을 위한 유전자의 이기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근년 들어 그 가정은 폐기 또는 전폭적 수정을 거치게 된다.
이미 1970년대에 사이먼이 주창한 제한적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에서 온전한 틀은 제시하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합리적 인간상이 맞지 않음을 고백한 분기점이다.

그리고 요즘 주류화된 구뇌 이론.
내가 쓴 책도 그렇지만, 비합리적이며 감정적 의사결정을 하는 즉자적 인간상이 더해져야 보다 포괄적 이해가 가능하다는 점이 현재 합의를 이루는 인간 인식의 틀이다.

아직도 인간 자체조차 이해의 폭을 넓고 깊게하려 노력하는데, 인간의 집합인 사회를 어찌 예측할까. 바로 이 점에서 이 책은 매우 명확하고 간결한 프레임웍을 제시한다.

바로 사회물리학이다.

즉 원자 자체의 특성을 엄밀하고 완전하게 기술할 필요 없이, 간단한 자체 특성과 상호작용의 규칙만 규정하면 집합적 특성을 나타낼 수 있듯, 사회 동역학 역시 그런 접근법으로 해석하능 하다는 가설이다. 물리학에서 아직도 약력, 강력에 K입자니 현재도 많은 연구가 진행중임에도 이미 20세기 초반에 원자폭탄이니 초전도체에 그래핀이니 수많은 물리적 업적을 낼 수 있었던 바탕은 원자 자체를 규명하지 않아도 체계의 특징을 예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 자체에 대해서 궁극의 이해를 하지 않더라도 간단한 메커니즘만 알면 사회적 거동을 해석할 수 있다.

책에서 들고 있는 몇가지 사례는 매우 적절하며 의미있다.
인종차별이 인종간 분리 거주를 만드는가? 컴퓨터로 시뮬레이션 하면 몇가지 합리적 규칙으로만도 인종간 거주분리가 이뤄진다. 내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많은 것을 선호하는지에 대한 정책 또는 선호도만 있다면 인종차별적 규칙은 필요 없다.
뿐만 아니라, 평범한 시위가 왜 폭동으로 번지는지, 시장은 왜 블랙스완에 가까운 요동을 치는지도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
즉 심리학이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고민할 때, 물리학은 입자의 집합적 거동을 망원경으로 관찰가능한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 책은 요즘 유행하는 키워드를 모두 잘 담았다. 사회학과 과학의 통섭, 경제와 인문의 컨버전스, 빅데이터의 통계적 처리를 통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실험. 

하지만 책의 한계는 아직 이 부분에 머문다. 즉 규칙에 대한 체계적 방법론이 없기에 사후적 설명에 머문다. 즉, 모델의 작동을 증명하는데 치중할 뿐 의미를 미리 뽑아내긴 힘든 상태다. 많이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모델이 완성된 후 파라미터 조절로 사후적 설명은 어떻게든 하지만, 앞으로 나올 부분에는 허당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론이다.
이 책은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마디로 요약가능한 통찰이다.
"인간 사회는 물리학적 프레임으로 해석가능하다."

반면 책의 수준은 두가지 점에서 매우 떨어진다.
첫째, 책의 논의가 2007년 수준에 머문다. 그 이후로도 구뇌에 대한 심층적 연구결과가 많은데 지금 시점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에 혼자 경탄하는 뒷북 모양새다.

이거야 시차라 치더라도 둘째 혐의는 가볍지 않다. 번역이 엉망이다. 저자는 경제학이나 시장경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 하에 글을 쓴게 확실하다. 하지만, 번역자는 공학이나 과학 이외에는 문외한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인 번역 술어조차 나름대로 번역했음은 물론이고, 단어만 뒤틀린게 아니라 뜻마저 뒤틀어 번역을 하고 있다. 즉 번역자 스스로도 이해를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공학적 설명이 정확하냐면 그도 글쎄다. feedback을 되먹임으로 쓰더라도 자연스럽고 멋진 우리 말로 쓰는 사람이 있고 직역느낌이 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책이 그렇다. 결과적으로 읽는 내내 매우 피곤하다. 누더기 번역을 기워내어 원문을 상상하며 읽어야 하니까.

결론적으로 나는 이 책에 별점을 세개 주었다. 
책 자체가 별 넷, 번역이 마이너스 한개.
이 주제에 심대한 관심이 있지 않는한, 추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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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통계역학 자체가 물리학 분야 중 가장 정형화된(?) 방법론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지라-한 교수님께선 가장 인문학에 가깝다고 표현하셨죠-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체계가 없는지도 모르겠네요.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
    • 재미나군요.
      가장 인문학에 가깝다..
      결국 인문학과 물리학이 서로 힌트를 얻어 더 진전하면 제일 좋겠지요. ^^
secret
진화론을 믿으시나요? 아니면 종교를 믿으시나요. 둘 다 믿으시나요.

재미나게도,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의 83%는 진화론을 믿습니다. 불교신자는 68%가 믿습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40%만이 진화론을 믿습니다. 진화론이 과학이라면, 학력에 따른 편차는 있을지언정, 종교에 따라 수용하는 비율이 달라진다는건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있을까요?

EBS 다큐프라임 제작팀

사실, 어렵고 복잡하고 믿기 힘들기로 따지면, 20세기 과학의 최대 성과이자 난해한 수식인 상대성 이론을 못 믿는 사람이 많아야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훨씬 직관적이고 이해도 쉬운 진화론은 못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히려 그 탄생 직후부터 거센 논란에 휩싸이며 찬반양론이 격돌해 왔습니다.

모든 증거를 완벽하게 모으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신빙성 있는 증거과 검증가능한 가설을 통해 입지를 굳혀온 진화론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강한 보수적 개신교측에서는 진화론 말살에 집요하고 조직적인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진화론의 생각이 과학이 아니라 신을 믿고 싶지 않아하는 무신론자 과학교도의 신앙이라는 관점마저 견지합니다. 심지어, 진화론이라는 이론의 자격을 부여하기도 싫어, 추종자가 많은 다윈의 개인적 견해라는 뉘앙스가 강한 다윈주의(Darwinism)이란 말을 쓰지요. 상대성이론을 아인슈타인주의라(Einsteinism)고는 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이유는 단순하지만, 태도는 필사적입니다. 진화론을 거슬러가면 생명의 탄생에 대한 신학적 설명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지요. 신이 인간을, 동물을, 사물을 각자 쓰임새대로 생김새대로 지어 만들었다는 설명이 무력화되면, 종교 비즈니스에 큰 위험을 느끼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니 그렇습니다. 

재미나게도, 이슬람교도는 진화론에 더욱 거부감을 느낍니다. 터키의 진화론 수용률은 40% 수준입니다. 반면, 천주교는 교황이 진화론의 과학적 의미를 인정하는 등, 유신적 진화론을 수용합니다. 즉 진화는 인정하되, 천주의 큰 뜻 하에 이뤄졌다는 이중구조로 조화를 이룹니다. 불교는 워낙에 윤회와 순환론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진화에 대한 거부감이 가장 작습니다.

