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마지막 날


원래 날씨나 돌발상황으로 놓칠 곳을 보충하려 예비로 빼둔 날입니다.  하지만 예정해둔 여행 포인트는 대부분 클리어한 상태

오비두스(obidus)를 갈까도 생각했었습니다. 진자(ginja) 또는 진지냐(ginjinha)라 불리우는 체리주가 유명합니다. 하도 이뻐서 왕비에게 선물로 준 마을이라 왕비마을이라는 별칭도 마음을 끕니다. 가보면 좋긴 하지만, 여행의 말미에 장거리 여행이 약간 부담스러울듯도 하여 리스본 시내에서 놀기로 했습니다.

 

뭐하지?

 

식구들과 간단히 이야기해 , 오늘 일정은 고공 테마로 정했습니다. 리스본은 도시 경관이 수려합니다. 도시 안에서 봐도 이쁘지만 위에서 보는 풍경은 절경이지요. 먼저 소피아 전망대에서 시내를 보고, 비센테 성당을 지나 알파마를 크게 돌고, 제가 가장 아껴뒀던 꼬메르시우 광장에서 식사를 하며 일정을 1차 마무리하기로 했습니다. 식구들 쇼핑 타임을 준 후 호텔에서 잠시 쉬고 야경 한번만 보고 끝내는 가벼운 일정으로 설계를 했습니다. 모두 좋다고 동의했습니다.

 


호텔 조식을 먹고 길을 나서는데.. 아아. 탄성이 나옵니다. 예보로 예상은 했지만 상상이 짧았습니다. 햇살이 쨍하고 온도도 따스하고 날씨가 환상입니다. 떠나기전 선물을 받은 기분입니다.

 


햇살이 구석구석 비치는 아름다운 골목을 살살 걸어 소피아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어찌나 이쁜지. 딸램은 집에 가기싫어를 연발하고.. 사실 저도 돌아가기 싫었습니다. 풍경이 지루할때까지 충분히 보고 다시 길을 갑니다.

 

비센테 성당도 대지진 때 많은 사람이 상한 곳입니다. 리스본의 수호성인을 모신 성당이니 그랬겠지요.

 

이어서 판테온

로마의 판테온처럼 멋지지만 의미는 다릅니다. 로마 판테온을 그 이름처럼 모든 신을 모신 만신전입니다. 그 이름이 로마의 속국들로 오면서 이베리아에서는 무덤을 뜻하는 개념으로 변했고, 리스본의 판테온은 왕들의 무덤입니다. 입장하려고 하니 돈을 내라고 합니다. 건물은 멋지지만 포르투갈 왕 따위는 별로 관심이 없어 되돌아 나옵니다.

 

포르투갈 왕가를 이야기하면 할 말 많지요. 우선 역사 시대가 한참 진행된 후 건국해서 신비감이 없어요. 부르고뉴에서 건너온 두 기사, 본국에서 job이 없어 이베리아로 건너온 두 기사가 무슬림과 싸움에서 공을 세워 까스띠야 왕의 두 딸과 결혼합니다. 언니와 결혼한 기사는 스페인의 왕이 되지만, 동생과 결혼한 사람은 포르투갈 백작령을 갖고 시작하지요.

 

아무튼 제 관점에서 포르투갈 왕가의 유죄는 황금기에 들어온 재물을 나라 발전을 위해 쓰지 못한 점입니다. 왕가와 귀족문화에만 빠졌고, 미래를 위한 산업 발전에 부의 물줄기를 돌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시대상황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요구일수도 있으나, 해적질을 해서 나라를 세운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남의 나라 조선소에 위장 취업해서 산업을 배운 표트르 황제를 단지 아웃라이어라고 치부하기엔 그 결과 차이는 상당히 크니까요.

