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걷다 화장실도 가고 싶고 목도 말라 광장 카페에 자리를 잡습니다. 유럽 어느 광장에 있어도 행복도가 +5 상승하는데요. 광장의 매력 같습니다.

 

탁 트여 사람이 모이고 만나고 다시 흩어지는 전통의 플랫폼. 플랫폼이 그렇듯 광장은 사람을 유인하는 요소가 있지요. 랜드마크 건물이거나 분수, 동상, 탑 같은. 어트랙션의 나머지를 채우는건 사용자입니다. 날은 지독히 못부르는 가수가 저 편에서 노래를 합니다. 그래도 너무 멀어 소리가 가물거리니 나쁘지 않습니다.

 


카페에서 바람을 쐬며 상그리아를 마시니 올라간 체온도 식고 팍팍해진 다리도 쉬어서 좋습니다. 카페 주인같은 여성은 영어를 잘하는데 일하시는 할머니는 영어를 못하십니다. 그럼에도 화장실에 가려고 하니까 몸짓으로 위치 알려주시고 남녀 공용이라 누가 있는지 먼저 가서 보고, '와도 돼 ^^' 손을 흔드시는 모습이 정겹습니다.

 

앞에서 포르투갈 왕들을 좀 비판적으로 말했지만, 거리에서 만나는 포르투갈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꽤 좋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왁자지껄 활달한 친근함이라면 포르투갈은 우리나라 시골 같은 뭉근한 친밀감입니다.  그냥 보면 무뚝뚝한데  대화가 시작되면 배려심과 친근감이 느껴집니다. 물론 말투는 까스띠야의 하이노트를 기대하면 안됩니다. 나른한 웅얼거림에 가까운 억양입니다.

 

하나 포르투갈 사람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인종에 대해 시야가 열려있다는 점입니다. 흑인부터 인디오와 백인이 화목하게 공존하는 브라질처럼 포르투갈, 최소한 리스본은 다인종 도시로 수세기를 지내왔습니다.

 

중세 노예무역을 선도한게 포르투갈입니다. 식민지에서는 노예를 부렸기도 합니다. 그러다 식민지에서 낳은 곁가지 아이들이 환국하고, 식민지 경영을 위해 해외에 내보내는 인력이 많아 인력난을 겪다 보니 일찍부터 다인종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아랍과 아프리카는 가깝고, 무역항으로 교통하는 수많은 나라 사람도 있었고요. 더 멀리 거슬러가면 무슬림 축출후 개종한 아랍인도 그대로 남아 살고 있습니다. 아참, 스페인의 사주로 유대인을 축출하고 개종한 유대인도 남아 있었고요. 이 모든게 17세기에 이뤄진 일입니다.

 

이때 풋내기 항해자는 리스본에 와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여긴 그야말로 국제도시야"라는 기록 이 많습니다.

 

포르투갈이 선구적 노예무역상으로 돈도 제법 벌었지만, 노예제도 철폐도 빠른 편에 속합니다. 본국의 노예 금지는 대지진 이후인 18세기 후반, 노예 무역의 금지는 19세기 초반입니다. 이런 역사는 모른다쳐도, 여행자의 예민한 감각으로도, 포르투갈 있는 동안 인종에 대한 색다른 시선은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상 파울루에서 느낀, 하나되는 따스함까진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좀 쉬고 다시 또 알파마 골목에 감탄하며 꼬메르시우 광장에 도착했습니다. 여길 그리 와보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하나지요. 대지진 이후 신도시 계획의 뼈대가 바이샤니 말입니다. 숙소가 있던 호시우에서 남으로 곧게 그은 3 대로의 끝맺음이 꼬메르시우 광장입니다. 아우구스타 대로를 중심선으로 금의 길(rua  de aurea)과 은의 길 (rua da prata) 축을 이룹니다. 대로 사이 사이를 메운 구두쟁이(sapateiro)의 길, 무두쟁이(correeiro)의 길 등 중세 시장이 상상되는 길이 얹혀 있지요. 남북의 길을 가로지른 동서의 길들, 그리고 엄격한 대칭으로 구획된 각 구역마다 동일한 규격의 집들을 절제하여 배치한, 당시로 담대한 도시 계획. 건물로 쓴 서사시의 끝이 바로 꼬메르시우 광장입니다.

