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uit Blogged
쿼런틴 본문
1️⃣ 한줄 평
그렉 이건(Greg Egan)이다. 30년전 책이다.
♓ Inuit Points ★★★☆☆
어느 날 지구가 거대한 암흑 장막에 갇힙니다. 영문도 모른채 인류가 우주로부터 쿼런틴, 격리 당했습니다. 과연 무슨 일일까요. 이 장대한 설정은 이내 미시로 내려옵니다. 한 인간이 양자 법칙을 따라 의문을 풀어갑니다. 그렉 이건의 대표 수식어인 경이감(sense of wonder)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말미가서 '느껴'집니다. 하드 SF 혹은 사이버펑크의 교과서 같은 책입니다. 물리학 토대가 정설에서 벗어나 몰입감이 떨어지지만, 어차피 과학적 허구라고 받아들이면 상당히 재미난 상상력입니다. 별 셋 주었습니다.
❤️ To whom it matters
- SF 좋아하시는 분
- 마이너리티 리포트 좋아하시는 분
- 타노스, 닥터 스트레인지의 세계관이 딱 내 취향인 분
🎢 Stories Related
- 그렉 이건은 하드 SF의 거장입니다.
- 테드 창이 이건에게서 영감 받았다고 책 소개에 써있습니다.
Quarantine
Greg Egan, 1992
🗨️ 좀 더 자세한 이야기
지구가 버블이라는 암흑 스피어에 갇히는 기이한 일이 예사로이 일어나고, 과학 기술도 연도에 맞춰 상당히 발전한 근미래 어느 날, 어느 탐정의 이야기입니다.
몇번의 놀라운 대회전과 반전을 통해 평범한 주인공이 버블 문제의 이유를 설명하는 화자가 됩니다. 국면의 전환이 점층적이며 놀라워 상당히 재미난 내러티브입니다. 같은 이유로, 어떤 언급도 의도치 않은 스포일러가 될수도 있습니다. 작품의 주요 전개 및 반전은 최대한 숨기겠지만, 논의 포인트 자체로도 민감한 분은 내용을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스포를 원치 않으면 돌아가기]
우선, 책이 1992년 작품이란걸 잊지 않아야 더 재미납니다.
시작부터 쏟아지는 디테일한 세계관에 입이 딱 벌어집니다. 미래학자 갈아 넣은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주었던, 그럴듯한 경이감과 실현되어 가는 충격에 버금갈 설정들이 흥미를 휘어잡고 갑니다. 모드(mod)란 뇌신경 재배치를 통한 정신 기능강화가 쿼런틴 세계의 도구입니다. 유료 앱처럼, 돈주고 기능을 장착할 수 있습니다. 자는 동안 오감으로 메시지를 받거나, 내 위치를 계산해주거나, 감정을 제어하고 신체를 자동보호하여 수행 능력을 극대화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알코올 없는 술을 마시고도 마신만큼의 도취감을 주는 장치도 있습니다. 딱 지금의 스마트기기 앱 인데, 저땐 스마트폰 조차 없었으니 발칙한 상상력이죠.
반면 확산(smear)과 수축(collapse)이라는 양자역학의 관측문제 해석은 이론 초기의 불비함 위에 서 있습니다. 양자가 확률적으로 존재하지만 관측할 때 확정된다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과도히 적극적으로 해석합니다. 관측으로 위치가 확정되는 순간 가능성의 공간인 나머지 세계가 파괴된다는 세계관입니다. (옮긴이의 해설에 따르면, 그렉 이건은 추가적인 양자역학 공부를 통해, 다중세계 가설을 지지하는 쪽으로 전향했다고 합니다.)
사실, 반지의 제왕도 조마조마하게 보고, 인어가 다리 생기는 이야기도 흠뻑 즐기는 마당에, 소설의 주어진 설정을 따라 가는건 약간의 노력이면 가능하긴 합니다. 그래도 양자역학에 따른 파멸적 확정이라는 과학적 결함은 제목과 세계관과 심지어 결말까지 다 오염을 시키니, 30년 뒤 독자입장에서 아쉬운것도 사실입니다.