 

유럽의 숟가락이라는 세비야도 있긴 합니다. 수많은 신대륙의 재화를 실어 나르는 보물 항구이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맛을 못본 스페인, 그 까를로스 대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노릇하느라 폼이라도 잡았지요. 스페인은 영토와 인구가 많았던 탓도 있지만 무적함대 깨지기 전까지 해양기술에도 많은 투자를 했었습니다. 크리스토발,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에 까이고 퇴짜맞고 난 이후에 기독교 왕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지원을 받았고, 최초의 세계일주를 한 마젤란도 포르투갈이 품지 못한 항해사 마갈량이스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점이 있습니다.

 

어쨌든 유럽 기준에서 포르투갈은, 같이 붙어는 있지만 좀 덜 떨어진 이웃느낌인듯 합니다. 오죽하면 재기 발랄한 페소아가 포르투갈도 유럽에 있는 멋진 나라다라는걸 알리고 싶어 리스본 가이드북을 직접 집필하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행선지가 '기차로 갈 수는 있지만,  유럽 사람들이 잘 모르는 신비로운 나라' 컨셉으로 리스본이었을까요.

 

포르투갈 사람들도 인정하는 부분인데 스스로 유럽의 후진국이라고 자조할 때가 많습니다. 이 자조성도 포르투갈의 큰 특징이긴 합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스페인에 병합되었다가 겨우 독립했지만, 리스본 대지진 이후 하나하나 식민지를 잃어가기만 한 역사. 제국주의 열강들의 선긋기 놀이 때 포르투갈도 아프리카에서 야심차게 선긋다가 영국이 '너 꺼져' 한방에 ', 그래' 하고 도망온 후 생긴 국가적 열패감.

 

역사를 훑다 보면 저 왕들이 마냥 멋지지만은 않습니다.


판테온 이야기에 덧붙이면, 포르투갈 왕가는 수세기에 걸친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으로도 유명합니다. 나라가 작아 혼인 풀이 좁은 탓이 첫째, 변방이라 대국과 혼인 교류가 잦지 않은게 둘째 이유인데요. 광녀 후아나가 가장 많이 알려졌고요

 


외관은 특상으로 아름다운 판테온을 보며 하염없이 앉아있다가 다시 또 길을 걷습니다. 알파마 골목은 그 자체로 미로 같은 흥미진진함이 있습니다. 다만 미로 괴물 대신, 골목마다 보물같은 장면이 숨어있다는게 차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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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판테온에 갔습니다. 구의 지름과 천장의 높이가 같은 독특한 기하라든지,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빛이 들어오는 구조 등은 잘 아는 바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처럼 기대를 뛰어 넘는 정서적 만족을 준 곳도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웅장한 규모에 압도됩니다. 근방에서는 사진을 찍어도 전체 모양이 잡히지 않을만한 크기입니다. 이것을 고대 로마시대에 만들었다는게 짐작이 되지 않지요.

이 독특한 구조는 바티칸 미술관이나 파리를 비롯해 무수한 후대 건축가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오죽하면 브루넬레스코는 로마 유학 시절에 판테온의 벽을 몰래 깨서 그 공학적 비밀을 습득했겠습니까.

그러나 판테온의 매력은 넉넉한 공간 사이로 들어오는 서광입니다. 판(pan)테(the)온이란 뜻 그대로 모든 신을 섬기는 범신전입니다. 그래서 사방 어딜 둘러봐도 둥그런 평등한 구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특정한 신에게 바쳐지지 않은 모든 신을 위한 신전, 그래서 오히려 인간을 위한 신전 판테온입니다. 그 크기로 인해 실내이면서 답답함이 없고, 위가 뚫렸지만 안에 앉아 있으면 한없이 포근합니다. 


그리 유명 장소는 아니지만, 판테온 근처에 미네르바 성당(Santa Maria sopra Minerva)이 있습니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종교재판을 받은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들, 로마에서 당당히 외칩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다음 행선지는 나보나 광장입니다. 