결국, 진화론과 창조론은 과학과 종교가 벌이는 대결입니다. 그 뒤에는 거대한 권력구조의 헤게모니 싸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책의 비유처럼 상어와 코끼리의 싸움처럼 애당초 교집합이 없는 전투입니다. 물에서 싸우면 상어가 이기고, 뭍에서 싸우면 코끼리가 이기는거지요. 하지만, 굳이 신의 섭리를 따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보이지도 않는 종의 기원과 인류의 발달과정을 집요하게 파헤쳐 종족의 비밀을 찾아낸 인류의 이 모습 자체에서 아름다움을 찾는게 낫지 않을까요. 정말 종교를 과학의 잣대로 제대로 파고들면, 입지를 옹색하게 만드는게 진화론만이 아니란 점을 염두에 두어야겠지요.

전 종교에 있어 개방적입니다. 그 용도가 있음을 믿기에, 신앙과 종교의 존재를 긍정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독존을 위해 과학을 말살하는 행위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진화론은 종교의 부정도 아니고, 종교에 대한 공격도 아닙니다. 종교는 종교대로 설명하는 세상이 있고, 과학은 과학대로 설명하는 세상이 있으며 그 둘은 결코 공존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설명하는 세계의 범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 두 세계 간의 화해와 정합이 필요하면 반복가능하고 검증가능한 과학을 믿으면 될 터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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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 둘 다 믿어요~ 종교도 있고 진화론도 있을테구요. 자연현상이나 문명은 인간이 어떻게 정의내릴 수 없는거니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수긍하고 보는거죠 뭐^^
  2. '종교 비즈니스' 라는 단어가 와닿습니다.

    그 자체의 종교가 아니라 종교 비즈니스라면 자신의 비즈니스활동에 차질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무엇이든 당연히 반대하고 부정하고 자신의 고객이 물들지 않게 노력하는게 맞겠지요.
    • 네. 그래서 천주교는 좀 더 너그러운게 아닌가 싶습니다. 교리 자체도 그렇지만, 소매영업 위주에 market share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전투적인 성향이 증폭되는게 아닐까 생각해본 적도 있습니다.
  3. 종교와 과학이 왜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생각하는지부터가 의문입니다.
    과학은 우리 주위에 있는 것이 어떻게 발생하였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종교는 그것들이 왜 발생하였나에 초점을 맞추지요.

    인간이 멀리 있는 달에 갈 수 있게끔 해준것이 과학이라면, 인간이 가까이 있는 동료에게 가까이 갈 수 있게하는 것은 종교입니다.

    과학은 일종의 수단일뿐입니다. 과학이 종교를 대체할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 종교도 인간이 만들어낸 이상, 과학이 종교를 대체하지 못한다는 단정은 무모한 확신이죠. 사실과 인과관계에 근간을 두고 그걸 증명하려는 과학과 실체조차 불확실한 "대상"을 믿고 따르게 만들어낸 종교가 비교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차라리, 마음의 평온을 얻고 사람들과의 교류를 위해 교회/성당/절에 다닌다고 말하는 사람이 솔직하고 더 믿음이 갑니다.
    • 저도 third stage님과 의견이 비슷합니다.
      종교와 과학이 양립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는게 아닙니다.
      다만, 반대로 과학이 종교와 배타적인 개념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4. 물론 제가 말하는 종교는 비지니스식 종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세계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종교는 비지니스식 종교로 바뀌었습니다. 종교인이라도 인정할 건 해야지요.
  5. 과학이 종교를 대치할 수 없다고 말한것은... 그 용도가 틀리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발견해온 것은 제한적인 것이지요.
    그 제한적인 것을 전체에 대한 잣대로 들이댄다면 곤란합니다.
    • 과학의 제한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 풀려가는건 잘 아실겁니다. 이 점은 논의에 핵심적 내용은 아니구요.
      앞에서도 밝혔듯, 과학과 종교의 용도가 다른점은 제 주장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
  6. 요즘 눈먼 시계공을 읽고 있는데요.(한 3주째..-_-) 자연선택설에 대해 썰을 푸는데 아주 솔깃합니다. 그전부터 진화설을 믿었는데 확률이 너무 낮긴해요. 그렇지만 우주는 엄청나게 넓고 행성도 무수히 많으니..그중에 지구같은 환경을 가진 별도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중에 운좋은 행성이 지구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신이 있다고 믿습니다. 젭알..-_ㅜ
    • 확률은 매우 낮은게 맞습니다만, 무한시행이라는 모수가 곱해지는 점이 중요합니다. ^^
  7. 토니가 흥미있는 테마를 올려 놓았네요.
    책 하나 소개합니다. 프랜시스 S. 콜린스의 "신의 언어"......
    의학유전학자가 인간 DNA 설계도를 작성하는 중에 발견한 "신의 존재"를 흥미있게 기술하였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도발적인 진화생물학자나
    신정국가를 표방하는 미국의 골수 개신교도들과는 달리, 토니가 얘기한대로,
    교황과 같은 "유신론적 진화론자(자신의 표현대로는 BioLogos)"의 기가막힌 논리가 전편에 흐르네요..참고로, 소생은 아시는 분은 아시는바와 같이, 신의 존재를 믿을 수 밖에 없는 천주쟁이올시다. super choi
    ps: 사실상 오늘 facebook 처음 들어왔습니다. 본사에서 선물로 얻은 갤럭시 탭을 새벽녘 마누라 핀잔을 들어가며 만지작 거리다가 우연히 토니의 블로그에 들어왔네요..그런데 분명히 갤럭시로 먼저 올렸는데 다시 와 보니 자취가 없네요? 갤럭시 문제인가요, 아님 소생의 무지인가요? super choi again.
    • 아.. 형님.. 닉이 길어졌네요, 봄롬에서.. ^^

      책 소개 고맙습니다 형님. 전 자신의 믿음을 유지하면서도 사실을 받아들이고, 또 자기 세계관에 맞게 포용하는 사람들이 좋습니다. 불교나 천주교는 그런 넉넉함은 있는듯 합니다. 개신교도 일부 influential한 몇명이 고립주의를 표방하는데 많은 신자가 양떼처럼 좇아가는 경향이 좀 아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

      갤럭시 문제는 아닌듯하고, 저도 아이폰에서 모바일 페이스북이 종종 글 날려먹는걸 경험한적 있습니다. 갤럭시로 페북에 글 쓸 때는 조심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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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에만 내내 머물러도 충분히 좋지만,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습니다. 

인근의 몬세라트는 바르셀로나, 그리고 카탈루냐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보조교재입니다. 예술가의 미학적 영감, 그리고 카탈루냐 민족정신의 허브라는 두가지 키워드가 몬세라트를 감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파냐 역 앞 광장

몬세라트는 서울의 국철 1호선과 유사한, R5로 닿을 수 있습니다. 출발은 스페인 광장 옆 Espanya 역입니다. 자판기에서 표를 사야하는데, 알고 보면 쉽지만 처음 가면 헛갈립니다. 내리는 역이 수도원 역(Monistrol de Montserrat), 아에리 역(Montserrat Aeri) 등에 따라 교통이 푸니쿨라르(funicular 등산열차), 케이블 카로 나뉘고 다시 어른요금, 아이요금 등등이 있어 메뉴가 복잡합니다. 

