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생일의 대미는 플라멩코 공연입니다. 플라멩코는 안달루시아의 집시에서 유래되었지만, 마드리드도 잘 합니다. 왕립 플라멩코 학교도 마드리드에 있지요.

스페인 하면 경험해야 하는 3대 문물이라면, 투우, 플라멩코, 축구입니다. 투우는 10월에 시즌이 종료되어 다음해 봄 되어야 재개되니 이번 여정과는 어긋났습니다. 축구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모두 머무는 동안에 홈경기가 없었지요. 그러므로 플라멩코는 반드시 체험해야할 스페인 문화였습니다.
안달루시아의 발원과 달리, 관광객 용으로 플라멩코 공연을 하는 곳을 타블라오(tablao)라고 합니다. 쇼도 보고 밥이나 술도 가볍게 마시는 극장식 식당입니다. 여행 전에 검색을 하니 두 군데가 물망에 오릅니다. 코랄 데 라 모레리아(Corral de la Moreria)와 코랄 데 라 파체카(Corral de la Pacheca)입니다. 모레리아는 왕궁 근처, 파체카는 북쪽 베르나베우 경기장 근처입니다. 둘 다 평은 좋은데, 시간대 고려해 숙소에서 가까운 모레리아를 택했습니다. 코랄 데 라 모레리아는 1956년에 오픈하여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곳입니다. 관광책자 소개로는 발레와 융합한 플라멩코를 선보인 1인자가 소속된 곳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세계의 유명 정치가, 영화배우, 가수 등 무수한 유명인사가 다녀갔습니다. 어느 타블라오든 예약은 필수입니다. 자리를 확보하기 쉽지 않습니다. 저도 전화 해봤더니 당일 예약은 당연히 안되고 이틀 후에나 자리가 있을 정도입니다. 비수기인데도 그러니, 미리 연락하길 잘했지요. 

가격은 음료 하나가 포함된 경우 35유로 수준, 음식까지 포함된 경우 60유로 수준입니다. 만만치 않은 가격이지요. 원래 플라멩코는 자정 넘어 즐기는 문화입니다만, 스페인 사람 아니면 어려운 일이고, 일찍자고 일찍 일어나는 관광객용인 10시 공연이 있습니다. 2부 공연은 12시에 시작합니다.
미리 예약하고, 또 30분 전에 도착했는데도 이미 좋은 자리는 꽉 찼습니다. 그나마 옆면에 무대 근처의 자리를 안내 받아 앉았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반신반의 했습니다. 관광객 상대의 쇼가 갖는 함의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스패니시하고 적당히 판타지를 만족시켜주면서 돈이나 살살 벌어가는 스타일말이지요.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고는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습니다. 공연은 토케(Toque, 기타) 셋, 칸테(Cante, 보컬) 셋, 그리고 단체 무용수 셋에 메인 남자 무용수, 여자 무용수. 이렇게 구성이 되었습니다. 듣기만 해도 집시의 정취가 넘치는 토케 연주, 그리고 그야말로 영혼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듯한 칸테, 거기에 더해 온 몸으로 희노애락을 표현하는 바일레(baile). 

이 모든게 정말 단순히 돈버는 공연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끊어내어 공유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찌나 감정표현이 절실하고 직접적인지, 보는 내내 한 눈을 팔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동화를 느낍니다.  
게다가 남자 무용수의 그 열정이란. 안토니오 반데라스를 닮은 그의 무용은 우미함과 정열을 쉴 새 없이 발산했습니다. 단 하나의 성적인 동작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섹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연에 온 여인들 넋을 잃습니다. 남자인 제가 봐도 매력적임을 부인할 수 없지요.

정말 재미난 건 그 다음입니다. 너무도 황홀한 공연에 모두들 자리를 떠날 때 아내와 저는 그자리에 충격을 받은듯 앉아 있었습니다. 와인을 홀짝이며 여흥을 즐기고 있었지요. 그런데, 웨이터가 제안을 합니다. 2부 공연에 자리가 여유있으니 원하면 더 봐도 좋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내는 2부 공연을 다시 돈내고 더 볼까 했는데, 예약없이 뒷자리만 차지하지 않냐고 이야기 나누던 참이었습니다. 그라시아스! 때려주고 무대 가까운 곳에 다시 자리를 잡았습니다. 웨이터는 팁을 두둑히 받았지요.

2부공연은 1부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일단 선수 구성이 똑같으니 이미 땀에 젖고 몸이 풀린 상태입니다. 12시 공연이라 관광객이 별로 없는 탓인지, 1부의 화려하고 다채로워야 하는 강박에서 벗어납니다. 그냥 돌아가면서 재주 부리듯 자신의 장기를 표현합니다. 그 진솔하고 강렬한 매력에 모두가 마법처럼 휩싸입니다. 심지어 노래부르는 이들은 술을 갖다놓고 목 축여가면서 구성지고 애절하게 노래를 뽑습니다. 아내와 저는 다음날 일찍 일어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연을 봅니다. 아니, 밤새도록 플라멩코만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눈 깜짝할 새 두시간이 지나고 끝이 나자 공연 본 저희가 다리에 힘이 쫙 풀립니다. 그만큼 강렬하게 몰입해서 공연을 보았습니다.

