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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대학시절은 완전 아날로그였지요. 선생님이 분필로 판서하시고, 학생은 노트에 필기합니다. 다행히 XT (8086)나 AT (80286) 등 성능이 개량중인 PC가 있어서 과제는 컴퓨터로 제출했습니다. 보석글은 일찍 갖다 버렸고, 아래 한글이면 행복했지요. 숙제 끝날즈음, 9핀 라인 프린터가 찍찍거리면 퀭한 눈으로 담배 한대 꼬나 물고 다소 느긋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프리젠테이션이란 말조차 낯선 채 학부를 졸업했습니다. 대학원에 가서야 갑자기 프리젠테이션을 집중 교육 받았지요. 제 사수인 선배는 랩에서 내려오는 비기를 자상하게도 전수해 줬습니다. 빈 종이에 스토리보드 만드는 법, TEX으로 수식 적는법, 그래프를 출력하고 복사해서 오려 붙이는 법 (copy & paste를 직접 손으로 해보신 분?), TP 뜨는 법, OHP 쓰는 법 등 말입니다. 당시는 그래프 인쇄 자체도 skill set이 필요하고 복사기도 한번은 배워야 쓰던 시절이었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OHP를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프로그래머가 천공카드 전해듣기만 했듯 말입니다. 나름 OHP를 이용하는 기교들이 있었습니다. TP 갈아끼우는 테크닉, 볼펜으로 라인을 포인팅하여 강조하는 법, 종이로 문단 아래를 가리기, TP 두개를 겹쳐 비교와 애니메이션을 하는 등.

그리고는, 회사에 들어가자 마자 신입사원 시절부터 많은 프리젠테이션을 도맡아 했습니다. 임원 보고, 영어 발표, 학술 발표, 강의 등등.

MS사에서 파워포인트가 나오고 얼마나 편해졌는지. OHP에서 사용하던 모든 기능이 더 잘 구현되어 있어서, TP 만드는 수작업보다 발표에만 집중해도 되니 참 좋았습니다.

막 배운 프리젠테이션을 좀 더 체계화한 계기는 단연 비즈니스 스쿨이지요. 전문적인 강좌를 통해 제가 알던 지식과 팁들이 하나의 구조로 설명 가능해졌습니다. 물론, 이 때도 포인터를 쥐고 살았습니다. 팀 발표를 주로 맡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Garr Reynolds

(원제) Presentation Zen: Simple ideas on presentation design and delivery


최소한 프리젠테이션은 이골이 난 저입니다. 그리고 세상엔 MS 파워포인트가 있습니다. 아무나 그 소프트웨어에 글 적어 놓고, 프리젠테이션 한다고 나서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 열광하는 이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프리젠테이션의 핵심을 잘 정리한 책입니다. 대부분 공감하고, 배울 점이 많습니다. 프리젠테이션에 대해 입문서로도 추천할만 합니다.

다만, 모두가 좋다하면 무비판적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Good to great에도 일부러 딴지를 놓은 바 있습니다. 이번에도 저는 이 책의 주의사항만 말하고자 합니다.

1. 프리젠테이션 젠의 원칙을 이해한 후 잊어라.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만, 보고서를 방불케 하는 발표 자료 (slidecument)가 유행하듯, 젠 스타일도 또 하나의 일시적 유행(fad)이 될까 우려스럽습니다. 실제로, 인터넷 다니다 보면 겉멋만 든 zen 스타일의 발표자료가 심심찮게 보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제발 부탁인데, 이 책 무조건 따라하지 마십시오. 초식 좋아하다가 주화입마에 빠집니다. 책에서 말하는 감성적인 접근, 핵심을 때려주는 촌철살인은 어마어마한 내공이 받쳐줘야 가능한 일입니다. 프리젠테이션의 禪師나 가능한 일입니다.
어설피 그림 몇장에 메시지 몇줄로 때우려다가는 정말로 큰 코 다칩니다. 전해줄 스토리가 없고, 책 한권을 한 문단으로 요약할 능력이 안되는 이가, 자료만 zen 스타일로 만들었다고 안 되던 발표가 잘 될리 없습니다. 글의 양이 비슷해도, 의미는 '지나가다'님 댓글과 하이쿠간 간격과도 같습니다.

