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돼..

이기중

서점에서 이 책을 처음 보는 순간, 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다음에 쓰고 싶었던 책이 바로 맥주에 관한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지만, 단연 맥주 애호가를 자처하는 저입니다. 우리나라에 알려진 맥주는 솔직히 곁가지 중에서도 방계 쯤 됩니다. 라거 계열이지만, 거품이 가볍고, 홉의 맛을 잦혀서 맥주 본연의 맛을 즐기기에 많이 부족합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맥주는 와인보다 열위의 카테고리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천 달러 넘는 와인은 많아도 맥주는 그렇지 않지요. 게다가 와인은 빈티지니 떼루와니 갖은 스토리로 스스로를 신비화하지만 맥주는 꽤 많은 사람들이 그냥 거품있는 술 정도만 압니다. 사실 그 맛의 넓은 스펙트럼과 다양한 깊이는 와인과 비교가 안되는데 말입니다. 원료로만 따져도 보리와 밀이라는 큰 두 축이 있어, 맥주는 그 맛의 다양성이 풍성합니다.

책은 매우 폭 넓은 맥주의 범주를 차근히 좇아가면서 정리를 했습니다. 가장 재미난 컨셉은 50일간 맥주 여행을 따라 내용을 적은 것이지요. 맥주 벨트라 불리우는 북부 유럽 6개국 (아일랜드,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체코)의 유명 도시에서 맛 볼 맥주를 적어놓고 하나하나 퀘스트를 수행하듯 시음하고 그 정취를 적었습니다.

무작정 마셔대는게 아니라 인류학 전공자답게 미리 맥주의 지도를 가설로 머리에 넣고 직접 체험을 통해 실제 지도를 완성합니다.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지만, 맥주의 한국적 등가는 막걸리입니다. 와인은 과실주고 맥주나 막걸리는 곡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막걸리를 'Korean rice wine'이라고 부르는건 어폐가 있지요. 그 곡물도 밀을 넣느냐, 보리를 넣느냐에 따라 맛의 출발점이 다릅니다. 그리고 싹튼 보리 (malt, 맥아)와 홉(hop)의 혼합으로 달콤한 부드러움과 상쾌한 쌉쌀함이 밸런스를 갖추게 됩니다.

지역적으로는 에일이 강한 영국+아일랜드, 필즈너 계열의 라거가 강한 독일과 체코, 그리고 밀맥주를 포함한 모든 맥주가 맛있는 맥주의 아티스트 벨기에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라하는 악마의 맥주 두블(Duvel)을 포함해 레페(Leffe), 후가르든(Hoegaarden) 등이 다 벨기에 출신이지요. 물론 마시는 빵 기네스나, 눈물나게 맛좋은 뮌헨 밀맥주 아우구스티너까지 책에 망라되어 있습니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미리 말하자면, 책은 내내 먹음직스럽지는 않고 오히려 백과사전처럼 퍽퍽합니다. 나중엔 뒷심이 달리는지 김빠진 맥주마냥 지루하게 나열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맥주의 세계를 제대로 다룬, 정교하고 상세한 지도를 얻었다는 것으로도 무척 기쁩니다. 저는 굳이 책을 안 써도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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