아내의 생일, 꿈같은 플라멩코 공연을 보고 생시처럼 나른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Trav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Barcelona 2010 Nov] 8. Gaudi & Picasso  (0) 2010.11.26
[Spain 2010] 7. Train to Barcelona  (0) 2010.11.25
[Madrid 2010] 6. Heartbeating flamenco  (4) 2010.11.23
[Madrid 2010] 5. Jamon jamon  (2) 2010.11.22
A sunny & foggy day  (2) 2010.11.20
[Madrid 2010] 4. Toledo, the reason to visit Madrid  (7) 2010.11.19

WRITTEN BY
Inuit
@inuit_k / CxO / Author ("가장 듣고 싶은 한마디 YES!") / Making better world, every minut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  4개가 달렸습니다.
  1. 저도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모두 갔었는데, 플라멩고 공연 한 번 못봤네요. (길거리 공연은 한 번 봤군요) 그 땐 배낭메고 돌아다니기 바빴는데, 각 도시의 술집 한 군데식 가자는 사전 계획을 지키기에도 돈이 빠듯. ^^;

    이젠 금전적인 여유는 있으나, 떠나기가 쉽지 않은. 또 기회가 있겠지요. 부럽습니다. ^^
    • 원래 그렇지요. 시간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또 대부분은 둘 다 없고.. ^^;
  2. 그간의 눈팅을 용서하시고 옐로카드를 거둬주시옵소서 후후후후.
    다음주에 아이폰오면 폭풍 댓글을 달겠습니다. -_ㅜ
    그러나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하는 너무 빠른 소통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는 저는 촌스러운 사람일까염.
    스페인..저도 꼭 가보고 싶습니다. 이런 공연을 직접 보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이 되지 않는군요. 사모님(?)께서 엄청 감동하셨겠습니닷.
    • 올해가기 전까지 두장 먹지 않으면 리셋된다는.. ^^

      근데, 회사에서 아이폰 써도 되나요?
secret
스페인하면 유명한게 여럿 있지만 하몽(jamon)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신선한 돼지 뒷다리를 겨우내 바람에 숙성시킨 생햄의 일종입니다. 제법만 보면 우리나라의 과메기와도 좀 비슷하지요.

식성 독특하기로는 남부럽지 않은 우리집 아이들입니다. 곱창, 순대는 물론 과메기, 홍어까지 다 좋아합니다. 우리나라 사람 평균 입맛에는 잘 안 맞을정도로 꼬리꼬리한 살라미도 매우 잘 먹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몽은 아이들의 로망입니다. 이번에 스페인에서 한껏 먹었지요.
특히 우리로 치면 식육식당 같은 하몽 세르베세리아(cerveceria)에서 함께 한 저녁은 잊을 수 없습니다.
하몽도 종류가 많습니다. 일반적인 하몽은 하몽 세라노(Jamon serrano)라 합니다. 이보다 상급은 이베리아 산 흑돼지로 만든 하몽 이베리코(jamon iberico)지요. 하몽 이베리코만 해도 1kg에 50유로를 훌쩍 넘습니다. 이보다 더 귀한 것은 하몽 이베리코 베요타(jamon iberico bellota)입니다. 도토리만 먹여 키운 이베리코 돼지의 뒷다리로 만들었지요. 1kg에 거의 100유로 가까이 갑니다.
이게 하몽 이베리코입니다. 대단히 맛나게 생겼지요.
그러나..
하몽 이베리코 베요타의 저 마블링이란. 그냥 이베리코도 다른 어느 하몽보다 맛났지만, 베요타는 그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야채가 풍성한 스페인 답게, 질좋은 샐러드와 너무도 매력적인 토마토 바른 빵, 그리고 와인은, 하몽과 함께 정신 아득한 이국의 아름다운 정찬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Trav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Spain 2010] 7. Train to Barcelona  (0) 2010.11.25
[Madrid 2010] 6. Heartbeating flamenco  (4) 2010.11.23
[Madrid 2010] 5. Jamon jamon  (2) 2010.11.22
A sunny & foggy day  (2) 2010.11.20
[Madrid 2010] 4. Toledo, the reason to visit Madrid  (7) 2010.11.19
[Madrid 2010] 3. Museo Nacional del Prado  (2) 2010.11.18