2. zen 스타일이 부적절한 프리젠테이션은 수두룩하다.
이 말 오해 없기 바랍니다. 선수는 어떤 장비로도 플레이가 가능합니다. 저 역시 어떤 프리젠테이션도 zen 스타일로 할 수 있습니다. 미분방정식을 사용한 금융공학을 젠 스타일로 설명하라해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게 효율이 있느냐의 이슈입니다. 디테일한 부분을 논의한다든지, 과정과 협의가 중요한 부분에서 젠 스타일로 어설피 접근하면 사실 호도 내지는 일방적 주장에서 그치고 말 뿐입니다.

3. 이 책은 관행적 프리젠테이션 스타일을 안 써도 된다는 면죄부가 아니다.
다만 다른 방법으로 생각해볼 옵션을 주는겁니다. 목마를 때 물이 무난하지만, 10시간 수술 마친 환자와 2시간 축구하고 나온 선수의 갈증 푸는 방법이 다르면 더 효율적인 이치와 같습니다. 효과는 결국 동일합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서재에서 사색하고, 산사에서 선을 닦듯, 때와 장소의 맥락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물론 공부의 깊이를 더하는건 똑같습니다.
그런면에서 책의 주장은 '프리젠테이션 스타일로서의 zen'입니다.

4. HD Presenta禪
이 책을 격하게 단순화하면 HD presentation입니다. 젠 스타일하면 퍼뜩 짚이는 그 부분이 그렇습니다. 순전히 기술적으로는, 관성적 평균보다 정보 취득-가공-처리-검색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에 그만큼 해상도를 올려보자는 의미입니다. 비주얼의 장점을 극대화하자는 뜻입니다. 감성이 온전히 대화에 집중하도록 여유를 주자는 방식입니다.

5. 프리젠테이션의 원칙은 늘 그대로이다.
그 외의 모든 사항은 전통적인 프리젠테이션의 황금률입니다. 핵심 메시지에 집중하고, 청중과 교감하는 발표말입니다.

이 책을 보고 내내 끄덕끄덕 공감했다면, Garr의 뛰어난 프리젠테이션에 설득되었을 뿐입니다. 사실, 그도 TED의 위대한 연설가들 비디오를 지하철 출근길에 ipod으로 보며 공부하는 영원한 수련자의 입장일 뿐입니다. 저는 연말 전사 프리젠테이션에 zen 방식을 사용해 봤습니다. 당시의 분위기에 적절히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프리젠테이션은 다른 방식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결국, 그가 정제해서 전달한 교훈을 삶 속에 어찌 들여 놓을지는 독자이자 프리젠터인 당신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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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Inuit
@inuit_k / CxO / Author ("가장 듣고 싶은 한마디 YES!") / Making better world, every min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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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으로 필요한 지적입니다. 프리젠테이션의 원칙은 늘 변함없지요. 어설픈 젠 스타일 추구가 오히려 속 빈 강정이 되는 경우를 많이 봐왔어요. 무작정 따라하기는 금물.
    • 네. zen 스타일 자체가 문제겠습니까만, 겉만 따라하는 조류는 경계할 일이겠습니다.
      LUV님 댓글 고맙습니다. ^^
  2. 갠적으로 무조건 심플 단순한 디자인을 선호해여...
    저도 대학3학년때가정 리포트 손으로 써 냈다는...
    복학하고4학년때 워드사용한다는 사실에 얼마나 떨렸었는지...

    항상 유익한 글 감사드려요 ^^
    • 금드리댁님, 워드 처음 사용할 때 그 야릇한 심정이 이해갑니다. ^^지금이야 익숙한 일이지만, 새로운 프로그램은 낯설고 경이로운 세상이었지요.
  3. 잊고 있던 보석글 이야기가 나올줄이야.. 그리고 보니 프리젠테이션도 뭔가 왕도가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원래라면 전 프리젠테이션을 아주 잘해야 하는 위치이지만 그런것들이 안되서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 혼자서 생각한것이 진실을 정직하게 적어라입니다. 기교는 그 후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뭐, 이렇게 생각은 하지만 정작 많이 어설프죠.
    어떤것이 좋은 프리젠테이션인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글을 읽다보면 한가지는 확실히 느껴집니다.
    쉽지 않게 긴 시간 차근차근 공들여 배우고 노력한 프리젠테이션의 길이라는 것을요.
    • 동안의 mode 소녀님께서 보석글 어찌 아시는지. ^^

