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마지막 여정은 리스본 야경을 택했습니다. 아내는 쉬고 싶다 남고, 셋만 출격합니다. 아테네에서도 셋이서만 야경 보러 바람 부는 산을 오른 적 있는데 데자부 같습니다.

 

야경을 위해 아껴둔 장소는 성모 언덕의 전망대(miradouro de nossa senhora do monte)입니다. 숙소에서 거리는 아니지만, 오르막길이라 우버를 탔습니다. 리스본 시내 풍경은 낮에 봐도 밤에 봐도 질리지 않습니다.  마지막 풍경을 눈에 꽉꽉 담아두고 내리막을 걸어 호텔로 옵니다.

 

늦은 점심이 거했고 배가 고프지 않아, 로컬 분들 많이 가는 간이식당에서 비파나 두개를 사서 들어왔습니다. 배가 여유 있고 피곤하지 않다면, 한참 머물러도 좋을만큼 훈훈한 분위기였습니다.

 

이윽고 귀국날.

여행의 시작은 설레고 반짝이지만, 돌아오는 길은 지치고 건조합니다.

 

리스본 공항은 이미 포화상태라 인근 군용비행장을 개조해 신공항을 지을 준비를 한다는 우버 드라이버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와중에 폰으로 알람. 출발편의 지연 소식입니다. 트래픽이 문제는 문제네요.

 


연결편 타는 시간 여유가 1시간 40분으로 짧은 터라 복잡한 심경이었습니다. 결국 한시간 지연되어 출발하니 마음을 비우게 되더군요. 프랑크푸르트에서 하루 자고 가지 . ;;

 

그렇게 귀국편을 체념하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려 네트웍 접속하자마자 Kayak 알람. 인천행 귀국 편이 세시간 딜레이라고 합니다. 기체 결함이 발견되어 예비 기체로 교체했다는데, 가상의 사고를 딛고 무사히 귀국한 셈이네요. 체념하니 열리는 기회란게 아이러니했습니다. 독일에 하루 머무르려다 급히 귀국하는듯 섭섭함이려나요.

 


아무튼 한국오니 다른 면에서 좋네요. 가족 모두가 활기를 얻어 올해도 힘차게 사는데 도움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모든 이야기는 여기에서 있습니다.


  1. fruitfulife.net 2018.02.28 16:45

    가족과 함께 좋은 시간 보내셨군요. 야경이 아주 멋집니다.
    돌아오는 길이 지치고 힘들기에 돌아와서 '역시 집이 최고!' 할 수 있나봅니다. ^^

    • BlogIcon Inuit 2018.04.15 00:38 신고

      네. 집은 화려하든 소박하든 그 포근함으로 좋은 느낌을 주지요. ^^

식사를 마쳤으되 해가 아직 중천입니다.


마지막 시간이 여유로우니 좋습니다. 어딜 가볼까 별별 이야기가 나왔고, 결국 테주 강너머 예수상을 가기로 합니다. 긴 이름은 예수왕 국립 성소(santuario nacional de cristo rei)인 예수상은 리우 데 자네이로의 예수상을 본딴 것 맞습니다. 한때 식민지였던 리우의 예수상에 감명받아 포르투갈 국민 청원에 의해 지어진 유래가 인상적입니다.

 

이 예수상은 크고 아름다운 다리를 지나서 갑니다. 다리 밑을 지날 때마다 저기 한번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예정없이 소원을 풀게 되었습니다.

 

이 다리는 유명한 독재자의 이름을 따서 살라자르 다리로 불리었습니다. 수십년 독재를 견디다 혁명으로 민주화를 이뤘고 다리 이름도 바뀌었습니다. Ponte 25 de abril, 4.25 다리지요. 우리나라 4.19 붙는 것과 같은.

 

1974 4 25, 라디오에서 나오는 금지된 파두곡을 신호로 청년 장교들이 조용히 움직이며 시작된 포르투갈의 혁명.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 주인공끼리 얽히고 섥히는 인연의 가운데 줄기가 것도 기나긴 독재와 항거의 대결입니다. 제가 포르투갈 좋아하는 이유 , 오래는 걸렸지만, 체념적 국민성을 딛고 스스로 민주화를 쟁취한 부분도 있습니다. 민주화는 누가 가져다 있는게 아니니까요.

 


4.25 다리는 리스본 높은 언덕에서 테주 건너 알메다 지역 높은 언덕으로 바로 꽂히기 때문에 보기보다 한참을 돌아야 합니다. 우버 드라이버 분께 물어보니 걸어 수는 없다고 하네요. 다리를 지나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다시 지방도로로 되짚어 오면 예수상 공원이 나옵니다. 혁명의 다리 건너 2천년전 혁명을 이끌었던 .

 


리스본 전경은 리스본 시내 어디서도 보기 힘들지요. 포르투에서는 가능했던 도시 전경을 테주강 건너니 제대로 볼 수 있어 감명 깊었습니다. 전망대에서 한참을 구경하다, 예수상 위에 올라가면 참 좋겠다 싶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기단의 오피스로 가보니 입장료를 받네요. 티켓을 사고 엘리베이터를 타니 순식간에 예수상 발밑까지 갑니다.

 

몸이 날아갈듯 세찬 바람이 불고, 멀리 해는 뉘엿뉘엿 지는데, 사방 트인 극한의 풍경은 초현실적이었습니다. 식구들 모두 말없이 망막에 잡히는 모든 빛, 살에 닿는 모든 감촉, 그리고 정서와 기억의 가족적 유대를 내면으로 느끼다 내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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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걷다 화장실도 가고 싶고 목도 말라 광장 카페에 자리를 잡습니다. 유럽 어느 광장에 있어도 행복도가 +5 상승하는데요. 광장의 매력 같습니다.

 

탁 트여 사람이 모이고 만나고 다시 흩어지는 전통의 플랫폼. 플랫폼이 그렇듯 광장은 사람을 유인하는 요소가 있지요. 랜드마크 건물이거나 분수, 동상, 탑 같은. 어트랙션의 나머지를 채우는건 사용자입니다. 날은 지독히 못부르는 가수가 저 편에서 노래를 합니다. 그래도 너무 멀어 소리가 가물거리니 나쁘지 않습니다.

