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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Inuit 2007. 8. 15. 10:33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으니, 제게 있어 독서의 가장 큰 제약요소는 시간입니다.
그러다보니, 소설은 우선순위를 받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게다가 SF라면 더더욱 요원하지요.
지난주에는 휴가답게 느긋하고자 도서목록에 호사롭게 소설을 포함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Roger Zelazny

(원제) The doors of his face, the lamps of his mouth and other stories

몇몇 분의 긍정적 추천으로 리스트에 담아 놓은지 거의 1년이 다 된 책입니다. 그만한 세월을 기다린 보상과, 휴가의 금같은 시간을 낸 보람이 있습니다. 매우 흥미롭습니다. 어떻게 SF가 이처럼 지적이고 세련되며 함축적인 맛을 다 보일까 궁금할 따름입니다.


우선 몇천년이란 시간축과 우주라는 공간상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므로, 오히려 시공간의 제약없이 인간과 철학의 본질을 파고들어 생각하게 됩니다. SF의 특징인 과학은 오로지 시간과 공간의 확장에만 사용됩니다. 그래서 과학소설이 아닌, 별세계의 신화로 읽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시공간이 확장된 상황에서 상식은 모두 파괴됩니다. 3천년을 기다려 쾌적한 한랭행성을 만드는 사람들의 경우, 생물의 진화를 목격하면 생존을 원했던 인간과 자연을 관장하는 신 사이에서 스스로 정체성에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겠지요.

책에 나오는 모든 스토리는, 그래서 영롱하게 아름답습니다. 과학은 도구의 자리에 머뭅니다. 물리적이고 관측가능한 우주에 집중하는 외우주(outer space)가 아니라, 생명과 인간 안에 존재하는 내우주(inner space)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40년 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진부하지 않습니다. 마치 스타워즈의 세계관처럼 말이지요.
또한 스토리 자체가 흥미진진하고 몽환적입니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발상이나, 거대한 테마파크의 외곽을 등반하는 모티브 등 하나의 재미난 아이디어를 웅장한 철학과 신화적 상상으로 솜씨있게 엮어 나갑니다.

재기 넘치는 이야기로 베르베르의 '나무'를 꼽았지만 젤라즈니에 비하면 철부지 소년이었고, 기발한 상상으로 듀나의 '태평양 횡단특급'을 꼽았으나 이 책에 비하면 건강치 못한 염세성이 도드라져 보일 정도입니다.
SF를 특별히 싫어하지 않는 분이라면 한번 재미난 상상력의 세계를 만끽해 보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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