      진실.. 가장 중요한 덕목이자 재료입니다.
      그리고, 그 진실을 예쁘고 먹기 좋게 담는 기술도 필요합니다.
      재료도 좋고 레시피도 좋아야 좋은 음식이죠.
      mode님은 현재 어떤 프리젠테이션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부분의 개선을 원하시는지 그런거요..
  4. 맞습니다.
    제 레포트도 손으로 손목 아프게 쓰다
    찍찍 소리내는 프린트에서 잉킂젯이 나와 어찌나 신기하고 깔끔하던지요..ㅎㅎ

    좋은 주말 보내고 계시죠?
    전 어제밤 친구네가 놀러와서 이제사 헤어지고 블러그소풍다닙니다.
    재밌는 1박 2일!! 이었답니다..^^
  5. 이 책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말이죠..
    서점가서도 몇번 들었다 놓았다 했는데...
    또하나의 유행을 쫓아가는게 아닌가 싶어 아직 사진 않고 있었네요..
    뒷북치는게 저의 특기이기도 하구요 ㅋ

    좋은 서평 감사합니다. 좀더 큰눈으로 볼 수 있게됬습니다 :)
    • 제가 말한 부분을 염두에 두시고 보면 휘리릭 읽을만 합니다.
      저도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
  6. 늘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할 때마다 프리젠테이션 젠의 기법을 조금이라도 가미해볼까 생각하지만, 사실 때와 장소, 대상에 따라서 달라지는 게 프리젠테이션이라 뜻대로 되질 않더라구요.

    그래도, 취미로 하고 있는 동호회 내에서 재미삼아 발표하는 자리에서는 효과만점의 방식이더라구요. 프리젠테이션은 아무튼 공부를 많이해야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 맞습니다.
      상황따라 적절히 가려 쓸 내공이 중요하겠지요.
      젠 스타일이 아니라 사무라이 스타일, 쿵푸 스타일까지도요. ^^
  7. 프리젠테이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오랜만에 보는 OHP란 단어는 반갑네요. 예전 생각납니다. 히힛.
    • 예전에 OHP 좀 쓰셨나봐요.. ^^
    • 학창시절에 필기할 때 만나고 싶지 않아도 만날 수 밖에 없었지요. 크크. 자리가 ohp 옆이면 ohp필름을 바꿔줘야 했고 그걸 사용하시는 선생님 수업이면 달려가서 기계를 가져와야 했고 조절해서 준비해 놓고. 크크크. 그런 시절도 있었네요. 뭔가, 딴 세상이야기 같네요. 시간이, 시간이 어찌나 빨리 흐르는지요. ^^ / 이래 봤자 이십 대 후반이지만요. 하하. 무슨 40대처럼 말하고 있네요. -_-;ㅋㅋ
    • 학창시절 반장이셨나봐요.
      아니면 OHP담당.. ^^;
      암튼, 뭔가 권력의 핵심부 냄새가 물씬 납니다. ^^;;
  8. 역시 주객전도가 되면 안되겠죠.
    말씀하신대로 메세지를 이렇게 뽑아낼 수 있는 정도의 실력과 완벽에 가까운 스토리텔링, 이러한 단순한 메세지가 필요한 환경이 뒷받침 되어야 하겠지요. 트랙백합니다. : )
  9. 저는 아직 이 책을 접하지 못했습니다만,
    경영서적 등등을 읽으면 새로운 아이디어, 접근방법을 소개하는 책들이 많더군요.
    이런 것을 읽으면서도 '도대체 이런게 실제로 통할까?'라는 의심이 들다가도 베스트셀러에 등록된 책일경우에는 '바로 이게 대세다, 이 방법은 만병통치약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모든 현상의 해결책으로 그 책에서 배웠던 방식을 적용하고 했습니다. 물론 성공할 때도 있었지만 현실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inuit님이 글에서 지적하신 부분이 바로 제가 경험했던 케이스였네요.
    반드시 정도(正道)가 어떤 것일까 라는 고민이 전제되어야 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동감입니다.
      정도가 무엇일까, 본질이 무엇일까, 핵심에 집중해야 합니다.
      나머지는 다 잔기술입니다.
      기본이 충실하면 응용력도 커지지요.
      덕분에 저도 다시 기본을 되새겨 보게 되어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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