그보다는, 책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가 중요하겠죠.
SF의 중대한 역할 중 하나가, 과학적 법칙을 비틀어 만든 허구적 설정에서 도드라지게 보이는, 현실의 비밀과 진실에 있다고 생각해요. 쿼런틴도 그러합니다. 책의 상부구조 물리법칙이 양자역학이라면, 다른 하부구조는 뇌과학입니다. 모드죠. 모드를 통해 감정이 배제된 상태에서 했던 주인공의 결정이 몇가지 나옵니다. 냉철하고 합리적입니다. 구질구질한 감정이 없으니 신도 필요 없죠.
감정이 거세된 판단이 과연 행복한지 책은 묻습니다. 감정이 그대로인 주변인은 주인공 닉에 놀라고, 닉은 그 경지를 느껴보지 않은 사람들의 순진하고 하찮은 소리가 이해가지 않습니다.
정체성 바꿔치기는 어떨까요. 충성 모드에 의해 주인공의 철학이 바뀝니다. 모드 설치는, 인지부조화의 마찰과정을 거친 세뇌처럼 고통스럽거나 수치스럽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평생 그리 믿고 살아온마냥 닉은 행복하고 자발적으로 흔쾌히 임무를 수행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만성적 외부적 조작의 총합인데, 이 조작이 초단기면 모드고, 장기라면 자연적 정체성일까요. 닉의 세상에서 모태신앙과 '종교 모드'는 구분 가능할까요.
또한 책은 자유의지를 묻습니다. 겁박없이, 강요없이 스스로 택했다면 자유의지인가요. 정체성을 바꿔치기한 이후는 자유의지인가요 아닌가요. 또는 소설속 장치의 확산과 수축과정에서 어떤 최적값을 선택하는데, 운명이라 부를수도 있을것 같아요. 그럼, 목적지가 정해진 운명하에 택하는 행동은 어떤 의미일까요. 운명적 자유의지인가요 아니면 자유의지가 운명을 빌드업하는 걸까요.
자연스레 종교의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닉과 카논의 역심은 교조주의자의 단죄성향과 AI의 반란논리를 묘하게 뒤섞었습니다. 자신의 조직조차 불완전성과 비순수로 몰아 적대시할 수도 있다는게 재미납니다. 양자적 건너뜀과 뇌에 앱까는 모드가 나오는 시대가 되어도, 수천년 전과 같습니다. 버블 출현 이후에 사이비종교와 컬트 집단이 흥행 대박을 내는 이야기는 놀랍지도 않고요.
결국, 진귀하고 매혹적인 내러티브 자체를 탐닉하다가, 지금, 여기, 인간의 이면과 지향을 돌아보게 됩니다.
말미에 엮어둔, SF번역의 톱티어 역자 김상훈님의 해설이 재미나서 정독했습니다.
하드 SF (사이버펑크) 5대 요소가 인상적이었습니다.
- 진정한 현대과학에 대한 관심
- 외삽법을 축으로 한 상상력의 재평가
- 고감도의 환시능력에 의한 정신적 지평의 확대
- 21세기에 걸맞는 글로벌한 시야의 설정
- 뉴웨이브의 혁신조차 당연시 할 만큼 세련된 소설 기법의 확립
그렉 이건이 교과서적으로 부합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특히, 두가지가 발군입니다. 하나는 외삽법을 축으로 한 엄청난 상상력의 허구적 장치와 설정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련된 이야기 기법입니다. 전문 소설가처럼 이야기를 야금야금 펼쳐 나갑니다. 이내 비둘기는 사라지고 여인이 나오는 마술이 펼쳐집니다. 익숙해질만하면 꿈틀, 놀랍게 튀고 방향을 돌려 달아나는 화법 자체가 흥미롭습니다. 내내 바디감이 좋았고, 결말의 피니시 감만 전문 소설가 급이었다면 이 책은 지금보다 훨씬 유명해졌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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