 

새 광장이 시민의 플랫폼을 넘어 세계의 플랫폼이 될 것을 예측한 카르발류, 폼발 후작은 당시로선 엄청난 광장을 설계했습니다. 물산이 집하되는 선박이 매일 드나드는 강쪽만 뚫어두고, 탁 트인 광장의 서편엔 무기고를, 동편엔 세관을, 북편엔 민사 법원을 두어 우리 포르투갈 죽지 않았다는 위용을 과시하고, 내국인은 바이샤에서 오면서, 외국인은 테주강에서 들어오면 볼 수 있도록 염두해둔 상징적 공간입니다.

 

뭐 지금은 사진 찍기 좋은 아름다운 광장으로 사람들이 많지만, 1755년의 대지진을 한켜 깔고 보면 그 감흥이 절절합니다.

 


광장 근처에서 마지막 현지식을 합니다. 그간 좋았던거, 먹으려고 생각해뒀으나 못 먹은 메뉴를 시켰고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비장하게 맛있습니다. 뇌는 뒷짐지고, 배에는 물어보지도 않고 입의 결정을 따른 식사였습니다. 해질때까지도 배가 꺼지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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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은 일곱개 언덕위에 세워진 도시라고 불리웁니다.

 

실은 로마가 일곱 언덕위의 도시로 유명한데, 리스본도 그렇답니다. 로마와 비교하자면 리스본은 훨씬 밀집된 상태란 점이 차이입니다. 모퉁이를 돌면 바로 가파른 언덕이 나오고, 오르락 내리락이 여느 도시보다 심한 편입니다. 지도상 봤을때는 별로 멀지 않은 거리일지라도 언덕을 내려와서 다시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경우에는 생각보다 걷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리스본의 주요 지구를 알아두는건 여행자로서 유용합니다. 일반 여행지는 의미상 구분이라면 리스본은 지리상 구별이기 때문입니다.

 

리스본의 기본이 되는 중심축은 바이샤(baixa)입니다. 호시우 역과 광장에서 꼬메르시우 광장까지 직선 도로와 이를 가로지르는 도로들로 이뤄진 지구입니다. 낮은 지대란 뜻인데, 언덕의 도시에선 귀한 평지라 예전부터 사람들이 모여드는 중심지역입니다. 서울로치면 종로 쯤이겠지요.

 

대항해시대, 타국의 유럽인들이 바이샤를 보며 경탄했던건 체스판 같은 도로, 반듯한 도로입니다. 요즘 같아서야 무슨 대수냐 싶지만, 중세 말기 유럽의 거점 국제도시 이런 레이아웃은 단연코 리스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탁월한 기능과 미학에 대가가 없었겠습니까. 천년수도에 미래지향적 도시계획이 가능했던 이유는 리스본 대지진 탓입니다. 저도 이번에 '운명의 ' 읽고서 소상히 알게되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독실한 카톨릭, 아니 이를 넘어 미신처럼 맹신하던 리스본에 진도 9짜리 지진이 닥쳤습니다. 1755 11 1, 위대한 도시는 하루아침에 평지가 되었습니다. 왕마저 멘붕에 빠져 손만 부들거리고 사고능력 제로일 , 수습을 권한게 '외무'대신 카르발류입니다.

"전하 수습을 하셔야지요."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잠시 생각

"죽은자는 묻어주고, 산자는 먹여야지요."

