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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미디어다

Inuit 2003. 12. 8. 00:55

금요일에 기업가치평가 프로젝트를 위해 배상면주가 본사에 갔었습니다.
궂은 날씨를 뚫고 포천에 도착해서 보니 아담하고 깔끔한 공장에선 술익는 냄새가 폴폴나더군요.
일단 '산사원'이라는 술 박물관 투어를 했습니다.
술만드는 과정도 보여주고 여러가지 술제조에 관한 <이야기>를 담으려 노력한 흔적이 많았습니다.
이날은 '김씨부인 양조기'라 하여 양반집 며느리가 술담그는 모습과 과정을 테마로 꾸며놓았습니다.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본격적인 사장님 인터뷰.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사전조사와 분석을 많이 했고, 그 과정에서 가졌던 의문들이 많았지요.
하나하나 꺼내놓으며 CEO의 견해를 듣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질문하는 꽤나 긴시간이었는데 시간가는줄 모를정도로 열띤 인터뷰였습니다.
제일 진귀한 장면은, 컨설팅이나 프로젝트를 위해 그렇게 많은 인터뷰를 했지만, 술을 마셔가며 하는 인터뷰는 처음이었다는 것이죠.
산사춘, 흑미주, 활인18품 등 다섯 가지 고운 빛깔의 술을 시음주기에 담아 나왔고, 산사 열매를 달게 절여 만든 것, 술지게미 과자, 젤라틴에 알콜을 넣어 묵처럼 만든 고체술, 무를 술에 박아 만든 무박이 등 희한한 안주와 함께 귀한 술을 눈으로, 코로, 그리고 혀로 맛보며 회사의 나아갈 방향, 그에 따른 복잡한 숫자 이야기를 했으니까요.
산사원에서 마신 술이 귀한 이유는, 똑같이 산사춘이라도 우리가 사먹는 술들은 유통과 보관을 위해 열처리를 한 것인 반면, 그날 마신 술은 담근 그대로 나온 <생술>이기 때문입니다. 생맥주가 더 맛있듯 생술은 술맛도 자연스럽고 착착 감겨드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배영호 사장이 아버지 배상면 옹의 피를 받아서 국순당의 배중호 사장, 누룩도가의 배혜정 사장과 함께, 모두 체질적으로 술을 못마신다는 점입니다. 본인 말로는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면 남을 위한 술을 못만든다고는 하면서도, '나는 안마시면서 술을 파는 것이 부도덕해 보이냐?'고 물으실 정도로 순수한 면도 있어 보였습니다.

사장님 표현을 빌면, 두시간 가량의 <청문회>를 끝내고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원래 우리의 계획은 포천까지 갔으니 이동갈비는 먹어야하지 않냐는 요량으로, 사장님이 뭐 먹겠느냐고 물으면, 입을 맞춰 "갈비요!"라고 대답하기로 하고 예행연습을 했었지요.
그런데 의외로 "자 우리 뭐 간단한 것이나 먹으러 가지요~" 하셔서, 모두 우물쭈물하는데 박모군이 당당히 소신을 밝혔습니다. "저희는 갈비가 참 먹고 싶은데요 ^.^"

여러가지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나눴지만, 배상면주가의 잠재력은 술을 '알콜섞인 향내나는 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철학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술은 미디어다>라는 말입니다. 즉 문화적 컨텐츠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술로 인식을 해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왜 우리 전통주를 'korean traditional rice wine'이라는 이상한 역어를 쓰느냐, 일본의 酒를 sake라 하듯, 우리의 술은 sool로 자리잡게 하겠다는 포부며, 세계속에 곡주가 그 나름의 술로서 자리를 잡을 날이 곧 올 것이라는 확신, 그를 위해 지금의 모양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변주를 하겠다는 시도는 몇시간의 대담이었지만 마음속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외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야기, 국순당 백세주 런칭시 고생했던 이야기,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야기, 우리가 보는 배상면주가의 기업으로서의 단점과 충고 등 생산적이면서도 즐거운 이야기를 많이 나눴습니다.

느낀점은 여러가지로 대단히 많았지만, CEO는 결국 <꿈을 심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확신을 더한 그런 날이었습니다.

-by in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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