다행히 영어가 가능한 안내원이 몬세라트 전용 부스에서 상담을 해주고, 주요 골자를 쪽지에 적어주면 현지 도우미가 자판기에서 발권을 해주는 재미난 시스템을 운영합니다.
그만큼 몬세라트 관광객이 많다는 뜻이겠지요. 가격에서도 나타나는게 관광책자에 적힌 가격보다 실제는 두 배 정도 비쌌습니다. 그 새 가격이 오른거지요. 사실 다녀오고 나면 비용이 아깝다는 생각이 안듭니다. 그 이상 재미나거든요.
몬세라트행 기차는 자주 있지 않습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도 다음 차까지 45분이 남았습니다. 오히려 다행입니다. 구엘 공원에서 생각 이상으로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점심도 못먹고 갈 뻔 했는데 여유시간 동안 간단히 점심을 때웁니다. 식단이 간단해도 기분 좋은 이유는 방금 만든 주스와 스페인식 샌드위치가 하도 맛나서입니다. 보기엔 평범해도 질좋은 빵에 신선한 재료를 턱턱 올린 샌드위치도 좋지만, 오렌지 두개를 통째 갈아 만든 주스는 기분좋게 달며, 상큼한 싱싱함이 혀돌기돌기를 단단히 자극합니다.
국철인지라 Monistrol 역까지 한시간 가는 동안 기차는 자주도 섭니다. 톨레도 가던 특급열차와는 다른, 타고 내리는 스페인 사람들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라틴계 특유의 쾌활함과 수다가 전혀 거슬리지 않습니다. 미국 쯤 이었다면 사람들 다 돌아볼만한 소란과 수다도, 모두 그러려니 할 뿐더러 서로 이야기에 빠져있을 따름입니다. 이처럼 관계와 사회화에 몰두한 나라도 보기 힘듭니다. 소란스러움과 정서적 유대가 특징인 남미의 뿌리답습니다.
수도원 역에서 내리면 바로 등산열차 푸니쿨라르를 갈아 탑니다. 제대로 표 끊었으면 번들 패키지로 구매가 되어 있습니다. 
등산열차는 톱니를 굴리며 산을 씩씩하게도 잘 올라갑니다. 고도는 낮지만 유럽의 지붕, 융프라우에 오르는 느낌과 흡사합니다.
드디어 도착한 산꼭대기의 수도원. 우선 병풍처럼 둘러선 기암들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제주의 주상
절리와 마찬가지로 각각 솟아오른 돌기둥이 모여 있는 형국입니다. 그 모습이 마치 기암의 괴인 같기도 하고, 수도원을 지키는 천군 같기도 합니다. 이 몬세라트를 보지 않고서는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제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가우디가 평생 마음에 지니고, 또 동경했던 그 곡선입니다.
산 아래는 까마득한 절벽이고, 수도원은 어찌 여기 이런 건물을 지었을까 싶게 산꼭대기 바위 속에 웅장한 자태를 숨기고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그냥 평범해 보이는 수도원이지만, 가까이 갈수록 그 웅장함과 화려함, 그리고 은은히 감도는 정기에 들어서는 객의 마음이 서서히 격동합니다.
그리고 성당. 멀리서 은은한 멜로디에 끌리듯 들어가보니 거대한 성당에 파이프 오르간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높은 산 속 구름 위 선율은 천상의 음악 그대로입니다. 사실, 여기 소년 성가대(에스콜라니아)의 성가는 더욱 눈물나게 아름답다고 하는데, 미사 시간이 아니니 그까지 듣는 행운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특정한 종교는 없지만, 성당가면 성당에, 절가면 절에 고요한 마음을 빕니다. 종교의 교리에 에둘리지 않는다면, 착한 마음으로 살자는 종교의 기본 원리는 다 똑같습니다.
그리고 검은 성모상. 바로 몬세라트를 몬세라트로 만든 아이콘입니다. 도시의 수호성인이자 카탈루냐 저항정신의 가디언입니다. 바라만 봐도 마음이 편해지면서, 괜히 눈물이 날듯한 검은 성모상은, 카탈루냐 지식인들에게 무한한 영감과 용기를 주었겠지요. 실제로 가우디를 비롯한 모데르니스모 운동은 각자가 자신의 재능으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데 몰입했고, 그로 인해 카탈루냐는 자신의 정체성을 또렷이 가져가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모든 흔적이 집약된 도시가 바로 바르셀로나입니다. 또 그래서 몬세라트가 바르셀로나를 이해하는 보조교재가 되는 것입니다.

한 도시는 역사의 압축이고, 지식인은 문화의 자식입니다. 자연과 역사, 역사와 문화, 문화와 문명, 그리고 문명과 실상이 가로세로로 짜여 있는 시공간을 아이와 함께 누볐습니다. 아이들도 교과서에서는 결코 배우지 못할, 새로운 공부를 많이 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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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말 부럽습니당. 스페인 꼭 갈꺼에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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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자를 벌하지 않듯, 악한자를 불쌍히 여겨라.

Christian terminology
얼마전 본문비평학의 렌즈로 본 기독교 용어라는 글에서, 다소 풍자적인 제 나름대로의 해석을 정리해 본 바 있습니다.

Leveraging

이 글에 @paperrosess님이 흥미로운 댓글을 트윗해주셨습니다. 선지자의 역할에 주목한 것이지요.

이에 떠오르는 생각이 많았지만, 바쁜 날들인지라 간단히 정리하고 후일을 기약했더랬습니다. 


No-tit-for-tat
과연 종교의 기능은 무엇일까요. 돼지를 먹지 말라거나, 피를 뺀 양을 먹는다거나, 소를 건드리지 말라는 등 지역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율법을 제외하면, 오래가는 종교의 가르침은 대동소이하고 글로벌 감각을 보유합니다. 이슬람이야 유대교의 분파이니 같다 쳐도, 공자나 묵자, 불교 등에서 사랑과 용서를 역설합니다.

이는 진화론적으로 설명가능합니다. 눈에는 눈(tit-for-tat)이라는 전술은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지만 사회의 갈등 수준을 높여 종의 절멸을 초래하기 십상입니다. 이를 극복하는 전략은 딱 하나입니다. 

1. 네가 먼저 참으라는 메시지를
2. 대부분의 구성원에게
3. 동시에 주입하고 숙지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게 진화론적 의미의 종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종교는 정치경제학적으로 사제계급이 무지한 대중을 착취하는 이데올로기라는 관점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대칭이 존속가능 했던 이유는 종교의 존재의미에서 찾아야 합니다. 사회의 안정과, 갈등의 억제, 더 나아가 종의 보존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Biggest & oldest story
잘 보면, 모든 융성한 고대 문명은 어떤 식으로든 3단계 구조를 소화해 냅니다.
1. 인내에 의한 갈등수준의 급등방지 목표
2. 이를 위한 도덕적 가이드라인 제공,
3. 가이드라인을 학습하기 쉽게 만드는 스토리
그리고 대부분은 종교가 이 역할을 담당하지요. 제가 이 포스트에서 역설하는 사회안정작용이라는 심층 구조는 숨어서 안보이고, 겉으로 드러난 스토리만 전승되어 외골격을 형성해 왔습니다. 예수가 죄없는 자만 돌로 치라고 말했다고 꾸며대든가, 부처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끊기 위해 왕궁을 떠났다든지, 지식인의 세력화를 꾀한 공자 일당의 담론, 인디언의 우화에서 영화 아바타의 현대적 변용까지 일맥상통하는 것은 친근한 스토리로 인류 공존의 지혜를 전달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스토리 구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제 책, '가장 듣고 싶은 한마디 YES!'의 주된 테마였듯 구뇌의 작용이 밑받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적 본성을 이기고 사람다움을 찾기 위해서는 이성의 판단만으로는 부족하고, 감성이 작용하여 마음으로 외워야(learn by heart)하기 때문이지요.