 


카페에서 바람을 쐬며 상그리아를 마시니 올라간 체온도 식고 팍팍해진 다리도 쉬어서 좋습니다. 카페 주인같은 여성은 영어를 잘하는데 일하시는 할머니는 영어를 못하십니다. 그럼에도 화장실에 가려고 하니까 몸짓으로 위치 알려주시고 남녀 공용이라 누가 있는지 먼저 가서 보고, '와도 돼 ^^' 손을 흔드시는 모습이 정겹습니다.

 

앞에서 포르투갈 왕들을 좀 비판적으로 말했지만, 거리에서 만나는 포르투갈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꽤 좋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왁자지껄 활달한 친근함이라면 포르투갈은 우리나라 시골 같은 뭉근한 친밀감입니다.  그냥 보면 무뚝뚝한데  대화가 시작되면 배려심과 친근감이 느껴집니다. 물론 말투는 까스띠야의 하이노트를 기대하면 안됩니다. 나른한 웅얼거림에 가까운 억양입니다.

 

하나 포르투갈 사람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인종에 대해 시야가 열려있다는 점입니다. 흑인부터 인디오와 백인이 화목하게 공존하는 브라질처럼 포르투갈, 최소한 리스본은 다인종 도시로 수세기를 지내왔습니다.

 

중세 노예무역을 선도한게 포르투갈입니다. 식민지에서는 노예를 부렸기도 합니다. 그러다 식민지에서 낳은 곁가지 아이들이 환국하고, 식민지 경영을 위해 해외에 내보내는 인력이 많아 인력난을 겪다 보니 일찍부터 다인종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아랍과 아프리카는 가깝고, 무역항으로 교통하는 수많은 나라 사람도 있었고요. 더 멀리 거슬러가면 무슬림 축출후 개종한 아랍인도 그대로 남아 살고 있습니다. 아참, 스페인의 사주로 유대인을 축출하고 개종한 유대인도 남아 있었고요. 이 모든게 17세기에 이뤄진 일입니다.

 

이때 풋내기 항해자는 리스본에 와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여긴 그야말로 국제도시야"라는 기록 이 많습니다.

 

포르투갈이 선구적 노예무역상으로 돈도 제법 벌었지만, 노예제도 철폐도 빠른 편에 속합니다. 본국의 노예 금지는 대지진 이후인 18세기 후반, 노예 무역의 금지는 19세기 초반입니다. 이런 역사는 모른다쳐도, 여행자의 예민한 감각으로도, 포르투갈 있는 동안 인종에 대한 색다른 시선은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상 파울루에서 느낀, 하나되는 따스함까진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좀 쉬고 다시 또 알파마 골목에 감탄하며 꼬메르시우 광장에 도착했습니다. 여길 그리 와보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하나지요. 대지진 이후 신도시 계획의 뼈대가 바이샤니 말입니다. 숙소가 있던 호시우에서 남으로 곧게 그은 3 대로의 끝맺음이 꼬메르시우 광장입니다. 아우구스타 대로를 중심선으로 금의 길(rua  de aurea)과 은의 길 (rua da prata) 축을 이룹니다. 대로 사이 사이를 메운 구두쟁이(sapateiro)의 길, 무두쟁이(correeiro)의 길 등 중세 시장이 상상되는 길이 얹혀 있지요. 남북의 길을 가로지른 동서의 길들, 그리고 엄격한 대칭으로 구획된 각 구역마다 동일한 규격의 집들을 절제하여 배치한, 당시로 담대한 도시 계획. 건물로 쓴 서사시의 끝이 바로 꼬메르시우 광장입니다.

 

새 광장이 시민의 플랫폼을 넘어 세계의 플랫폼이 될 것을 예측한 카르발류, 폼발 후작은 당시로선 엄청난 광장을 설계했습니다. 물산이 집하되는 선박이 매일 드나드는 강쪽만 뚫어두고, 탁 트인 광장의 서편엔 무기고를, 동편엔 세관을, 북편엔 민사 법원을 두어 우리 포르투갈 죽지 않았다는 위용을 과시하고, 내국인은 바이샤에서 오면서, 외국인은 테주강에서 들어오면 볼 수 있도록 염두해둔 상징적 공간입니다.

 

뭐 지금은 사진 찍기 좋은 아름다운 광장으로 사람들이 많지만, 1755년의 대지진을 한켜 깔고 보면 그 감흥이 절절합니다.

 


광장 근처에서 마지막 현지식을 합니다. 그간 좋았던거, 먹으려고 생각해뒀으나 못 먹은 메뉴를 시켰고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비장하게 맛있습니다. 뇌는 뒷짐지고, 배에는 물어보지도 않고 입의 결정을 따른 식사였습니다. 해질때까지도 배가 꺼지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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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마지막 날


원래 날씨나 돌발상황으로 놓칠 곳을 보충하려 예비로 빼둔 날입니다.  하지만 예정해둔 여행 포인트는 대부분 클리어한 상태

오비두스(obidus)를 갈까도 생각했었습니다. 진자(ginja) 또는 진지냐(ginjinha)라 불리우는 체리주가 유명합니다. 하도 이뻐서 왕비에게 선물로 준 마을이라 왕비마을이라는 별칭도 마음을 끕니다. 가보면 좋긴 하지만, 여행의 말미에 장거리 여행이 약간 부담스러울듯도 하여 리스본 시내에서 놀기로 했습니다.

 

뭐하지?

 

식구들과 간단히 이야기해 , 오늘 일정은 고공 테마로 정했습니다. 리스본은 도시 경관이 수려합니다. 도시 안에서 봐도 이쁘지만 위에서 보는 풍경은 절경이지요. 먼저 소피아 전망대에서 시내를 보고, 비센테 성당을 지나 알파마를 크게 돌고, 제가 가장 아껴뒀던 꼬메르시우 광장에서 식사를 하며 일정을 1차 마무리하기로 했습니다. 식구들 쇼핑 타임을 준 후 호텔에서 잠시 쉬고 야경 한번만 보고 끝내는 가벼운 일정으로 설계를 했습니다. 모두 좋다고 동의했습니다.

 


호텔 조식을 먹고 길을 나서는데.. 아아. 탄성이 나옵니다. 예보로 예상은 했지만 상상이 짧았습니다. 햇살이 쨍하고 온도도 따스하고 날씨가 환상입니다. 떠나기전 선물을 받은 기분입니다.