WRITTEN BY
Inuit
@inuit_k / CxO / Author ("가장 듣고 싶은 한마디 YES!") / Making better world, every minut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  2개가 달렸습니다.
  1. 사진과 설명만 들어도 군침이 입안 가득 고이네요^^
    예전 호주에서 저런 다리 비스무리한 녀석들을 보곤 도전해 보지 못한게 조끔 아쉽네요(그때는 돈이없어서 못먹었어요T.T)
    아침도 안먹고 출근했는데 배고파진당^^ 책임지세욧ㅎㅎ
secret
마드리드에서 수 많은 재미가 있었지만, 단 한 가지 기억만 남기라면 주저없이 고를 여정이 톨레도(Toledo) 관광입니다. 물론 톨레도는 마드리드 이외에서도 접근이 가능하지만, 빠른 기차로 30분 거리라서 마드리드가 접근성이 가장 좋습니다. 
톨레도는 우리로 치면 경주에 해당하는 도시입니다. 스페인의 이전 수도입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 쌓인 천연의 요새인 탓에 그 군사적 가치가 컸고, 로마시대부터 유명세를 떨쳤던 톨레도입니다. 
로마가 공략할 때 하도 항복을 하지 않아, 인내가 대단하다 하여 톨레툼(Toletum)이라 부른데서 알 수 있듯, 그 지정학적 의미와 스페인 특유의 저항기질이 잘 나타난 도시지요. 
서고트의 이베리아 정복 이후, 톨레도는 서고트 왕국의 수도로 출발했습니다. 그 이후, 이슬람의 이베리아 진출 후 이슬람 지배하에 들어가지요. 이슬람 정권은 지식전문가로 유대인을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톨레도를 읽는 키워드는 다문화입니다. 카스티야 왕조의 기독교, 유대인, 이슬람의 혼합 문화이니까요.
톨레도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마드리드 천도 이후의 모습 그대로, 아직도 고스란히 보존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낙안읍성이나 해미읍성 보면, 작은 촌락하나 그대로 보존하기도 힘든데 말입니다.

톨레도에 가려면 마드리드의 중앙역에 해당하는 아토차(Atocha)역에서 출발합니다. 당일 표 구하기는 불가능에 가깝고 사전 예매가 필수입니다.
스페인 국철인 renfe 중 톨레도행 Avant를 타면 70km를 30분에 주파합니다. 열차는 쾌적하고 빠릅니다.

톨레도 관광은 소코도베르(Zocodover) 광장에서 시작하는게 무난합니다. 기차역에서 택시로 5유로 정도, 10분도 소요되지 않으며, 대중 교통이 많습니다.

제가 가장 톨레도에서 가장 좋아했던 부분은 골목입니다. 건물과 건물사이, 막힌듯 트이고, 끊일듯 이어지며 굽이굽이 펼쳐진 골목은 정말 동화같이 아름답습니다. 어쩌면 이 도시 전체를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이유가, 건물만 지정하면 무용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 여백인 골목이 더 중요한 의미공간이니 말입니다.

다시 보면, 고도시 답게 석조건물로 빽빽히 들어선 톨레도의 위엄이 재개발을 어렵게 해서 고스란히 보존이 된 탓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 살기에는 좀 불편한 구석도 있습니다. 작은 경차조차 집 앞에 들어가지 못하니 말입니다. 실제로 군데군데 비어있고 새로 입주를 포기한 집도 많이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만큼은 이대로 두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아내는, 톨레도가 너무 아름다워서 관광객보라고 꾸며 놓은듯 하다고 찬사를 보낼정도였습니다.
스페인에서 꼭 마셔볼 술이라면 저는 와인, 상그리아(Sangria), 셰리주(Xeres) 그리고 카탈루냐의 카바(Cava)를 꼽습니다. 특히 레드 와인에 레몬이나 오렌지로 풍미를 더한 상그리아는, 이렇게 오래 걸은 여행객에게 원기와 활력을 회복시키는데 딱입니다.

정갈한 옛도시이자, 관광객이 줄을 잇는 도시답게 구석구석 볼거리가 많습니다.
대항해시대 해본 분은 잘 알겠지만, 톨레도 특산은 검입니다. 예전에 명성을 날렸더랬지요.

톨레도의 중심을 잡아주는 대성당 카테드랄과 정부청사가 있는 마요르 광장에서, 여행 전부터 상상하던 멋진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냥 벤치에 앉아 아름다운 성당을 찬찬히 살펴보고, 하릴없이 햇살 받고, 광장 지나다니는 사람들 눈맞추고 웃음 주고 받고, 짧지만 시간 구애 받지 않는 인상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정말 유럽 온 기분이 물씬 났습니다. 

나머지 시간 동안은 유대인 지구의 옛 시나고그와 엘 그레코 집을 들러봤습니다. 톨레도는 엘 그레코의 도시이기도 하지요. 그가 400년전에 그린 톨레도 전경이 지금 사진과 똑 같다는 점으로도 유명합니다.