Prophets
결국, 이러한 역할을 담당한 고대의 스토리텔러들이 선지자라고 봅니다. 신의 말씀을 전하는 정의 그대로 선지자는 신의 계시를 직접 받았든, 신성의 영감을 받아 창작열이 불탔든, 인류애를 구현하기 위한 의도적 이성의 작용이었든 어떤 이유로든 그들은 중요한 사회적 리더십을 담당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리더십들이 이합집산하며 다시 진화론적인 거대 담론이 된 것이 종교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이라면 선지자들이 종교의 개발자(developer)일 수 있는 것이지요.

Religion is a great invention
그래서 저 개인적으로는, 신앙이 잘못될 수는 있어도 종교는 옳다고 믿습니다. 교회가 잘못될 수는 있어도 기독교는 인류의 복이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우화적 상상력으로 이룬 체계로 인해, 크고 작은 다툼 없이 '신적 중재'를 우리 인간 스스로 이뤄낼 수 있었으리라 볼 수도 있습니다.

이쯤에서 다시 @paperrosess 님의 질문으로 돌아가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시대의 선지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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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존경하는 석학 러셀입니다. 전에 행복의 정복 읽고, 스스로 그의 정신적 제자된 마음이지요. 이 책도, 제목만 보면 3류 수필집 같지만 믿음과 기대를 갖고 읽었습니다.

Bertrand Russell

(Title) In praise of idleness

일단 도발적인 제목의 내용부터 정리하지요. 러셀의 주장은 단순합니다. 근로 자체가 미덕이냐는 의문에서 출발합니다. 전역적 실업으로 인류의 반은 손 놓고 굶는데 나머지 절반은 과로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일하는 인구가 과감히 자신의 일을 반으로 줄여서라도, 나머지 사람까지 모두 함께 일하도록 하자는 뜻입니다. 따라서 게으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일하지 않음(idleness) 또는 여가에 대한 재조명입니다. 딱히 가해자는 없지만 피해자는 뚜렷한 청년실업 상황의 21세기 대한민국에도 적용되는 이야기니 참 탁월한 식견입니다.

책은 러셀의 다양한 컬럼을 엮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막 뽑은 리스트가 아니라 얼마간 글끼리 유기적 관계를 갖기 때문에 러셀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세울 수 있어 좋았습니다. 제 맘대로 정리해본 러셀의 모습들입니다.


성악설자 러셀
영국 지식인답게 기본적으로 회의적입니다. 교육받지 못한 인간의 본성에는 잔인성이 있다고 규정합니다. 여기까지는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순자와 닮았습니다만, 러셀은 다소 더 따뜻합니다. 인간에 대한 긍정적 믿음이 관통합니다.


실용교육자 러셀
그의 생각은 바로 교육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실용교육이 인간의 기능만 교육하고 목적은 도외시하는 점을 비판합니다. 기능적 인간을 벗어난 목적적 인간에 대한 믿음은 이후에 나오는 다른 사상과 정밀하게 직조된 러셀 사상의 바탕이 됩니다. 
반면, 그의 도덕교육론은 냉정한 합리성이 지배합니다. 인간이 배워야할 도덕관은, 공평무사하고 친절함을 유지하는 자기조절 능력이라고 봅니다. 법조문처럼 정밀하지만, 적극적 휴머니즘은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글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를 강조합니다. 필요한 일을 공정히 분담하고 불화를 없애는데 동참할 것을 요청하지요. 사실 이게 서구적 인간관의 한 틀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지주의자 러셀
러셀은 끝없는 사고로 나름의 일가를 이룬 사람입니다. 따라서 대단히 지적이고 또 지성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입니다. 심지어, 개인적 불행이든 공적 불행이든, 의지와 지성이 상호작용해야 극복가능하다고 설파하지요.

따라서 러셀의 교육관은 무용 지식을 강조합니다. 꼭 써먹을 데가 없어도, 공부 자체가 재밌지 않냐는 겁니다. 결과적 효용보다 사고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을 가치로 여깁니다. 이런 관점에서 젊은이들에게 힘없는 지성은 냉소로 빠진다고 경계합니다.

러셀이 갖는 지성에의 확신은 세가지 뿌리를 토대로 합니다. 최소한의 상식, 자기직업에의 소양, 증거에 근거해 소신세우는 습관이지요. 특히 셋째 요소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지성인의 덕목은 직관을 절제하고, 관찰과 귀납을 주된 수단으로 삼는 것이라 여깁니다. 저도 십분 동의합니다.

이런 러셀의 주지주의적 성격은 몇가지 재미난 주장을 제공합니다. 예컨대, 공산주의가 육체 노동자를 지나치게 미화하는데 강한 불만을 제기합니다. 어쩌면 지식 산업이 발달하면서 공산주의가 몰락했다고 볼 수도 있으니 그의 불만은 일리가 있습니다. 또한, 앞서 말한 여가를 현명하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문명과 교육이 선결 과제라고 합니다. 이 또한 동의할만합니다. 행복의 정복에서 보았듯 상당한 지적 활동과 관심사 없으면 여가는 바로 권태가 되어 불행 요소가 되니 말입니다.


합리주의자 러셀
사실 러셀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합리주의입니다. 합리주의는 러셀 특유한 주지주의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상적 색깔은 합리주의의 응용이라고 보면 됩니다. 

시대를 견주어 보면 쉽지 않을 일이지만, 러셀은 종교에 강한 회의를 제기하지요. 톨스토이의 인용에도 많이 나오지만, 러셀은 종교체계와 메시지가 과연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수용 가능한지 조목조목 짚어 나갑니다.

마찬가지로 민족이라는 가치도 낮게 봅니다. 민족은 단지 정치적 체제를 담기 위한 틀짓기로 간주하지요.
공산주의는 능률을 증대시켜 부를 창출하는게 아니라 노동자를 압제하여 창출하는 시스템으로 매우 강하게 비판합니다. 파시즘은 인류의 일부를 선택해 그들만 중요하다는 점이 문제라 지적하면서 사상적 모순에 빠져있다고 거의 경멸을 하지요.

러셀 보기에 보편적이고 공정한 진리의 유일한 기준은 합리성이고, 인간 종족 으뜸의 요소로 꼽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자 러셀
실행적 관점에서는 러셀은 사회주의자입니다. 필요하면 산업의 이익이 금융의 이익보다 우선 보호되어야 한다는 선명한 입장을 표명합니다. 산업이 공동체적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런 러셀이 금 무용론을 펼쳐도 놀랄 일은 아니지요. 금은 자본재가 아니니까요. 