나보나 광장은 한쪽이 매우 긴 직사각형의 광장입니다. 과거 경기장이었기에 갸름합니다. 벤허 같은 전차 경기도 열렸겠지요. 이름 자체도, 경기장을 뜻하는 아고네(in agone)라는 말이 변해 나보나라고 불리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또 천재조각가 베르니니의 4대강 분수로 유명한 곳입니다. 로마의 거실이라는 별명처럼, 현지인들의 사교 장소이기도 하지요. 

비록 비싼 돌은 아닐지언정, 하나하나가 어디 고이 모셔 두어야 할 작품들인데 분수 하나에 오글오글 모여있습니다. 
더 놀라운 건, 자신들의 신이나 이상을 새기는게 아니라 세계의 모습을 담으려 애썼다는 점입니다. 남미의 플라테 강, 아프리카의 나일강, 동양의 갠지즈강, 유럽의 도나우 강 이렇게 4대 강입니다. 세상 지리에 밝고, 세계의 으뜸이라는 로마의 자신감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지요.

분수를 한참 즐겨보고, 다음 목적지로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성 아녜제 성당(Sant'Agnese)이 눈에 띕니다. 이런, 놓치고 갈 뻔했군.

아녜제는 흔히 말하는 성녀 아그네스입니다. 너무 예뻐서 빗발치는 구혼을 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종교에 귀의해 동정으로 죽기를 원했던 소녀, 결국 기독교도라는 죄목으로 창녀의 집에 넘겨졌어도 끝까지 동정을 지키다 사형을 당한 아그네스입니다.

과연 종교란게 무엇이길래, 어린 소녀가 목숨까지 하찮게 여기며 귀의했을까요. 또 그 꽃다운 정념을 기독교란 낙인 하에 꺾고 만 그 이들의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있었을까요. 모두가 신을 모신 마음은 같았고 진실했을텐데 왜 그리 광적이었을까요. 아니, 그나마 이성이 좀 더 자리를 잡은 지금은 광기가 좀 사그라들었을까요.

어린 성녀 아녜제의 성당은, 수많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소통하는 그 공간 곁에 물러서, 무수한 화두만 던진 채 고혹적인 우아함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1. BlogIcon 쉐아르 2011.08.19 02:23

    세상에 종교적 광신만큼 무서운게 없지요. 그렇기에 어린 소녀의 순수한 열정을 무참히 짓밟을 수 있었을 겁니다. inuit님 포스팅이 왠만한 가이드보다 더 좋은 것 같아요. 올겨울에 로마로 가족여행을 갈까 생각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 BlogIcon Inuit 2011.08.20 13:58 신고

      로마는 정말 아는만큼 보입니다. 가이드 써도 좋지만 지금부터 열공하시면 재미날겁니다. ^^

  2. BlogIcon 엘윙 2011.08.20 20:01

    아그네스가 누구인가하여 찾아보았습니다. " 집정관 아들의 구혼을 이미 그리스도와의 약혼을 이유로 거절" 했다니..대단한 사람이군요.
    저도 신혼여행기 후기를 빨리 올려야겠는데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으하하하하.

    • BlogIcon Inuit 2011.08.21 18:20 신고

      네 미모도 뛰어났지만 의지도 대단했던 소녀입니다.

      정말 엘윙님 신혼여행 이야기가 빨리 듣고 싶군요. ^^

  3. BlogIcon isanghee 2011.08.21 21:57

    저도 로마 관광의 백미는 판테온과 나보나 광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판테온 돔 천장의 커다란 구멍, Oculus? 설명을 들으면서 정말 비가 와도 신전 안으로 안 들어올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지요.

    • BlogIcon Inuit 2011.08.21 22:49 신고

      더운 기운이 밖으로 나오면서 비가 잘 들이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가 들어오긴 하지요.
      내부의 복도가 가운데가 솟아 올라 물이 쉽게 빠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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