 


햇살이 구석구석 비치는 아름다운 골목을 살살 걸어 소피아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어찌나 이쁜지. 딸램은 집에 가기싫어를 연발하고.. 사실 저도 돌아가기 싫었습니다. 풍경이 지루할때까지 충분히 보고 다시 길을 갑니다.

 

비센테 성당도 대지진 때 많은 사람이 상한 곳입니다. 리스본의 수호성인을 모신 성당이니 그랬겠지요.

 

이어서 판테온

로마의 판테온처럼 멋지지만 의미는 다릅니다. 로마 판테온을 그 이름처럼 모든 신을 모신 만신전입니다. 그 이름이 로마의 속국들로 오면서 이베리아에서는 무덤을 뜻하는 개념으로 변했고, 리스본의 판테온은 왕들의 무덤입니다. 입장하려고 하니 돈을 내라고 합니다. 건물은 멋지지만 포르투갈 왕 따위는 별로 관심이 없어 되돌아 나옵니다.

 

포르투갈 왕가를 이야기하면 할 말 많지요. 우선 역사 시대가 한참 진행된 후 건국해서 신비감이 없어요. 부르고뉴에서 건너온 두 기사, 본국에서 job이 없어 이베리아로 건너온 두 기사가 무슬림과 싸움에서 공을 세워 까스띠야 왕의 두 딸과 결혼합니다. 언니와 결혼한 기사는 스페인의 왕이 되지만, 동생과 결혼한 사람은 포르투갈 백작령을 갖고 시작하지요.

 

아무튼 제 관점에서 포르투갈 왕가의 유죄는 황금기에 들어온 재물을 나라 발전을 위해 쓰지 못한 점입니다. 왕가와 귀족문화에만 빠졌고, 미래를 위한 산업 발전에 부의 물줄기를 돌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시대상황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요구일수도 있으나, 해적질을 해서 나라를 세운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남의 나라 조선소에 위장 취업해서 산업을 배운 표트르 황제를 단지 아웃라이어라고 치부하기엔 그 결과 차이는 상당히 크니까요.

 

유럽의 숟가락이라는 세비야도 있긴 합니다. 수많은 신대륙의 재화를 실어 나르는 보물 항구이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맛을 못본 스페인, 그 까를로스 대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노릇하느라 폼이라도 잡았지요. 스페인은 영토와 인구가 많았던 탓도 있지만 무적함대 깨지기 전까지 해양기술에도 많은 투자를 했었습니다. 크리스토발,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에 까이고 퇴짜맞고 난 이후에 기독교 왕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지원을 받았고, 최초의 세계일주를 한 마젤란도 포르투갈이 품지 못한 항해사 마갈량이스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점이 있습니다.

 

어쨌든 유럽 기준에서 포르투갈은, 같이 붙어는 있지만 좀 덜 떨어진 이웃느낌인듯 합니다. 오죽하면 재기 발랄한 페소아가 포르투갈도 유럽에 있는 멋진 나라다라는걸 알리고 싶어 리스본 가이드북을 직접 집필하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행선지가 '기차로 갈 수는 있지만,  유럽 사람들이 잘 모르는 신비로운 나라' 컨셉으로 리스본이었을까요.

 

포르투갈 사람들도 인정하는 부분인데 스스로 유럽의 후진국이라고 자조할 때가 많습니다. 이 자조성도 포르투갈의 큰 특징이긴 합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스페인에 병합되었다가 겨우 독립했지만, 리스본 대지진 이후 하나하나 식민지를 잃어가기만 한 역사. 제국주의 열강들의 선긋기 놀이 때 포르투갈도 아프리카에서 야심차게 선긋다가 영국이 '너 꺼져' 한방에 ', 그래' 하고 도망온 후 생긴 국가적 열패감.

 

역사를 훑다 보면 저 왕들이 마냥 멋지지만은 않습니다.


판테온 이야기에 덧붙이면, 포르투갈 왕가는 수세기에 걸친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으로도 유명합니다. 나라가 작아 혼인 풀이 좁은 탓이 첫째, 변방이라 대국과 혼인 교류가 잦지 않은게 둘째 이유인데요. 광녀 후아나가 가장 많이 알려졌고요

 


외관은 특상으로 아름다운 판테온을 보며 하염없이 앉아있다가 다시 또 길을 걷습니다. 알파마 골목은 그 자체로 미로 같은 흥미진진함이 있습니다. 다만 미로 괴물 대신, 골목마다 보물같은 장면이 숨어있다는게 차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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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너리 있는 가이아 지역은 구경하며 쉬엄쉬엄 걸어갈 순 있지만, 되짚어 걸어오긴 먼 거리라 우버를 탔습니다. 우버 기사 만나면 수다를 많이 떠는데, 현지 정서를 알기 제일 좋은 시간입니다. 

 

"포르투FC 좋아해요?" -포르투 버전


"어느 팀 응원해요, 벤피카? 스포르팅?" -리스본 버전

 

로컬사람과 대화할 때 급속도로 친해지는 마법의 질문입니다. 포르투갈은 축구의 나라고, 리스본과 포르투는 매우 자부심 강한 축구의 도시기 때문입니다. 포르투갈이 축구에 흠뻑 빠진 이유가 독재자 살라자르 정권 시절 국민의 관심을 돌리려 3F(Futebol, Fado, Fatima) 정책을 펼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책 없는 다른 라틴계 나라도 축구에 미쳐있는걸 보면, 이용했을망정 조성한건 아닌성 싶습니다.

 

수도 리스본의 두 팀 중 벤피카는 가장 성공적인 팀입니다. 가장 많은 리그 및 컵 타이틀을 가진 전통을 자랑해요. FC 포르투는 그 유명한 조제 모리뉴 감독을 배출한 팀이지요. 모리뉴는 포르투갈의 만년 2인자이자 유럽의 변방팀을 샛별로 만들었습니다. 리그 우승 및 유로파 우승, 유로 챔스 우승까지 세상을 놀래켰지요. 이후 모리뉴는 국제적 스타가 되어 명문팀 감독을 이어서 하고 있어요. 뒤를 이어 FC포르투를 맡은 비야스 보아스도 리틀 모리뉴란 별명답게 걸출한 성적을 내고 첼시까지 왔다간 있습니다.