러셀 자신이 사회주의를, 민주주의와 기계생산체제에 대한 매우 중요한 보완책으로 믿고 있습니다. 사적 이윤동기에 대한 통제와 개인을 조정하는 사회적 관점의 유지를 가능하게 하는 방책이 마련되어 있으니 말이지요.


인본주의자 러셀
러셀 사상의 물밑은 인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획일화는 모든 기준을 낮춤으로서 손쉽게 얻어진다"라는 주장에서 알 수 있듯, 몰개성과 규격화에 따른 반인본주의를 거부합니다. 미국을 비판하는 이유도,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이라는 까닭입니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는 민주적이지 않기 때문에 반대합니다. 얼핏 민주적인듯 해도 결국 당파적 비민주에 빠짐을 지적합니다. 

규율이 아무리 현명해도 애정과 접촉을 이기지 못한다는 주장이나, 곳곳에 드러나는 자유로운 성장, 자연스러운 삶과 능동성에의 찬미라는 점에서 그의 통찰은 시대를 관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러셀의 열정과 생의 환희가 선연히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상 몇 가지 키워드로 러셀을 정리해봤습니다. 제가 러셀을 너무 찬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옛날 적은 글이 지금의 후학에게도 심금을 울리고, 다양한 통찰을 제시하고, 적절한 관점을 제시한다면, 그는 분명 합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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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흠흠...제가 최근 읽고 있는 책이 정신과 전문의 문요한 씨의 <굿바이 게으름>입니다. 그 책에서도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잠시 언급하고 있는데,,,,그가 말하길 정작 러셀은 하루에 수천단어씩의 글을 매일 쓰는 절대 게으른 적이 없는 사람이랍니다....
  2. 책 제목만 봐도 사고 싶어집니다.
    조금 덜 일하고 일좀 나눠주자는거군요...
    회사내에도 혼자 일 다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덕분에 저 같은 사람은 놉니다. 후후후후.
    • 음.. 쉽지 않은 커밍아웃입니다. -_-
      보통은 내가 일을 다하고, '쟤가 묻어간다'고 이야기하기 마련인데.

      엘윙님은 큰 인물이 될듯 합니다. ;;;
  3. 안녕하세요 ~ 좋은 소개 글 잘 봤습니다

    아 이런 책 소개는 실제로 읽지 않아도.. 왠지 배가 부르네요(?!) 하하
    아무튼 매력적인 분의 글을 매력적으로 소개해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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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아래 내용은 기독교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본문비평학을 보면서 기독교의 성립에 대한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의 제 추론을 정의(definition)라는 형태로 정리해본 바입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논의는 환영이지만, 종교적 예수에 대한 옹호와 비난은 모두 사양합니다. 따라서, 내용은 가려놓으니, 글 정책에 동의하시는 분만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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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매우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하는 저이지만 '종교'의 관점을 떠난다면 사실 저렇게 해석되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을 제외한 Jesus Christ 는 '랍비' 나 '선생' 으로 이해되지요.. 그리고 실제로 성경 안에서도 '세상은 나를 뭐라고 부르냐?' 라는 질문에 '랍비 혹은 선생 혹은 선지자로 불립니다' 라는 제자와의 대화 내용도 있구요.

    대한민국에서의 교회의 이미지는 '비과세 대상의 절대성공비즈니스' 인게 맞는듯 합니다. ㅎㅎ 많이벌던 적게벌던 소득의 1/10을 바치도록 하니... 사실 십일조는 성경에서도 교회의 운영에 쓰이는게 아닌, 가난한 자를 위한 봉사에 쓰도록 해놓았는데요.. 십일조 모아서 교회 증축한 비용의 이자를 대는 교회들의 소식을 들을때마다 속이 쓰립니다. 종교적 의미를 떠나서 교회에서 강조하는 '사랑'의 모습을 지니지 못한 교회 스스로 개혁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에서 기독교가 아닌 천주교는 이미지메이킹으로 대성공이라고 볼수 있겠지요. 금욕과 봉사의 생활 모습은 종교를 떠나서 '높은 이상'의 모습에 부합하니.... 종교적인 관점으로 '개인의 노력으로 얻는 구원'과 '선물로 거저받는 구원'의 입장차이가 기독교와 천주교의 가장 큰 차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아니라면 천주교 다니시는 분들의 답변을 ;; )

    기독교 스스로의 논리적 입증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성경에 씌여진 대로 믿고 해석되어 만들어진 기독교의 교리는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면 무너지게 되고, 특히 Jesus Christ 의 Rebirth 의 의미가 크기 때문에, 저것이 입증되지 않으면 기독교의 의미가 없지요. 하지만 종교의 옳고 그름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삶의 기준으로 성경을 택하는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종교'의 의미로 기독교를 택하는것이 나쁘지 않은듯 합니다. ㅎㅎㅎ 물론 일부 교회들의 모습은 영 아니올시다 인게 맞지만서도 ㅠㅠ;; 기독교인으로서 참 슬픕니다.
    • 네. 사악하지 않은 종교는 어떤 의미에서든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사회적 구조라는게 제 믿음입니다. 다만, 곁에서 악용하면 점점 그 구분선이 모호해지는듯 해서요.

      기독교인 입장에서 껄끄러울 수 있는 내용을 담담히 이야기 나눠주셔서 저도 많이 배웁니다. ^^
  2. 비밀댓글입니다
  3. '교회'는 초대 교회 쪽보다는 현대 교회 (많이 봐 줘도 로마 공인 이후에 권력의 맛을 보기 시작한 시점의 교회)를 기준으로 정의내리신 것 같네요.^^;

    신은 인간의 발명품이냐 태초에 신이 있었냐는 문제는
    bottom-up 혹은 top-down의 문제이긴한데
    신앙의 출발점은 (논증이 아닌) 고백이고 그 고백은 top-down이라고 봅니다.
secret
기독교는 책의 종교입니다. 책으로 인해 교리가 표준화되고, 고대의 말씀과 일화가 면면히 전해져 내려오면서, 지역을 넘고 세월을 견디며 전 지구적으로 보급 되는 강력한 힘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경은 애초에 누가 적었을까요? 또 그 말은 전적으로 믿어도 될까요? 믿어도 된다면 왜 그럴까요?

Bart Ehrman

(Title) Misquoting Jesus: The story behind who changed the bible and why

정말 흥미로운 책입니다. 종교 자체로서의 기독교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관심으로 많은 책을 읽었지만, 이 책은 매우 협소한 주제인 성경 자체를 깊이 파고들어 학문적 성취를 이룬 점에서 인상 깊습니다.

축자영감설
흔히, 성경의 권위는 유일신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씌어졌다는데서 출발합니다. 신앙의 영역에서는, 성경이 믿음의 출발임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학문의 잣대로도 같은 결론을 믿고 있어야 할까요?