먹는 것으로 따지면, 톨레도의 특산은 마사 빵(Mazapan)입니다.
이슬람에서 유래된 아랍풍 과자입니다. 아몬드 가루와 달걀 노른자로 만듭니다. 하도 유명해서 톨레도 어딜 가나 팝니다. 수녀님들이 직접 구운 빵을 샀는데, 솔직히 너무 달아서 제 입맛에는 강했습니다. 진한 커피와 먹으면 잘 어울릴 듯 합니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예매한 마드리드 상행선을 타야할 시간입니다. 하지만 톨레도가 너무 정겹고 좋아서, 차마 발이 안 떨어집니다. 좀 더 자유로운 상황이라면 그냥 톨레도에서 숙박잡고 하루 머물면서 밤의 톨레도를 물리도록 즐기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래도 인생은 초콜릿 박스 같은 것. 내일 또 어떤 재미난 일이 펼쳐질지 모르는데 여기 주저 앉아 있기만 할 수는 없지요. 다시 기운을 내어 마드리드로 떠납니다.

이제 점점 스페인에 우리 가족은 슬슬 동화되어 갑니다. 내일의 여정이 또 기대됩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Trav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Madrid 2010] 5. Jamon jamon  (2) 2010.11.22
A sunny & foggy day  (2) 2010.11.20
[Madrid 2010] 4. Toledo, the reason to visit Madrid  (7) 2010.11.19
[Madrid 2010] 3. Museo Nacional del Prado  (2) 2010.11.18
[Madrid 2010] 2. Far away Spain  (4) 2010.11.17
[Osaka 2010] So lonely  (2) 2010.11.16

WRITTEN BY
Inuit
@inuit_k / CxO / Author ("가장 듣고 싶은 한마디 YES!") / Making better world, every minute.

트랙백이 하나이고 , 댓글  7개가 달렸습니다.
  1. 아 톨레도! 보석같은 곳이죠. 메추리 요리가 유명하다고 해서 먹었는데 너무 적은 양에 실망을 금치 못했습니다. 골목을 누비다가 길을 잃어서 돌아가는 버스편을 놓칠뻔 한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군요.
    • 아.. 저도 메추라기 요리를 먹어보려 했는데, 기회가 없었네요. (사실 원어 이름을 잘 못 외워서.. ㅋㅋ)
      그리고 골목에서 정줄 놓으면 차 놓치기 딱이겠더군요 정말. 저희도 복귀할 때는 대로로 왔습니다.
  2. 건물의 생김새가 마음에 드는데요.
    아드님의 점프 솜씨가 좋습니다.
  3. 우와 정말 멋지군요... 디지털 소책자로 만들어도 충분할 내용들인 것 같습니다. 아이들도 많이 컸네요. 12월에 한번 망년회 하시지요. ^^
secret
유럽 3대 미술관으로 불리우는 프라도 국립 미술관(Museo Nacional del Prado)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아토차(Atocha)역에 들러 내일 여행할 톨레도 기차표를 미리 사놓고 프라도로 이동했습니다. 미술관은 역에서 15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인데, 그만 지도를 잘못 봐서 엉뚱한 투르로 한참 돌았습니다. 이날의 실수로 인해, 그 뒤로는 아이폰 오프라인 지도와 GPS를 활용하게 되어, 빠르고 효율적으로 길을 찾아다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사람 걱정스럽게 만들던 비가 그치니, 해가 반짝이는 유럽의 거리는 걷기에 그저 딱 좋습니다. 장중하고 음울한 중부 유럽의 도시와 달리 마드리드는 강한 햇살과 파란 하늘, 날렵한 건물들이 상쾌한 풍경을 연출합니다.

아무튼, 지도보기에 실패한 여파는 큽니다. 결과적으로 예상보다 늦게 미술관에 도착했고, 팍팍한 다리도 쉬고 마른 목도 축여야 하니 가자마자 카페에서 쉬어야 했습니다. 이래저래 한시간 반 이상을 예정과 달리 날려버리니, 오후에 예정했던 왕궁 투어는 시간상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프라도 미술관에서 충분히 즐기기로 마음을 바꿨지요. 이 또한 넉넉한 일정이 주는 기분좋은 유연성입니다.
프라도에는 대단히 많은 작품이 있지만, 거칠게 말하면 고야(Goya), 벨라스케스(Velasquez), 그리고 엘 그레코(El Greco)의 3인이 메인입니다. 특히 벨라스케스의 시녀들(Las Meninas)은 나중에 보는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작품의 근간이 되는지라 매우 흥미로운 감상이었습니다. 

항상 그렇지만, 사람 키를 넘는 대작을 실제로 보는 감상은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입니다. 어떤 그림은 살아있는듯한 생동감으로, 어떤 그림은 몰아치는 격정으로 색다른 감흥을 줍니다. 힘찬 붓질 자국을 보면 작가가 바로 근처에 있을듯한 착각마저 느껴집니다. 결코 화보집에서 느끼지 못하는 느낌이지요.

아이들도 정말 즐겁게 둘러 봤습니다. 우리나라에 오는 기획전 작품의 양과 질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도 새삼 깨달았겠지요. 온 김에, 실컷 눈에 담고 마음에 채우라고 이야기해 줬습니다.