 

FC포르투는 자본집약적 현대축구에서 군소 클럽이 그렇듯 셀링 클럽이기도 합니다. 그게 살아남는 비법이지요. 유망주를 예리하게 골라서 키운 후 비싸게 팔아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이지요. 헐크, 팔카오, 하메스, 오타멘디, 잭슨 마르티네스, 다닐루 같은 선수가 포르투 출신입니다. 그래서 그냥 셀링 클럽이 아니라 유럽의 거상이라고 불릴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번 여행 전 리그 순위를 보니 재미났습니다. 포르투와 스포르팅이 무패로 1, 2, 벤피카가 승점 차이가 나는 3위더군요. 대화하다 좀 친해지면 이 순위 갖고도 많은 이야기했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에혀. 계속 이겨서 1등 유지해야 할텐데.. " -FC포르투 팬

"에혀. 올해는 포기했어요. 리빌딩 중임." -벤피카 팬

순위가 높든 아니든 걱정거리 많은건 어느나라 팬이나 똑같군요.

 

또 한가지, 답은 뻔한데도 재미삼아 묻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포트루 토박이인걸 확인한 후,

'포르투가 나아요 리스본이 나아요?'

글에서 읽기론 포르투와 리스본간 라이벌 의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포르투는 리스본 사람을 알파뉴시스(배추먹는 사람)이라 부르고, 반대로 포르투는 트리페이루스(내장 먹는 사람)이라고 놀리는 식으로요. 하지만 실제로 가서 보면 체급 차이가 여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포르투 사람도

(어깨를 으쓱하며)

'리스본이야 대처인걸요. 그래도 난 포르투가 좋지만요.' 

뭐 이런 답을 합니다.

 

대화 , 포르투 토박이가 입가에 미소를 띄고 침이 살짝 고이며 이야기하는, 자부심 넘치는 프란세지냐 이야기가 나와서 우버 내리자 마자 프란세지냐 집을 갔습니다.

 


엄청난 맛이네요. 칼로리 폭탄이기도 합니다. 빵과 고기, 계란, 치즈가 범벅이고 그 위에 소스를 뿌려 나옵니다. 몸무게 걱정이 후덜덜이지만 보면 정신없이 먹게 됩니다. 프란세지냐는 아가씨란 뜻이라니 이쯤되면 감 오는분도 많겠지만, 끄로끄 무슈와 끄로끄 마담의 포르투갈식 변용입니다. 근데 저 소스가 프란세지냐를 독특하게 만드는것 같습니다. 느끼함이 별로 없고 촉촉한 식감이 인상적입니다. 무게 신경 안쓰면 매일 먹고 살고 싶은정도로 행복한 맛이기도 합니다.

 

스낵으로 하루치 칼로리를 섭취한지라 좀 걷기로 했습니다. 아침에 갔지만 루이스 다리를 또 보러 갑니다. 야경이 좋은 곳이기도 하니까요.

 

동 루이스 다리에서 낮에 본 포르투 풍경이 뽀얀 민낯이라면, 밤의 포르투 광경은 풀 메이컵을 한 성인 같은 자태입니다. 비밀이 많은듯, 고혹적입니다.

 


나중에 포르투에서 생을 마감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땐 중국인이 장악해서 같은 도시가 아닐거야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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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니무스 수도원에서 강쪽으로 조금 가면 '발견의 (padrão dos descobrimentos) 나옵니다. 제가 기대를 많이 곳이지요.

 

무슬림이 중동을 장악하고 기독교도의 동방 출입을 통제한건 종교보단 경제적 이해다툼이었습니다. 길이 끊겨 동방무역이 된서리를 맞게 되자 바다의 나라 포르투갈엔 기회가 열렸습니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를 우회하는 루트를 개척하고, 이어서 바스쿠 가마가 아프리카에서 인도양을 횡단해 고아에 도착한 , 황금의 인도와의 해상 루트를 확보합니다. 계속 동진한 포르투갈은 말라위, 인도네시아 동남아 국가와, 중국의 마카오를 거쳐 유라시아의 극동인 일본까지 갑니다.

 

일본에 미친 영향은 우리가 고스란히 알지요. 빵은 포르투갈 그대로고, 뎀뿌라도 tempora라는 포르투갈 말입니다. 카스텔라도 포르투갈 선원이 전해준 스페인 지방 이름이지요, 까스띠야.

 

해양왕국 포르투갈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 엔히크 왕자입니다. 서열상 왕이 되지 못하니 아예 바다로 에너지를 돌렸지요. 포르투갈이 대외 공세를 취한 사례인 세우타 정복은 좁은 바다 건너 북아프리카 구역을 점령한 것에 불과하지만 의미는 세계적이었습니다. 외침에서 벗어나 포르투갈 제국주의의 시초를 사례이기도 하지만, 바다를 등지고 살던 유럽 열강들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준 사례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항해왕자 엔히케는 포르투갈 남단 사그레스 지역에 항해학교를 설립하고 천문, 해양 선박 기술을 육성합니다. 토대 위에서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가 열린 거지요. 물론 엔히크는 시대와 지리로 읽어야 합니다. 왕권과 포르투갈의 이익에 복무했을 , 대중과 이성 또는 합리에는 관심이 없었지요. 저는 그의 업적으로 그를 기억합니다.

 


나온 김에 알고 보면 좋은 포르투갈의 상징 하나를 소개하면, 장식 달린 십자가를 로고로 사용한 그리스도 기사단입니다. 그리스도 기사단은 템플러인 성전 기사단의 일파였다가 포르투갈 왕실의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교황청의 허락을 받고 분리했습니다. 그리고 급속히 포르투갈화 되어, 왕이나 왕가의 일원이 기사단장이 되어 바다 개척의 중심 조직이 되었습니다. 말이 기사단이지 해적단 항해단이지요. 따라서 그리스도 기사단의 십자가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비롯한 모든 마누엘 양식의 필수요소이기도 합니다. 재미난건 현대에도 그리스도 기사단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포르투갈 대통령이 명예직으로 단장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발견의 탑에 올라가면 정말 아름답습니다. 바다같이 트인 테주강과 멀리 리스본 시내, 고요하고 아름다운 벨렝 주택지, 멀리 가물거리는 대서양이 파노라마로 보입니다.. 그리고 영예와 욕망이 뒤얽힌 잠시의 찬란한 역사. 아래로 보이는 해양 진출의 역사 지도가 아련합니다.