필사자
전혀 그렇게 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초기 전승은 성스러운 책이 필사라는 방법으로 복제되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두가지 방법으로 필사 상 왜곡이 생깁니다.
첫째는, 전문성 없는 필사자가 실수로 문장을 왜곡하는 경우입니다. 이는, 당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인 관계로 종교적 이해가 없는 사람이 직업으로 필사를 하는 경우 발생합니다. 여러분도 숙제하다가 종종 그런 실수 해 본 적 있을겁니다. 한 줄 넘어갈 때 같은 단어가 있는 줄로 건너 뛰는 실수 말입니다. 이런 기술적인 실수를 비롯해 문장의 뜻을 통하게 한다든지 유사한 음가를 바꿔쓴다든지 하는 식으로 성경의 변개(change)가 생깁니다.
이런 변개가 양적 변개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정도가 더한 변개가 있습니다.

왜곡
바로 종교적 이유로 의도적인 변개를 시키는 경우입니다. 대개 뜻을 잘 통하게 선의로 바꾸기도 하지만, 일부는 자신이나 집단의 논리를 강화하기 위해 목적을 가지고 본문을 바꾸어 버립니다. 그들이 상정한 적대그룹은 내부 분파, 유대인, 여성, 외부 이교도 등 다양한 집단입니다.
이 경우는 그 변개의 결과가 그럴듯하여 후대의 정설로 믿어지게 됩니다만, 최소한 원문과 달라진다는 점에서 논란의 정점에 있습니다.

사례
예컨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간음한 여인에게 '죄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의 고사는 아주 후대에 누군가가 슬쩍 끼워 넣은 이야기입니다. 이는 전체 성경 중 오로지 요한복음 7장, 8장에만 나타납니다. 하지만 고대적 원본 요한복음에는 없는 이야기지요. 
가장 고약한 것은 성서학자들이 말하는 요한의 콤마(Johnannine comma)입니다. 요한일서 5장 7-8절에 나온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이부분은 고의적 변개이며, 이 구절이 없으면 3위일체설은 매우 복잡하고 간접적인 방증과정을 거쳐야 성립이 됩니다. 하지만, 요한의 콤마를 슬쩍 끼워 넣음으로서 3위일체에 대한 논쟁의 종지부를 찍지요. 
'성서에 나와 있다. 봐라 여기.'

승자와 패자
뿐만 아니라 예수가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피같은 진땀을 흘렸다는 구절을 비롯해 세기도 힘든 수많은 중요 변개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가 하나님의 분신이냐 양자냐 또는 제2의 하나님이 있느냐 등등 초기의 격렬한 논쟁 중 살아 남은 이론이 적은 승자의 논리들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 대논쟁 이후 3위일체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그 외의 경전은 외경으로 말살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외경들에 초기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기도 하지요. 또한 외경 자체도 스스로의 논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변개가 반영되어 있었을 수도 있고요.

성경의 구조
결국, 이러한 성서의 원독법을 찾는 작업인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이 품는 궁극의 질문은 누가 원저자였을지 입니다. 성서의 구조를 보면 이에 대한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초기에는 예수 사후에 각지에 흩어진 교회의 일관된 복음활동을 위해 예수의 직접 제자들이 교리와 상황에 대한 해석, 판단을 전해준 서신들이 있습니다. '전서'류입니다. 이를 지나자, 점차 예수의 행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궁금증을 해결해주기 위해 예수의 삶을 기록한 4대 복음서가 있습니다. 이후로, 박해받는 기독교도의 행동 규범을 정립하기 위해, 사도들의 선교적 위업을 기린 사도행전이 나옵니다. 다음에는 초기 기독교도들의 종말론에 부응하기 위한 묵시록 계열이 난립합니다만, 종말론에 기대어 확장하던 교세가 교회라는 정규조직에 의한 성장으로 바뀌면서 묵시록에 대한 의존도가 불필요해집니다. 따라서 신약에는 요한계시록만 정경으로 채택되고 나머지는 외경으로 살라집니다. 이후에는 교회조직을 초기 사도시절처럼 강력하게 지휘하고 확장해 나갈 지도자들이 필요해짐에 따라, 모두가 은총받은 평등주의에서 리더의 규범을 정한 교회규칙서(didache)가 따릅니다. 그리고, 외부와 논쟁시 논리적 배경을 제공하는 변증서(apologia),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순교록(martyrology)이 교회문서를 구성합니다.

원저자
결국, 본문비평이 찾아 헤메는 원저자의 원기록이란, 그 실체가 상당히 애매해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결국 잘 찾아야 마가, 누가, 마태, 요한 등 사도인데, 이미 그들조차 목적의식을 갖고 글을 썼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이 다 적은게 아니라 그들이 말한 요점 구술을 받아 적어 문서화한 양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이미 최초의 기록 문서부터 의도하지 않거나 의도한 변개가 이미 들어갈 소지가 다분합니다.

기독교의 진화
흥미진진하게 이 책을 보다보면, 초기 기독교의 성립과정이 눈에 잡히듯 상상이 갑니다. 결국 예수라는 뛰어난 랍비가 기이한 행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었고, 그를 따르는 일단의 탁월한 행동주의자들이 그를 신으로 옹립하면서 사람들을 이롭게 하려는 이타적 행위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애롭기보다는 다소 날카롭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예수의 행동과 언사를 부드럽게 고쳐간 후세 기록자의 노력은 눈물 겹습니다.

인간적인 종교
결국, 지금의 논의가 성경을 무력화하는걸까요. 그렇지는 않다고 봅니다. 애초의 문서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이미 오류를 내포하고 있지요. 아예 과학적 엄정함으로 종교에 대한 입장을 세운 바가 아니라면, 제가 보기엔 변개과정 전체를 기독교의 발달과정으로 이해해야 옳을것입니다. 이 부분은 성서학자인 저자의 견해와 제 생각이 다릅니다.
다만, 이러한 변개 과정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면서, 인간적인 종교관을 갖는게 더 포근할 것입니다. 또한, 종교의 성립과정에 기여한 이상의 몫을 주장하는 교회에 대해서도 색다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겠구요.

유교는 잘 전달되었는데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영감과 생각을 했습니다. 심지어 통일교나 제7안식교가 외부 중립자에까지도 이단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지부터, 왜 유교는 경전의 왜곡이 없을까 하는 부분까지 말입니다. 
그리스어 성서가 띄어쓰기가 없어 오독의 여지가 많다고 하는데, 한자는 더하면 더했지 쉽지는 않지요. 하지만, 그 방대한 문서에 오독의 여지는 몇글자 수준 밖에 안됩니다. 제 나름대로 답은 있지만, 곱씹어보면 더 재미있을듯 해서 여기서 줄입니다.