전반적으로, 프라도는 작품은 많은데 다소 단조로운 느낌도 있습니다. 한 이유는 프라도의 프라이드인, 약탈품 없는 순수 수집이란 점입니다. 다른 이유는 아무래도 미술사적으로 현대 미술 이전에는 유럽미술의 변방인지라 유명화가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탓입니다. 그 두가지 이유로 소수 작가의 다량 작품이 있습니다. 한 작가의 다양한 모습을 보는 자체로 즐겁지만, 다품종의 "교과서에서 본 그림" 찾는 분에겐 덜 흡족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길쭉하니 늘어진 엘 그레코의 화풍이나, 유명했던 여러 왕과 여왕, 공주의 초상화를 보며 스페인 역사를 더듬어 보는 시간은 매분매초가 충만하게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망치로 맞은 듯한 감동을 받은 고야의 '1808 5월 3일 프린시페 피오 언덕의 학살'은 평생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화집에 나온 사진과 달리 실제 작품은 더 많은 오브제와 레이어, 감동이 있습니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욕심같아선, 미술관에서 빨리 서둘러 나오면 오후에 굵직한 명소 한 곳은 들르겠지만, 다리 아파 힘들때까지 충분히 관람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늦은 점심을 먹었지요.
엄청난 크기의 레티로(Retiro) 공원을 가로질러 정문 근처에 봐둔 식당이 있었습니다. 미식으로 유명한 북부 스페인 식으로 그릴 요리를 한다는 집입니다.
보틴은 너무 상업적이어서 좀 조용한 곳으로 잡았는데, 여긴 너무 현지스럽더군요. 들어갔더니 떼로 방문한 이방인에 손님이나 종업원이 너무 놀란 모습. 저는 고기 많이 안 좋아합니다만, 체력 보충 겸 육식으로 하루의 체력소모를 좀 보했습니다.

해 저물어 가는 상황에서 적당한 방문장소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숙소에 들어가면 다들 자 버릴게 뻔하지요. 그래서 어제에 이어 다시 솔 광장(Puerta del Sol)에 갑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유럽의 밤거리인데 그냥 걷기만 해도 좋잖습니까.

게다가, 정부청사가 있어 스페인 도로의 시발점인 포인트 제로가 있습니다. 여기를 밟으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는 소환스킬이 붙어있는 토템으로 알려졌지요. 우리 가족도 막연한 소망을 담아 콕 밟아주고 왔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Trav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A sunny & foggy day  (2) 2010.11.20
[Madrid 2010] 4. Toledo, the reason to visit Madrid  (7) 2010.11.19
[Madrid 2010] 3. Museo Nacional del Prado  (2) 2010.11.18
[Madrid 2010] 2. Far away Spain  (4) 2010.11.17
[Osaka 2010] So lonely  (2) 2010.11.16
[Spain 2010] 1. Slow for Spain  (6) 2010.11.15

WRITTEN BY
Inuit
@inuit_k / CxO / Author ("가장 듣고 싶은 한마디 YES!") / Making better world, every minut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  2개가 달렸습니다.
  1. 발글의 주인을 상상하는 증거룸을 주시넹욤ㅎㅎ
    제게 만약 한쿡을 벗어날 기회가 생긴다면 동네마다 다니며 커피를 맛 보고 그 맛을 기억하려고 짧은 기억력을 늘려볼려고 애쓸 것 같습니다요 하하하
    • 커피 순례.. 이것도 정말 재미난 테마겠네요.
      그런데 유럽 커피는 다소 강하고 진합니다.
      제 아내도 커피 좋아하고 진하게 마시는 타입인데, 에스프레소는 독해서 못먹겠다 하더군요. 일반 커피로도 우리나라 에스프레소 이상입니다. ^^
secret
마드리드까지는 정말 머나먼 길입니다.

이번 여행은 도하 경유입니다. 인천에서 도하까지 10시간, 세시간 경유 후 다시 약 여덟시간을 비행합니다. 그나마 아이들이 커서 걱정은 덜 합니다. 그리고 중동노선 덕도 많이 봤습니다. 두바이나 도하 등 중동 노선은 자정 근처에 출발지요. 그래서, 출발 전에 좀 피곤하긴 하지만, 비행기 타면 숙면을 취하기 쉽습니다. 저도 비행기에서 잠을 잘 못자는 편인데, 한주의 끝인 금요일이라 피로도도 심했고, 시간대도 적당하여 다섯시간이나 푹 잘 수 있었습니다. 

항공사를 택한 이유도 그랬지만, 카타르 항공은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럽습니다. 기내 시설도 좋고 음식도 훌륭합니다. 돈많은 카타르답습니다. 오히려, 기내 개인용 AV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 아이들이 영화보고 게임한다고 잠을 덜 자는게 문제였지요. 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여행해서 시작부터 깔끔했습니다.