 


대서양 근처라 비가 수시로 오락가락 하긴 했지만, 해가 제대로 나니 만물에 부서지는 햇살이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그레고리우스가 덜컥 리스본에 왔다가 이내 후회하고 베른으로 돌아가려던 , 리스본의 따사로운 햇살에 마음이 녹아 주저앉는 에피소드는 리스본을 사람만이 절절히 공감할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발견의 탑과 인근에서 물과 하늘 그리고 공을 주고 받듯 랠리를 하는 햇살과 바람 속에서 무한한 행복을 느꼈습니다. 바르셀로나 여행 우리 가족 최고의 모멘트는 maremagnum 나무 데크였던것 처럼, 리스본 최고의 순간은 벨렝의 강변이 되었습니다. 역사와 의미보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과의 교감이 그리도 중요하네요.

 


발견의 탑에서 테주 강을 따라 서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벨렝 탑이 나옵니다. 런던탑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수도 방어의 요새였습니다. 대서양에서 리스본으로 들어오면 테주 강이 좁아지는 목을 반드시 지나게 되어 있는데 바로 위치에 대함 포격이 가능한 벨렝 탑이 있습니다. 이건 이스탄불 보스포루스 해협의 히사리도 마찬가지 입지입니다.

 


외부관계에 있어 대부분 평화로운 탑은 대내적으로는 내내 바빴던 탑이기도 합니다. 또한 런던탑과 마찬가지로 감옥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상징적으로 가장 극악한 형이 벨렝 지하 감옥인데, 가보면 극형인지 압니다. 강이 바다와 가까워 조수 간만의 차가 큰데, 지하 감옥은 만조 물이 차오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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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셋째 날은 벨렝 가는 날입니다. 시내에서 차로 20분 정도 외곽에 있습니다. 리스본 대지진 때 왕가가 화를 면하게 된 곳이기도 합니다. 공주들이 벨렝의 수목원이가를 가고 싶다해서 왕은 벨렝으로 이동했습니다. 벨렝의 성당에서 미사를 하던 중 발생한 지진에서 벨렝은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아 왕실도 안전했습니다. 후에 밝혀진 사실은 벨렝이 암반 위에 있어 지진에 강하다고 합니다


이런 우연으로 왕이 건재했고, 멘탈은 무너진채 카르발류에게 리스본 재건과 개혁을 일임해서 포르투갈은 몰락을 면했습니다. 왕이 죽고 도시와 경제가 파탄에 빠진채 왕위계승 전쟁이 나고 민심을 수습한다고 혹독한 종교적 구심점이 되는 왕이 나왔다고 생각하면 오늘날 포르투갈은 매우 다른 모습이었겠지요.

 

전날 미리 사둔 리스보아 카드를 사용합니다. 관광용 카드라서 모든 교통수단 아니라 주요 관광지에 무료 또는 할인으로 입장이 가능합니다. 리스본 시내 여행을 몰아서 때는 매우 효율적입니다.

 

덜컹거리는 트램을 타고 풍경을 정신없이 보다보니 금방 제로니무스 수도원이 나옵니다. 여기는 신트라의 페나성처럼 리스본 관광객이이렴 빠짐없이 들르는 곳이라 줄이 항상 깁니다. 시간 아끼려면 10 개장에 맞춰 가야 시간을 줄인다는 딸램의 성화로 아침부터 서둘렀는데, 가보니 효과가 있습니다. 10 정도 전에 도착했는데 줄이 짧아 개장하자마자 바로 입장했습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부속된 성당도 볼만합니다. 여기에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묻혀 있는데, 가장 유명한건 바스쿠 가마지요. 포르투갈의 위대한 문학가로, 바이후 알투에 자기 이름이 붙은 광장이 있는 까몽이스도 있습니다.

 


포르투갈의 융성 시대에 재임한 왕이 마누엘 1세입니다. 이때 지어진 건축물들이 당대의 화려함을 자랑하는데, 포르투갈 특유의 양식이 있습니다. 바다를 상징하는 패턴이 양각된다는 점이죠. 기둥을 보면 돌을 깎아 만든 밧줄과 , 산호초를 비롯해 대작은 바다생물 또는 괴물까지 나옵니다. 이는 바다에 기대어 살고 바다와 싸우며 나라를 발전시켜온 포르투갈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론 문맹이 많아 성서를 성당 벽에, 역사를 공공건물 벽에 새겨야 하는 중세의 특성도 반영이 된거지만요.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마누엘 양식의 전범으로 불리웁니다. 피렌체 두오모나 로마 성당 때처럼 한참을 들여다봐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보면 볼수록 새로운 오브제가 눈에 들어오고, 빛이 바뀜에 따라 자아내는 감성이 달라집니다.

 


아침에 일찍 움직여 배도 출출하고. 바로 나타 집으로 갑니다. 벨렝 빵집(Pasteis de Belem) 리스본 여행객의 필수 요소로 알려져 있지요. 나타(pastel de nata) 흔히 에그타르트라고 불리우는 빵의 포르투갈 이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난 에그타르트라는 명성을 먹어본 사람들마다 간증하기도 합니다. 저희 가족은 마카오에서 맛난 에그타르트를 먹고 정도 에그타르트를 찾아 많이 시도했었습니다. 주로 홍콩, 일본과 파리 같이 빵을 만들고 문화적으로 포트투갈과 그나마 연관성이 있는 곳인데요. 그래도 마카오만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에그타르트는 정말 다릅니다. 겉의 페스트리는 졸깃하게 바삭하고 안의 크림은 달지 않으면서도 식감 좋은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맛이 좋은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제로니무스 수도원에서 수녀님들 옷에 풀을 먹이는데 계란 흰자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남는 노른자로 에그타르트를 만들었는데 맛이 좋았고, 수도원 빵집에 레시피를 알려줬다고 합니다. 1837년부터 지금까지 빵집에는 항상 세명만 레시피를 알고, 셋은 함께 차를 타지도, 회식을 하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요즘 세상에 역공학하면 못할게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여행의 재미를 위해 브랜드 스토리를 믿기로 합니다. 그게 행복하니까요.