책에 대해
한가지 불만스러운 점은 제목입니다. 책은 본문비평학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을 적었습니다. 다분히 가치중립적인 접근법을 취합니다. 그러나, 제목은 '성경 왜곡'이라고 다소 가치주입적 입장을 취합니다. 물론, 결국 변개는 성경의 왜곡을 낳습니다만, 제목에서 야기하는 선입견은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반면, 번역은 마음에 듭니다. 신학을 공부한 전공자의 번역이 미묘한 맥락의 줄기를 잘 쫓고, 적절한 용어를 내내 구사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 관심사에 따라 꽤 재미난 책입니다. 기독교 신학의 과학적, 역사적 변천사를 궁금해 하시는 분께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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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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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잘 다녀오셨지요?
    몇 주 제가 하우스일 말고 다른 일로 오랜만에 두뇌 회전을 했더니 정신이 없네요 ㅜㅜ

    저 yes 다시 읽고 있습니다
    필요에 의해서 다시 읽으니 처음과는 다른 느낌입니당 ^*;;
    잘 읽고 제가 담달에 잘 적용해야 할텐데 걱정입니당 ㅋ
    • 전에도 언뜻 언급하셨는데.. 다음달에 중요한 일이 있으신가봐요.
      화이팅! ^^
    • 비밀댓글입니다
    • 전 처음 듣는 이야긴데요??

      암튼. 멋진 PT 하시길 바랍니다.
      첫장에는 고해상도 그림을 사용해보세요. flick에서 검색하면 뜻을 잘 표현하는 그림을 건질수 있을겁니다.
  2. 한번 구해서 읽어봐야겠네요. 제가 신학대학원 첫학기에 듣고 있는 과목이 바로 기독교변증학(Apologetics)와 히브리어입니다. 특히나 기독교변증학의 경우 현재 저와 함께 수업을 듣는 15명의 학생들(목사, 엔지니어, 평신도 사역자...) 사이에도 미묘한(?) 입장 차이가 있습니다. 아직은 수업시작한지 3주밖에 안되어서 더 배워봐야겠지만, 나름대로 주류기독교계도 많은 고민이 있어보이더군요. 특히나 제가 다니는 신학대학원이 미국주류기독계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남침례교단 소속인데다가 그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신학대학으로 알려져있죠. 아예 여성은 Master of Divinity에는 학생으로 받지도 않습니다. 이런 험한(?) 분위기에서 어떤 신학적 배움을 얻을 수 있을지 저도 흥미진진(?)합니다.

    그나저나 출장은 잘 다녀오셨는지요.
    • crete님 안녕하셨습니까.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계시나봅니다. 이 책이 기독교 신자에게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crete님처럼 합리적인 분께는 더 바른 믿음을 세우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책 구하기 어려우시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곁다리로 말씀드리면, 책에도 많이 나오지만, 원시적 기독교에서는 여성신자의 스폰서링과 leading이 많이 중요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먹고살만하니까 여성관련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고치고 하위범주로 빼버렸다는 증거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리고, 출장은 잘 다녀왔습니다. 심신이 많이 지쳐 몸을 좀 추스리고 있습니다. 염려 고맙습니다. ^^
  3. 이 책을 쓴 저자의 새로운 책이 금년에 새로 번역되었는데, 제목도 비슷한 <예수왜곡의 역사>이더군요. 저는 이 책만 읽었는데, 이 책에서도 <성경왜곡의 역사>에 대한 언급을 곳곳에 했더군요. 솔직히, 기독교나 성경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면서 기독교, 특시 대한민국의 개신교가 국내외에서 벌이는 활발한(!!!) 활동에 눈쌀을 찌푸리는 입장을 갖고 있는 저로서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좀 멍(!)했습니다.

    <예수왜곡의 역사>에 대한 소감을 적어두었습니다. 제 블로그에도.
    http://blog.naver.com/oyhong/70092271933
    • 오 그렇군요.
      저자의 새로운 책이라니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재탕일지언정, 저자의 글맛을 보는 재미가 있을듯 합니다.
      소개 고맙습니다. ^^
  4. 저는 요새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와 고통의 문제를 읽고 있는데요..

    혹 C.S 루이스 책에 관해서도 관심이 있으신지요..?
    • 아..
      전 나니아 연대기만 알고 있었는데, 기독교 변증가로군요.
      언젠간 읽어보고 싶네요. ^^
  5. 선생님의 훌륭한 글 자주들러 보겠습니다.혹 제카리아시친이 지은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을 보셨는지요 보셨다면 그책에 쓰인 성경의 유래에관한 선생님의 견해는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 아니요, 읽지 않았습니다.
      소개해주셔서 처음 알았네요. ^^

      검색으로 내용을 대충 보니, 기회 닿으면 읽어보고 싶습니다.
secret

행복의 지도

Culture/Review 2010.01.02 22:00
제목에서 한 몫 챙기고 가는 책이 있는가 하면, 제목에서 밑천 털고 가는 책이 있지요. 이 책이 그러합니다. 작년부터 갖고 있던 책이지만, 그 밋밋한 제목 탓에 시덥지 않은 행복론이라 생각했습니다. 거들떠도 안 봤지요. 먼저 읽은 아내의 평이 좋아서 읽어 보리라 다짐만 한게 또 반년입니다. 작년 말 출장길에, 주간지 집듯 가벼운 마음으로 가져간 책인데, 왜 이제야 읽었는지 아쉽기만 합니다.

Eric Weiner

(Title) The geography of bliss

Theory of happiness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마음의 상태입니다. 하지만, 상업의 목적에 충실히 굴복한 학문은 이미 행복학을 하나의 아카데미즘으로 수용했지요. 칙센트미하이의 몰입(flow) 시리즈나 긍정심리학의 핵 길버트 씨의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도 그러합니다.

물론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의 마음은 실제로 존재하고, 누군가가 행복해지는건 도덕적으로 긍정할만한 개선이므로 인류 후생 차원에서 행복학의 의미를 부정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리뷰(몰입의 즐거움,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에서 지적했던 거북함들처럼, 행복 연구 자체를 위해 행복을 미시적 수준으로 끌어내려 도출한 결과를 다시 거시적 인과의 총합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는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그 이름을 행복이라 부르든 학문적 포장지에 싸서 주관적 복지(subjective well-being)라 부르든 말입니다.


Happiness Reporter
그런 면에서 에릭 씨의 시도는 차라리 박수칠만 합니다. 특파원으로서 오랜 기간 나쁜 소식 전해서 연명했던 자신의 부채의식을 상환하자는건 명분이라 쳐도, 지구상 행복한 나라, 안 행복한 나라를 직접 방문하고 저자거리로 뛰어 들어 사람속에서 부대끼면서 행복의 본질을 캐보는 책의 컨셉은 장하고 의미 있습니다.


Geography of happiness
아래의 리스트는 책에 나오는 저자가 방문한 나라들입니다. 한줄 요약은 저자의 글을 제 나름으로 간추린 내용이고, 괄호 안은 제 느낌입니다.
네덜란드: 자유와 관용이 행복요소. (하지만 불구속이 행복의 등가일까?)