아무리 편해도 집에서 나와 만 24시간 이상 걸린 여정입니다.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하니 꽤 지칩니다. 호날두나 무리뇨 감독같은 레알 마드리드 선수의 입국 장면에 많이 나오는 그 바하라스(Bajaras) 공항인데, 그냥 어서 짐 찾고 숙소로 가고 싶은 마음만 굴뚝입니다.

호텔에 짐을 풀고, 간단히 샤워를 하면서 피로를 씻어냈습니다. 이제부터가 요주의 시간입니다. 오랜 출장 경험 상, 도착 직후가 가장 위험한 시간대임을 잘 알고 있지요. 대개 너무 피곤해서 눈조차 뜨기 힘들고 식욕도 없습니다. 잠깐 눈만 붙이고 싶지요. 하지만 지금 눈 붙이면 시차적응은 힘들어집니다. 유럽 현지시간으로 새벽 1~2시에 잠 깨서는, 뜬 눈으로 밤새고, 다시 낮에 해롱대다가 이내 초저녁에 고꾸러지기를 반복하지요. 시차적응이 안되면 낮에 뭘 봐도 덜 재미나고 쉬이 지칩니다.

그래서, 아이들 오느라 수고했다 격려해주고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 여행 전 스페인 공부할 때 낯익은 마요르 광장에 갑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마드리드는 비가 추적추적 내립니다. 비가 그리 많지 않을거라는 가정이었는데 비는 여행의 걸림돌입니다. 행동반경도 줄어들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줄어듭니다. 무엇보다 풍경도 칙칙하고, 기분도 축축하고, 사진도 침침합니다.

다행히 해질 무렵 마요르 광장은 조명이 켜지면서 물빛이 찬란해지니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가 와서 볼 수 있는 촉촉함이 좋았지요. 다만, 예상 외로 기온이 낮아 식구들 건강이 염려스럽습니다. 긴 비행으로 피곤이 극에 달해 면역력이 낮아진 상태입니다. 감기라도 걸리면 나머지 여행이 모두가 괴롭지요.

마요르 광장 뒷편의 산 미구엘 시장(Mercado San Miguel)에 갔습니다.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재래시장과 달리 유리건물 안에 말끔이 위치한 시장은, 정말 보는 자체로도 즐겁습니다. 그만큼 관광객이 많기도 하지요.

이제 슬슬 첫날을 마무리 지을 시점입니다. 시장 근처에 있는 보틴(Botin)에 갔습니다. 헤밍웨이가 단골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1725년 시작해 기네스북에 오른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이라서 유명합니다. 
스페인 현지인의 식사 시간은 저녁 아홉시가 넘어야 슬슬 시작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관광객이 많은 도시는 그보다 빨리 하지요. 보틴은 여덟시에 문을 엽니다. 지도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가까운 탓에 이동시간을 잘못 계산해서, 예정보다 훨씬 빠른 7시 45분쯤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그 덕에 일착으로 얼결에 줄을 서게 되어 예약없이 자리를 바로 받아서 오히려 도움이 되었습니다. 
15분의 힘이 그리 클 줄 몰랐습니다. 우리 밥먹기를 밖에서 줄서서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 보며 행운이 함께하는 여행을 생각했습니다.
우선 아내와 저는 가장 고대했던 스페인 와인을 한잔 마십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스페인 와인은 저렴하고 질 좋습니다. 맥주 매니아인 저이지만, 스페인에서라면 단연 와인을 마셔야 합니다. 특산이니까요.
다른 요리도 먹었지만, 보틴에서 유명한건 코치니요(Cochinillo)입니다. 생후 3주된 새끼돼지 통구이입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육즙가득 부드러운 음식입니다. 실제로 원산지는 마드리드 인근 도시인 세고비아입니다. 여기가서 먹으면 정말 맛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부드러운지, 세고비아에선 접시로 고기를 자른다고 하지요.

보틴의 코치니요는 관광객 용이라서 다소 망측한 머리부분은 떼어내고 나옵니다. 그건 좋은데, 맛도 그리 좋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쁘지 않은건 확실한데, 최상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마요르에서 가까운 위치와 브랜드상 관광객이 몰려 가격이 매우 비쌉니다. 마드리드 가는 분께는 추천하고 싶지 않네요.
그래도, 아이들은 책에서 보며 갖던 코치니요에 대한 로망을 실현했고, 무척 맛나게 먹었습니다. 하지만, 식사 후반 급격한 체력 저하로 급기야 식당에서 졸기에 이릅니다.

