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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Day of Ravel

Inuit 2013. 6. 16. 10:00
대개 주말 중 하루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때 필요한 것이 '작업 음악'인데, 주로 클래식을 듣는다. 
가사가 없어 산만하지 않을 뿐더러, 명상 효과까지 있으니.

요즘은 아예 하나의 주제를 놓고 듣는다.
매번 듣는 CD만 듣는게 단조로우니 생각 나는대로 검색해서 듣곤 했는데,
이것저것 듣다보면 좋긴 좋은데 뭘 들었는지 정신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하나의 작곡가를 놓고 듣다보면 시대를 관통하는 흐름도 느껴지고, 유관한 이야기도 얻게 되는 쏠쏠함이 있다.

라벨(Maurice Ravel)은 왼손 협주곡(Concerto pour la main gauche en ré majeur) 때문에 오늘의 주제가 되었다.
철학자이자 선배 항공학자이기도 한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형 파울이, 모차르트의 재림 소리를 듣던 연주가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1차대전 참전중 부상으로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오른팔을 절단하게 되었다.
음악이 하고 싶었던 파울은 아는 작곡가들에게 왼손으로 칠 수 있는 곡을 써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비트겐슈타인 집안이 대단했던 것이, 예술가들과의 교류가 심했다.
누나는 브람스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루드비히는 로댕과 클림트를 후원했다.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수시로 집을 드나들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쟁쟁한 식객들을 제치고 파울 비트겐슈타인에게 왼손 협주곡을 써준 이가 바로 라벨이다.
이런 스토리를 듣지 않으면 왼손만으로 쳤다고 믿기 어렵게 온전하고 화려하다.
물론 그런 느낌은, 타악기와 관악으로 오른손을 보완해준 라벨의 천재성 탓이다.

왼손 협주곡이 마음에 들어, 라벨을 있는대로 찾아 들었다.
계속 듣다보니 귀에 익은 볼레로나 스페인 광시곡 등등이 흘러나오는데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러다 심장이 쿵쿵 뛰며 현기증 나게 아름다운 선율이 작업중의 내 마음을 흔든다.
제목을 보니, '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다.

제목은 엄청 익숙한데, 이날 처음 제대로 들었다.
라벨이 재학중 쓴 곡이라는데, 참 압도적 재능이구나 싶었다.
두가지 버전을 거의 네시간 들었으니 40번은 들은 셈.

프랑스도 스페인도 아닌 바스크 출신의 라벨.
볼레로 때문에 슬라브 계열의 감성을 지닌 줄 오해했더랬다.

오래 두고 좋아할 만한 노래를 건진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을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