스위스: 엄격한 규칙하에 정돈된 삶. 그 기반위에 정립된 신뢰가 행복요소. (더할 나위 없는 행복보다는 광범위한 만족. 국민 평균이 좋을 나라)

부탄: 효율과 경제성장을 외면한 은둔속의 고요. 국왕은 국민행복지수(GNH)를 통치잣대로 삼음. 자연과의 교감과 공동체적 관계, 신뢰가 행복요소. (통치술의 책략도 보이지만, 행복의 기본요소에 가까운듯)

카타르: 벼락같이 생긴 졸부의 돈이 유일한 행복요소. (역사 없는 돈은 공허하고, 관계가 불안정한 돈은 각자를 고립화시키는듯)

아이슬란드: 단일민족의 가족적 상호의존성, 바이킹의 순수성을 전승한 언어에 대한 자부심, 공동체적 공유의식과 실패에 대한 전폭적 관용 (추위가 오히려 행복의 기폭제가 된 경우)

몰도바: 역사적 정체성 모호, 러시아와 관계에 기인한 국가적 자부심 몰락, 주위 국가에 대한 질투, 족벌주의와 부패, 가난, 징크스로 만연한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무력감, 무례, 배려심 부족, 이기주의, 신뢰와 우정을 폄하, 비열과 속임수를 보상하는 문화, 친절이 들어설 공간이 없는 각박함이 불행요소. (많아 보이지만 서로 엮인 현상이고 악순환을 끊어야 모두가 개선되는 종류의 문제)

태국: 욕구와 충동을 인정하는 개방성, 공동체를 위한 미소, 번잡한 생각에 빠지지 않는 문화, 재미(사눅)가 우선시 되는 문화, 공동체를 의식한 냉정한 가슴(자이옌)과 고맥락(high context)적 배려가 행복요소. (하지만 그 표면적 행복속에 억눌린 감정은 불씨 같다. 폭력과 살인률, 가끔가다의 쿠데타를 보면. 그래도 마이펜라이[신경 끄자]는 배우고 싶은 주문)

영국: 투덜거림으로 스트레스를 해소. (행복한 삶보다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는 나라)

인도: 모순을 인정하는 태도, 좋은 것만 취하는 선별적 포용성, 이에 따라 즐기게 되는 예측 불가능성이 행복요소 (option 적 접근방법이 있다면 risk 있는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
이 중, 붉은색으로 표시한 나라는 좀 다른 경우입니다. 카타르는 돈이 행복의 요소라 가정한다면 (문화나 인프라없이) 순수하게 돈만 많은 나라가 행복할지 알아보려 가본 경우입니다. 몰도바는 객관적 지표에 비해 스스로 평가하는 행복이 최악이라 그 이유를 보러 간 것입니다. 영국은 행복의 시계열적 변화를 보러 갔습니다.


What is happiness?
책은 행복의 다양한 요소 뿐 아니라 행복하지 않은 이유도 꼼꼼히 따집니다.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니 입체적입니다. 동양과 서양, 빈부 등 특정 요소의 가능한 대척점들을 이래저래 살핍니다. 그래서 어줍잖은 행복학자들보다 더 설득적입니다.

물론 에릭 씨는 행복의 요소가 이거다라고 단칼로 잘라 말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걸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책 한권을 읽으며 세상을 함께 주유하다보면 어떤게 행복인지 뭉실하게 잡힙니다. 예컨대 세계에서 가장 춥지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축에 드는 아이슬랜드를 보면 종교도 필수요소가 아닙니다. 착한 무신론자들이 확장적 가족개념으로 살아도 행복이 매우 높습니다. 또, 스위스의 공리적 만족은 평균은 높고 표준편차는 작은 행복분포도를 보이면서, 넘치는 기쁨과 행복은 매우 어렵단 사실도 알게 됩니다.

확실한건, 돈이 행복에 꽤 중요한 요소지만 카타르처럼 돈만 많다고 행복하지 않고, 부탄마냥 돈이 없다고 꼭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주변국, 주변인의 인정을 끊임없이 갈구하며 돈으로 세운 신기루의 나라보다, 세상과 정보를 차단하고 자기만의 기준으로 행복을 지켜나가려는 부탄의 시스템이 합리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점은, 사회네트워크와 공동체적 관계신뢰의 문화가 행복에 중요한 요소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누가 달랑 관계와 신뢰라는, 두 개 키워드 들고 나타났다면 진부한 결론이고 식상하다고 핀잔 받을만 하겠지만, 여러 나라의 이면을 보고 나면, 충분은 아니라도 필요조건이란 점을 인정하게 됩니다.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Fascinating writing style
에릭 씨 글투도 마음에 듭니다. 무척 감성적인 에세이나 여행기로 살집을 잡았지만, 군데군데 학문적 결과를 뼈대처럼 박아 넣었습니다. 그래서 부드럽지만 단단합니다. 매우 예리한 기자의 감각과 여행가의 위트가 살아 있습니다. 빌 브라이슨의 유머에 필적한다고 평가를 받았는데, 제 보기에 브라이슨 씨의 질낮은 떠벌임에 비유하긴 아깝다고 봅니다.

실험실의 표본에서 추출한 박제된 행복이 아니라, 세상 돌면서 주워 모은 행복의 이야기들, 그 이야기를 듣다보면 저절로 행복한 기분이 들겁니다. 의외로 우리나라에 행복의 요소가 많이 있음을 깨닫게 되니까요.

이 책 새해 첫 리뷰로 소개하려 꼭꼭 참았더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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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책 좋아요!!
    주위에도 몇 번 추천해보았지만, 가볍지 않은 두깨와 빡빡한 글씨.. 때문에 부담된다는 사람도 있었고..
    여행책 아니냐는 사람도 있었고 ㅜㅜ
    • 해피씨커님은 닉네임 답게 이미 읽고 잘 음미하셨군요. ^^
      이 저자도 결국 happy seeker였던거죠..
  2. 어멋..새해에 좋은 책으로 즐거움을 주시네요..
    저 블러그 하면서 많은 책을 읽게 되었는데
    그것이 참 좋아요!
    무슨 책을 읽어야할 지 모를때 짜짠~~하고 추천하시는 책이 불빛이 됩니당.

    복 받으실겨~~~~^^
  3. 보통의 책 '불안'이 오버랩되네요.
    행복과 불안. 왠지 두책이 시리즈 같이 느껴집니다. ^^
    '불안'도 참 좋았는데, 행복도 기대됩니다. 조만간 꼭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좋은책 알려주셔서 감사드려요.
  4. 헉...역시 형이상학을 추구하시는 신사분이세요.
    전 새해 벽두부터 below-the-belt 이야기 올렸는데.. ;)

    행복과 행운이 넘쳐나는 한 해를 만드시길..
    • 이궁..
      아거님처럼 글을 잘 쓰지 못하는지라, 주제의식이라도 선명하게 가져가려던 참이었습니다. ㅠ.ㅜ

      아거님, 항상 별처럼 영롱한 글 감탄합니다.
      글도 글이지만, 올해 개인적으로도 좋은 일 많이 생기시기 바랍니다. ^^
  5. 앜 저도 이책 읽어봐야겠습니다.
    작가가 우리나라에 와봤으면 뭐라고 썼을까요.
  6. 더러운 세상 2014.04.17 17:59 신고
    구미선진국들은 낙관적이라는 답변율이 굉장히 낮고 비관적이라는 답변율이 높은나라인건 그만큼 불평불만하며 사는것은 당연하게 여기기때문에 가능한일일겁니다! 저는 사실 의미있는삶도 좋지만 구미선진국에서는 이미 없어진 가족유대감과 마을공동체간의 유대감이 강한나라에서 몇달간 체류해보고싶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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