이만하면 성공한 첫날입니다. 택시타고 바로 숙소로 복귀하여 단잠을 재웠습니다. 그대로 잠든 아이들은 다음날 아침까지 푹잔 후, 바로 시차적응하는 기적적인 적응력을 보였지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Inuit
@inuit_k / CxO / Author ("가장 듣고 싶은 한마디 YES!") / Making better world, every minut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  4개가 달렸습니다.
  1. 저도 마드리드에 있을 때 마요르 광장 근처 숙소에 묵었었죠. 사진을 보니 작년의 기억이... :) 가족과 함께 여행이라니 정말 부럽습니다. 멋지세요!
    • 마요르 광장 근처에 숙소가 많은듯 하더군요.
      카미노 이후에 마드리드로 갔었나 보군요. ^^
  2. 반가운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아지네요^^

    저도ㅠ직업병인가봅니당.
    과일들이 나오는 사진만보면 저랑 친한 빨간색의 그 녀석들을 찾게 되니 말입니다. ㅎㅎ

    다음 이야기도 기대 만빵 ! ^^
    • 네. 스페인은 특히 토마토가 아주 질 좋습니다.
      토댁님도 직접 비교체험을 하시면 좋을텐데.. ^^
secret
이번 여행 중 아내의 생일이 있습니다. 아내도 이번에는 생일이 있는걸 알고는 있지만 나름 그랜드 투어니까 생일이라고 별 다른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와 아이들은 저번 자카르타에 이어 또다른 비밀 작전을 준비했지요.

작전개요
여행 3주전 쯤, 아이들과 몰래 대화중 엄마 생일을 어떻게 멋진 추억으로 만들지 의논을 했습니다. 금번 깜짝 파티의 컨셉은 '여행지에서 따뜻한 밥상 차려주기'입니다. 

프로젝트 코드
우선 작전명이 필요하지요. '밥'이란 점과 당시 성남일화의 알 샤밥 경기가 화두인 때이므로 자연스럽게 이중성에 의한 보안이 지켜지는 '알샤밥'을 코드명으로 했습니다.

노래 연습
매번 듣는 평범한 생일 축하 노래는 좀 그렇다고 생각하던 중, 딸이 아이디어를 냅니다. 엄마가 평소에 좋아하는 'You are my sunshine'을 부르면 어떠냐는 겁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1절은 아들이, 2절은 딸이, 마지막은 저까지 모두가 합창입니다. 영어 노래 가사를 외우고 음정 연습하느라, 틈틈이 준비하는 내내 키득키득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통신 확보
기밀 유지에 가장 중요한 건 비밀 통신 라인을 유지하는게 기본. 이제 아이들도 그 쯤은 다 압니다. 우선 비밀 회의와 노래연습은 아내가 운동하러 간 사이에 합니다. 나머지 평상시 연락은 각자의 아이폰, 아이팟에 있는 gmail로 합니다. 그 외에 엄마 없이 아빠만 스킨십을 갖는 시간인, 잠자리 굿나잇 인사 시간에 살짝 귀엣말로 진척을 점검합니다.

물품 확보
행사의 메인 아이템인, 햇반과 끓는 물 부어 만드는 냉동건조 미역국은 아이들이 조달합니다. 아들의 시험날을 잡아, 둘이 산책한다고 나가서 사왔습니다. 물품 확보후 컨펌 전화도 잘 하더군요. 


물품 은닉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물건을 숨기는게 어렵습니다. 집안에 엄마의 손길과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이 어디 많겠습니까. 하지만, 집안의 숨은 구석은 아이들의 공간인 것. 이번에도 아이들이 좋은 의견을 많이 냈습니다. 물품을 아예 집으로 들이지 않고, 차에 있는 아이들만의 공간에 숨겼습니다. 그리고 여행 떠나는 날, 딸 아이가 고의 로 출발을 지연시킵니다. 자연스럽게 아빠와 아들은 먼저 짐을 갖고 집을 나서고, 딸아이가 확보한 3분 동안 남자방 여행가방에 물품을 옮겼습니다. 여행은 남자방, 여자방 두방을 쓰므로 남자짐에 있는건 비행 후 내내 비밀스럽게 숨기기가 가능하지요.

위기
마지막에 서두르다보니 작은 실수가 있었습니다. 자동차에 가서 생각하니 숟가락을 안 챙겨 나왔습니다. 급히 후방의 딸에게 연락하여 몰래 숨겨 오는데 성공. 그러나, 젓가락은 못 가져왔습니다. 다행히, 비행기 기내식에 젓가락이 나옵니다. 덤으로 진공포장 김치까지 아이템 획득입니다. 아이들과 비행중 좌석에서 의미가 가득한 눈웃음을 주고 받았습니다.

마드리드의 시련 1
호텔에 와보고 깜짝 놀란게, 웬만한 호텔이라면 다 있을 전기 포트가 없습니다. 물을 끓일 수가 없는겁니다. 도착하자마자 아이들과 함께 어찌나 놀랍고 실망스럽던지. 이 문제는 뜨거운 물 중탕으로 해결키로 했습니다.

마드리드의 시련 2
처음 설계 당시 깊이 생각하지 못한 문제인데, 미역국을 담을 그릇이 없습니다. 도착해서 이튿날에야 발견했지요. 그래서 그릇을 구하러 밤에 몰래 마트에 나갔습니다. 마드리드의 상점들은 왜 그리 빨리도 문을 닫는지. 일정 마치고 티안나게 일찍 들어와 이틀을 시도했지만 그릇 구하기에 실패했습니다. 급기야 Plan B를 발동합니다. 당일 아침에 호텔에서 그릇을 빌리리고 했습니다.