 

밥때가 아니라 맛이나 보려고 들어간터라 넷이서 여섯개를 시켰습니다. 먹다가 다들 입 딱 벌어지고, 먹고 싶어서 6개를 추가로 주문했지요. 주문 받는 핸섬한 서버 아저씨가 '쯧쯔 그럴줄 알았지' 느낌으로 눈을 찡긋합니다.

 

결국 인당 세개나 먹었음에도, 오후에 벨렝 지구에서 한참 놀다 숙소 가기 전에 다시 와서 6개들이 박스를 하나 사갔습니다. 놀라운건, 새로 에그타르트 그 밤엔 배불러 못먹고 다음날 되어서야 먹었는데, 그래도 맛이 훌륭했습니다. 가게에서 방금 만들어 따끈하게 내온 것만 못해도, 다음날까지 파삭함과 크림의 부드러운 질감이 유지되는걸 보고, 뭔가 레시피가 있긴 있나보다 생각했지요.

 

포르투갈 식으로 나타를 먹는 방법은, 고운 설탕과 시나몬 가루를 뿌려 먹는겁니다. 설탕은 단거 싫어해 생략하고 시나몬만 뿌렸는데, 과연 맛이 훨씬 깔끔해지고 많이 먹게 됩니다. ;; 아무튼 이후로도 나타 좋아하는 딸램 덕에 포르투갈 뜨는 날까지 매일 두개는 계속 먹었는데 다 맛이 좋았지만, 벨렝의 이집만한 곳은 봤습니다. 포르투에서 한집이 그나마 비슷. 그래서 저는 말했습니다.

 

벨렝의 나타를 먹는 순간, 다른 에그타르트가 맛없어 보이는 저주에 걸릴거다.

 

그래도 어느 레벨되어야 이상적인지 알려면 저주에 걸릴걸 알면서도 먹을 밖에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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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두 박물관을 나와 아름다운 알파마의 골목을 통해 리스본 대성당에 갔습니다. 여기 뿐 아니라 포르투도 그런데 그 도시 본당을 포르투갈에선 그냥 ()라고 하더군요. 저는 라틴 감성이라 그런지 성당 가면 마리아가 제일 좋습니다. 모성과 가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라틴 계 나라 어디나 마리아 성당이 가장 성대하고 시민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브라질과 스페인이 그랬듯 포르투갈도 그렇네요. 특히 대성당의 마리아는 미학적으로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파란 배경에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날고 있는 입체적 레이아웃은 넋놓고 한참을 보았습니다.

 


리스본 대지진 수없이 많은 사람이 상한 이유는 단지 진도가 높아서만은 아닙니다. 하필이면 대지진 날은 리스본에서 모든 성인을 기리는 만성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바로 큰일이 생긴다고 미신처럼 맹신하고, 국가의 자리를 대신해서 종교재판소가 만인을 압제하는 상황에서 리스본 시민은 빠짐없이 동네 성당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미사가 한창인 아홉시 반부터 땅이 뒤집히고 물이 일어서기 시작했지요. 리스본 대성당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상했습니다.

 

대성당을 나와 트램을 타려 몇발자국 걷는데, 알 것 같은 동상이 있습니다. 안토니우입니다. 리스본의 공식 수호성인은 비센트지만, 리스본 사람들이 가장 애호하는 성인은 안토니우입니다. 흔히 파도바의 안토니오라는 맞습니다. 성 안토니오는 뛰어난 설교로 많은 사람을 감명시켰고, 특히 잃어버린 사람과 물건을 찾는데 효험이 있다고 믿는 사람도 많습니다. Saudade와도 통하는 정서네요. 아무튼 이곳 태생이라 리스본 사람들의 최애 성인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리스본 사람에게 파도바의 안토니오라고 하면 싫어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리스본의 안토니우지 왠 파도바의 안토니오냐며.

 

안토니우 성인도 비센테처럼 알아보기가 쉽습니다. 깨달음을 얻을 아기예수가 현신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안토니우 성인을 표현할 아기 예수가 항상 따라옵니다. 딱 봐서 애기 안고 있는 성인은 안토니우지요.

 


그러고 보니 뒤에 아담한 성당이 바로 안토니우 성당입니다. 스페인어 이름이 안토니오, 포르투갈 오면 안토니우인지라 한번 들러보려던 곳이 눈앞에 떡 나타나니, 주저하지 않고 들어가 봤습니다.

 

작지만 정감이 넘치는 성당이었습니다. 인상 깊은건, 지하 석실까지 아주 나이 많으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힘든 몸을 끌고 숨을 헉헉 몰아쉬면서도 행복한 표정으로 계단을 가고 있던 장면입니다. 진짜 사랑 받는 성인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하늘은 어둑해졌지만 해지려면 아직 시간이 멉니다. 숙소로 가긴 아직 이르니 바이후 알투에 목적지 없이 구경이나 가기로 했습니다. 트램에는 사람이 많아 숨쉬기도 불편할 정도로 끼어서 갔습니다. 28번이 원래 그렇습니다. 그나마 한번에 탈 수 있으면 다행인거죠.

 

앞서 말했듯, 서울의 강남 나는 바이후 알투는 꽤나 .. 있겠지만 이땐 모두 지쳐 풍경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체력상 후퇴를 선언하고 숙소로 귀환 작전을 펼쳤습니다. 숙소는 바이샤지구에 있습니다. 지도로 보면 우리 위치에서 바로 직선 거리 수백미터도 안되는데 구글 맵을 돌려보면 아주 크게 돌아서 한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언덕과 저지대간 고도 차이의 탓이지요.

 

뛰어 내릴 수도 없으니 돌아서 걷자, 구글 맵 따라 터벅터벅 걷는데, 중간 쯤에서 아무리 봐도 저기에 길이 있을듯 했습니다. 길이 될 성 싶은 좁은 골목이 보이고, 사람이 지속적으로 들고 나는게 멀리 보입니다. 지친 식구들에게 있는지도 모르는 길로 한번 가보자고 하긴 어려워서, 식구들 잠시 쉬고 있으라하고 저만 먼저 가봤습니다.

