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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

Inuit 2011. 7. 3. 22:00
몇년 전, 내 대학동기에게 어이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MIT에서 박사학위 마치고 유명 벤처에서 커리어를 쌓다가 다시 공부가 하고 싶었나 봅니다. 특히 마케팅에 흥미를 느껴 대학 문을 두드렸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귀하는 이미 충분한 자질을 갖고 있으니 더 이상 세부적인 공부가 필요치 않습니다.'라는 어색한 핑계만 대곤 했지요. 정량적인 기질의 공학도를 문하에 두기 불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만, 참 편협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dward Wilson

(Title)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사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과학을 하나로 통합해서 보자는 윌슨 씨의 주장은 다소 허황되거나 과장스럽고 또는 무모한 이상론으로 보였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뇌과학의 성과를 마케팅에 이용하는 뉴로마케팅을 비롯하여, 폭 넓은 통합적 탐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20년전 제가 석사 공부할 때도 벌써 학제간 통합이 솔깃한 이슈였으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요.
제가 쓴 '가장 듣고 싶은 한마디 YES!'도 같은 맥락입니다. 뇌과학의 최근 발견에 기반한 뇌의 작동원리를 응용한 필승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정리해보았으니 미시 수준과 거시수준이 자유롭게 교류합니다.

또한 '진화론으로 본 종교, 그리고 선지자'에서도 언급했듯 사회적 번영을 위한 기제로서의 종교나 윤리의 생성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윌슨 씨는 십년전에 공진화(co-evolu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음을 몰랐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을 읽어 새로운 관점 얻겠다고 겨냥한 제 목적은 실패했습니다. 거대한 사상적 조류에 주춧돌을 놓은 그 의미는 크지만, 목놓아 주장하며 설득하려는 많은 부분이 이미 세상에서는 받아 들여지고 있고, 저는 이미 상당한 이해 하고 동의하니 매우 지루했습니다. 그저 뿌리가 되는 고전이 주는 매력만을 느꼈지요. 어렵고 논란 많은 주장을 단단히 결심하고 제안하는 결연한 의지가 문장 곳곳에서 드러나는, 그 학자적 설레임 말입니다.

오히려, 저는 아이들 공부하는 방향에 대해 생각해볼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미 그렇게 아이들 가르치고 있지만, 더욱 세부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로서의 공부, 나를 심화시키는 지침으로서의 학문이라면 어느 특정 학문의 세목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든 학문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 이해의 바탕위해 새로운 탐구를 할 수 있는 능력, 바로 르네상스적 인간의 완성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경영을 잘하려면 오히려 과학의 소양이 필요하고, 연구를 잘하려면 사회과학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설픈 전문인으로 키워지지 않았나요? 우리의 아이들까지 이렇게 키우기는 아쉬운 점이 너무 많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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