마드리드의 시련 3
가기 전부터 가장 걱정했던 사항은 현지에서 케익 구하기가 쉽냐는 거였습니다. 케익 파는데야 당연히 있겠지만, 밤에 몰래 나가 살 만큼 가까운 거리에, 늦게 문 연집이 있어야 하니 쉽지 않은 제약조건이지요. 다행히, 호텔 건물에 빵집이 있어 안도를 했습니다. 전날 아들과 몰래 나가서 작은 케익과 초까지 성공적으로 구했습니다. 어찌나 기쁘던지.. 룰루랄라 휘파람 불며 호텔에 들어오다가 생각해보니, 초를 켤 방법이 없습니다. 라이터가 없으니 말입니다. 빵집부터 해서 성냥을 이리저리 물어보며 구해봤지만 요즘 그런거 구하기가 쉽나요. 아깝지만, 호텔 기념품 가게에서 1유로짜리 라이터를 샀습니다. 그나마 늦은 시간에 물건 팔아주는게 고맙습니다.

D-day
평소처럼 여덟시에 아침먹으러 내려가기로 약속된 상황입니다. 저는 다섯시, 아들은 여섯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합니다.
한시간 전부터 뜨거운 물을 계속 갈아가며 미역국물을 준비하는 아들 모습이 사골국이라도 우려낼 정성입니다.

식당문이 여는 7시반. 아들과 식당에 내려갑니다. 말도 안통하는 주방 아저씨에게 집사람 생일이고, 잠깐 쓰고 가져갔다가, 다시 갖다 놓겠다고, 손짓 발짓 했지요. 사람 좋은 스페인 아저씨 답게 활짝 웃으면서 가져가라고 흔쾌히 손짓합니다. 가장 어려운 부분을 해결했습니다. 아니면 plan C인  양치컵에 미역국을 담을 뻔 했습니다. -_-

전날 밤 준비한 케익과 촛불에 1유로짜리 라이터로 불도 켰습니다.

이제 준비 끝. 아차.. 
여덟시 약속이라고 해서 식구사이에 분단위로까지 약속을 지키지는 않습니다. 여자방에 전화해서 딸에게 상황 물어보니 정각에 오긴 글렀습니다. 아들은 여덟 시에 딱 맞춰서 미역을 뜨거운 물에 이미 풀어 놓은 상황입니다. 결국, 준비 안 되었어도 당장 우리방에 오라고 급히 이야기했습니다.

불이 꺼지고 어두컴컴한 방.
촛불 두개. 
희미하게 보이는 케익. 
이제 서서히 눈에 들어오는 밥 
그리고 뜨끈한 미역국. 

아내가 점점 놀람이 커지는 순간 아들의 선창. 

You Are My Sunshine
My only sunshine.
You make me happy
When skies are grey.
You'll never know, dear,
How much I love you.
Please don't take my sunshine away..

아내는 왈칵 울어 버렸습니다.

알샤밥은 실패했나 봅니다. 
엄마를 햇살처럼 환히 
웃게 해주려 했는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日常 > Project L'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생 남을 2010의 추억들  (10) 2010.12.19
논리의 역습  (6) 2010.11.28
프로젝트 알샤밥: 마드리드에서 미역국을  (15) 2010.11.12
딸, 매출목표 달성하다  (20) 2010.11.05
세계 명문가의 독서교육  (10) 2010.10.24
문화의 상대주의와 기준  (0) 2010.10.22

WRITTEN BY
Inuit
@inuit_k / CxO / Author ("가장 듣고 싶은 한마디 YES!") / Making better world, every minute.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  15개가 달렸습니다.
  1. 보는 사람까지 눈시울이 왈칵할 정도로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시는 모습이 부럽습니다. ^^
  2. 오라버니 너무 감동적이에요~ 와우!저두 결혼하면 많은 어드바이스 부탁드릴께요 ^^
  3. 앙앙앙~~~~
    감동으로 전해 옵니다. 온 가족이 행복했을 그 순간이....^^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ㅎㅎ
    촛불의 숫자가 눈에 팍 꽂히는 걸요..ㅎㅎ
  4. 아 정말 감동입니다 ^ ㅡ^
  5. 아-최고입니다. 일,육아,생활,이벤트 기획까지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6. 비밀댓글입니다
  7. 언니 생일 축하 드려요~~ 너무 감동적인데요.. 정말 비싼 선물보다도 값진 생일 파티와 선물이네요.. 연주는 surprise가 곧 있을 예정인데, 오라버니 사이트에 와서 신고했네요.. ^^
    수아, 시언이도 보고 싶어요.. 조만간 식사 기회 부탁드려요..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