 

세상에.

 


길은 없지만 엘리베이터는 있습니다. 원래 저희 투어 리스트에도 있는 산타 주스타 승강기입니다. 원래 바이샤와 바이후 알투 사이 고도차가 심해 만든 엘리베이터로 당시엔 대중교통의 일환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기계장치가 1902년에 완공되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요. 당시엔 눈이 휘둥그레해질만한 장관이었을겁니다. 지금은 고전미가 대단합니다.

 


바이샤로 바로 내려가는 길은 없지만 승강기를 타면 바로 가니 재미도 있고 몸도 편합니다. 승강기는 버스회사 소속입니다. 리스본 교통카드가 있으면 그냥 있지요. 줄을 잠시 대중교통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이샤로 귀환했습니다


염두했던 곳을 우연히 발견하는 재미가 컸고, 여행이란게 아는만큼 모르는만큼 각각의 재미가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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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은 밝았고 제일 걱정이 되는 날입니다. 예보상 가능성이 높았는데 다행히 아침 예보에 비는 없습니다. 다만 종일 흐린 상태에서 해가 감질나게 나왔다 들어가는 날씨이고, 나가보니 실제 온도보다 춥게 느껴졌습니다.

 

아침에 원데이 교통카드를 사고, 트램을 탔습니다. 리스본의 트램은.. 정말 정서적입니다. 언덕을 오르내릴때는 샌프란시스코의 느낌과도 비슷하지만, 유럽의 오래된 건물과 좁은 골목을 헤집고 다닐때는 테마파크에 가깝습니다. 리스본 여행자들의 수호신 28 트램은 주요 관광지를 죄다 커버해서 유명한데, 페소아의 100년전 책에도 나오는것이 신기합니다. 어쩌면 도시로서 시간속에 박제된 증거이기도 하니까요. 덕에 수도의 산업적 기능에는 제약이 있었겠지만, 세월 견디고나니 세상 어디에도 없는 관광적 가치가 생긴점도 아이러니 합니다. 전통과 현대, 기능과 미학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안되는 도시입니다.

 


전망대에서 잠시 바다, 아니 구경을 했습니다. 리스본 항구에는 거대한 강이 흐릅니다. 지리를 모르고 가면 영락없는 바다인데, 실은 테주 (Rio Tejo)입니다. 영어로는 타구스(Tagus)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강이란걸 아는 저도 보면서 말할 바다라고 말실수를 계속 정도로 대단한 강폭을 자랑합니다. 리스본은 어마어마한 테주 덕에 천혜의 바다 도시가 되었습니다. 대형 선박이 쉽사리 들어올 있지만 바다의 폭풍은 피할 있는 내륙의 항구. 바다의 확장적 접근성과 내륙의 통합적 기반이 뒤섞이는 도시.

 


그로 인해 고대부터 힘센 이들은 리스본을 장악하려 노력했습니다. 십자군 전쟁 안되는 성과를 이룬 곳도 리스본 수복인데요. 폭풍으로 길잃은 십자군이 포르투에 입항했습니다. 그리고는 포르투 대주교의 설득으로 리스본 공성 중인 왕을 만납니다. 왕은 함께 성을 치자고 했고 십자군은 양아치 기질을 발휘해서 거절합니다. 결국 리스본 왕이 3일간 약탈의 권한을 준후에야 만족해서 공성에 참가합니다. 리스본을 무슬림에게서 수복했지만, 십자군이 동료 가톨릭의 도시를 탈탈 털어버린 흑역사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물리적으로 강물이 벌떡 일어선 적이 한번 있었는데, 리스본 대지진이었습니다. 처음에 건물이 무너져 사람들이 깔리고, 한시간 정도 후에 쓰나미가 오면서 강물이 도시를 덮쳐 2 피해를 입혔다고 합니다. 부수고 씻어 내린후, 화재가 도시를 며칠간 불태웠습니다.

 

아무튼, 밀려드는 상념을 뒤로하고 목적지인 조르주 성으로 갑니다.

성은 윤곽이 매우 아름답고, 바이샤 지구 왠만한데서는 항상 보이기 때문에 관광객이라면 위에 뭐가 있는지 필요도 없이 본능적으로 가고 싶은 곳입니다. 최소한 저는 그랬습니다.

 


성은언덕 고도에 걸맞는 엄청난 풍경을 자랑합니다. 딸램은 불과 리스본 3일차인 조르주 성에서 인생 최고의 도시로 랭킹을 바로 바꿨을 정도지요. 이날 바람이 매워 원하는만큼 충분히 머무르진 못하고 성을 내려왔습니다.

 

성문에서 내려 걷다 비센트 동상을 봅니다. 비센트는 리스본의 수호 성인입니다. 비센트가 리스본으로 복귀할 배가 길을 잃었는데 까마귀 떼가 길을 열어주었고, 두마리 까마귀가 끝까지 함께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리스본의 도시 문장도 배와 두마리 까마귀입니다. 비센트 수호성인은 알아보기가 쉽습니다. 수도사가 배나 까마귀랑 함께 있으면 비센트입니다.

 


이어서 구불구불한 골목에서 길을 찾으려 구글 맵에 나침반까지 켜고 방향을 찾습니다. 골목 골목이 자체로 볼거리지요. 노후해도 사연이 숨은듯해 아름답습니다. 특히 글을 못읽던 시절 집주인을 표시하던 관습으로 주인의 사진이 문패로 걸려있는건 매우 인상적입니다. 주인의 아름다웠던 시절이 상상이 갑니다. 현지말을 안다면 눈마주칠때 커피라도 한잔 청하고 싶은 정도.

 


시내가 넓지 않고 언덕이 가파른 편이라, 걷기에 익숙한 한국인 걸음으로는 '벌써 다왔어' 정도로 빠른 시간에 평지에 도착했습니다. 의도하고 간건 아닌데 알파마 지구로 내려오니 파두 박물관이 보입니다. 가기 전에 일단 주린 배를 채우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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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은 일곱개 언덕위에 세워진 도시라고 불리웁니다.