간단한 답에 왕은 카르발류를 무한지지하고 리스본 재건의 총책과 재상으로 임명합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운빨 좋은 사내의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카르발류는 갈수록 국력을 잃어가는 포르투갈을 안타까워 하던 선각자입니다. 출신은 시골 무명 귀족인데, 아버지를 따라 리스본에 와서 살다가 일찌감치 과학과 이성을 숭상하는 대역죄인 스터디 그룹의 신지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우연으로 그가 개명한게 포르투갈엔 축복이 되었다는 점도 아이러니하지요. 그는 꾸준히 유럽 지식인과 교류하며 중상주의와 이성적 사고법을 수련하고 포르투갈 중흥의 기회만 노리던 차에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상황 고려하면, 죽은자는 묻고, 산자는 먹인다는 그의 답은 짧지만 생각은 깊은 겁니다. 죽은 자를 빨리 매장하지 않으면 전염병이 도는데 가톨릭의 의례를 존중하면 불가능 합니다. 산자를 먹이기 위해서는 치안가 식량 확보 및 다양한 행정적 통솔이 필요합니다. 카르발류는 그 짧은 시간에도 계엄에 준하는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하는 복잡한 조치를 시뮬레이션 했을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튼 졸지에 재상이된 카르발류는 전권을 가지고 일련의 특별법을 발동합니다. 가장 시급한 치안부터 잡습니다. 훔친자는 사형해서 잘 보이게 효수합니다. 치안이 잡히니 행정명령이 먹히기 시작하지요. 다음은 재건에 필요한 인력확보입니다. 하느님이 노했다고 기도만 하고, 리스본이 저주를 받았다고 도망가는 장정들에게 동원령을 내립니다. 재건의 인력을 확보한거죠. 다음 고정가격 강제매입과 징발 등으로 긴급식량을 확보하고, 특별세를 도입해 긴급 상황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합니다. 듣고 보면 고개 뜨덕여지는 이야기지만, 도시가 평탄화되고 왕에서 백성까지 모든 사람들이 모두 정신이 나갔을 때 하나하나 순서대로 수술하듯 진행한건 행정가와 전략가의 역량이 동시에 요구되는 일이라, 저는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리스본 재건 플랜. 런던 대화재 이후 탁월한 도시계획이 나왔지만 지주들과 이해관계로 실패하고 지금봐도 난개발의 런던이 사례를 통찰한 카르발류는 법과 여론조작, 요인 숙청  자기가 가진 권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끈기있게 리스본을 재건합니다. 마키아벨리즘으로 적도 많이 생기지만, 후세의 제가 봐도 카르발류 아니었으면 포르투갈은 동유럽과 다름없는 3 국가가 자명합니다. 동유럽 비하가 아니라 역사적 변곡점이 나라에 미치는 임팩트가 그러합니다.

 

아무튼 독재에 가깝게 리스본과 포르투갈의 정비안을 실행하여 리스본은 아름다운 도시로 거듭났습니다 물론 지진의 지독한 상처로 포르투갈은 이후 2류국가로 머무르게 되었지만, 당시 상황 고려하면 그나마 많이 건진거라 봅니다. 침몰하던 포르투갈 호의 경종이 되어 수습을 시작한 계기였습니다.

 

호시우 광장에서 북쪽으로 가면 폼발 동상이 있습니다. 바로 카르발류가 후에 작위를 받은게 폼발에서 후작 Marques de Pombal입니다. 바이샤를 폼발이 만든 거리라해서 폼발리나스라고도 합니다.

 

리스본 주요지역 한군데 소개가 길었네요. 나머지 여행객에게 중요한건 지구입니다. 바이샤의 서편 언덕인 바이후 알투(bairro alto), 동편의 알파마(alfama) 알면 됩니다.

 

바이후 알투는 우리로 치면 강남 정도 될까요. 젊은이들이 모여 놀고 깔끔한 새건물이 비교적 많습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까몽이스 광장도 있습니다. 


반면 알파마는 삼청동이라 할까요. 리스본 재건계획이 닿지 않은 곳이라 예전 그대로 모습이 남아 있고, 오히려 관광객의 눈을 끕니다. 굽이굽이 미로같은 골목은 현지인도 잠깐 한눈 팔면 길을 잃는다는 곳이지요


드디어 리스본의 첫 여정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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