 

실은 로마가 일곱 언덕위의 도시로 유명한데, 리스본도 그렇답니다. 로마와 비교하자면 리스본은 훨씬 밀집된 상태란 점이 차이입니다. 모퉁이를 돌면 바로 가파른 언덕이 나오고, 오르락 내리락이 여느 도시보다 심한 편입니다. 지도상 봤을때는 별로 멀지 않은 거리일지라도 언덕을 내려와서 다시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경우에는 생각보다 걷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리스본의 주요 지구를 알아두는건 여행자로서 유용합니다. 일반 여행지는 의미상 구분이라면 리스본은 지리상 구별이기 때문입니다.

 

리스본의 기본이 되는 중심축은 바이샤(baixa)입니다. 호시우 역과 광장에서 꼬메르시우 광장까지 직선 도로와 이를 가로지르는 도로들로 이뤄진 지구입니다. 낮은 지대란 뜻인데, 언덕의 도시에선 귀한 평지라 예전부터 사람들이 모여드는 중심지역입니다. 서울로치면 종로 쯤이겠지요.

 

대항해시대, 타국의 유럽인들이 바이샤를 보며 경탄했던건 체스판 같은 도로, 반듯한 도로입니다. 요즘 같아서야 무슨 대수냐 싶지만, 중세 말기 유럽의 거점 국제도시 이런 레이아웃은 단연코 리스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탁월한 기능과 미학에 대가가 없었겠습니까. 천년수도에 미래지향적 도시계획이 가능했던 이유는 리스본 대지진 탓입니다. 저도 이번에 '운명의 ' 읽고서 소상히 알게되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독실한 카톨릭, 아니 이를 넘어 미신처럼 맹신하던 리스본에 진도 9짜리 지진이 닥쳤습니다. 1755 11 1, 위대한 도시는 하루아침에 평지가 되었습니다. 왕마저 멘붕에 빠져 손만 부들거리고 사고능력 제로일 , 수습을 권한게 '외무'대신 카르발류입니다.

"전하 수습을 하셔야지요."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잠시 생각

"죽은자는 묻어주고, 산자는 먹여야지요."

간단한 답에 왕은 카르발류를 무한지지하고 리스본 재건의 총책과 재상으로 임명합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운빨 좋은 사내의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카르발류는 갈수록 국력을 잃어가는 포르투갈을 안타까워 하던 선각자입니다. 출신은 시골 무명 귀족인데, 아버지를 따라 리스본에 와서 살다가 일찌감치 과학과 이성을 숭상하는 대역죄인 스터디 그룹의 신지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우연으로 그가 개명한게 포르투갈엔 축복이 되었다는 점도 아이러니하지요. 그는 꾸준히 유럽 지식인과 교류하며 중상주의와 이성적 사고법을 수련하고 포르투갈 중흥의 기회만 노리던 차에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상황 고려하면, 죽은자는 묻고, 산자는 먹인다는 그의 답은 짧지만 생각은 깊은 겁니다. 죽은 자를 빨리 매장하지 않으면 전염병이 도는데 가톨릭의 의례를 존중하면 불가능 합니다. 산자를 먹이기 위해서는 치안가 식량 확보 및 다양한 행정적 통솔이 필요합니다. 카르발류는 그 짧은 시간에도 계엄에 준하는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하는 복잡한 조치를 시뮬레이션 했을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튼 졸지에 재상이된 카르발류는 전권을 가지고 일련의 특별법을 발동합니다. 가장 시급한 치안부터 잡습니다. 훔친자는 사형해서 잘 보이게 효수합니다. 치안이 잡히니 행정명령이 먹히기 시작하지요. 다음은 재건에 필요한 인력확보입니다. 하느님이 노했다고 기도만 하고, 리스본이 저주를 받았다고 도망가는 장정들에게 동원령을 내립니다. 재건의 인력을 확보한거죠. 다음 고정가격 강제매입과 징발 등으로 긴급식량을 확보하고, 특별세를 도입해 긴급 상황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합니다. 듣고 보면 고개 뜨덕여지는 이야기지만, 도시가 평탄화되고 왕에서 백성까지 모든 사람들이 모두 정신이 나갔을 때 하나하나 순서대로 수술하듯 진행한건 행정가와 전략가의 역량이 동시에 요구되는 일이라, 저는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리스본 재건 플랜. 런던 대화재 이후 탁월한 도시계획이 나왔지만 지주들과 이해관계로 실패하고 지금봐도 난개발의 런던이 사례를 통찰한 카르발류는 법과 여론조작, 요인 숙청  자기가 가진 권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끈기있게 리스본을 재건합니다. 마키아벨리즘으로 적도 많이 생기지만, 후세의 제가 봐도 카르발류 아니었으면 포르투갈은 동유럽과 다름없는 3 국가가 자명합니다. 동유럽 비하가 아니라 역사적 변곡점이 나라에 미치는 임팩트가 그러합니다.

 

아무튼 독재에 가깝게 리스본과 포르투갈의 정비안을 실행하여 리스본은 아름다운 도시로 거듭났습니다 물론 지진의 지독한 상처로 포르투갈은 이후 2류국가로 머무르게 되었지만, 당시 상황 고려하면 그나마 많이 건진거라 봅니다. 침몰하던 포르투갈 호의 경종이 되어 수습을 시작한 계기였습니다.

 

호시우 광장에서 북쪽으로 가면 폼발 동상이 있습니다. 바로 카르발류가 후에 작위를 받은게 폼발에서 후작 Marques de Pombal입니다. 바이샤를 폼발이 만든 거리라해서 폼발리나스라고도 합니다.

 

리스본 주요지역 한군데 소개가 길었네요. 나머지 여행객에게 중요한건 지구입니다. 바이샤의 서편 언덕인 바이후 알투(bairro alto), 동편의 알파마(alfama) 알면 됩니다.

 

바이후 알투는 우리로 치면 강남 정도 될까요. 젊은이들이 모여 놀고 깔끔한 새건물이 비교적 많습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까몽이스 광장도 있습니다. 


반면 알파마는 삼청동이라 할까요. 리스본 재건계획이 닿지 않은 곳이라 예전 그대로 모습이 남아 있고, 오히려 관광객의 눈을 끕니다. 굽이굽이 미로같은 골목은 현지인도 잠깐 한눈 팔면 길을 잃는다는 곳이지요


드디어 리스본의 첫 여정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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