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uit Blogged
배흘림 기둥의 고백 본문
기분좋게 속았다.
요즘 제목에 속은 책이 몇 권 있었다. 이 책도 제목에 낚인 셈이다. 왜냐면 딸과 부석사 가기 며칠전 급히 구매했기 때문이다. 저술가 서현의 브랜드 파워를 일단 믿었고, 뭐가 됐든간에 부석사에 대한 전문적 정보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 책은 부석사 매뉴얼이 아니다. 그보다 범위가 넓고, 깊다. 우리 전통건축 생김새의 필연적 비밀을 파헤치는 과학적 프레임웍을 제시한다.
그런면에서, 기분좋게 속았다. 딸 사주고 나서 책을 몇장 들쳐보다가, 바로 내방으로 가져왔고, 휴일 일정을 바꿔 읽고, 새벽까지 끝을 보고서야 잘 수 있었다. 오랫만이다. 책을 더 보고 싶어 잠을 물린 기억은..
자연의 모습은 아름답다. 멋을 부리려한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변화했다. 부드러워지거나 길어지고 기발한 장치를 갖고. 동물, 식물을 넘어 산과 강이 다 그렇다.
건물은 어떨까.
분명 인공의 미를 추구하지만, 환경의 도전과 자원의 제약하에서 기능과 안전을 담당하는 건축 또한 적자가 생존하는 자연의 법칙을 그대로 따른다. 그래서 이 책은 전통건축을 진화론적으로 해석한다. 배흘림 기둥, 멋지게 들린 앙곡의 단아한 선, 낭만적인 처마, 낙수 떨어지는 댓돌까지 왜 그 자리에 그 모양으로 존재하는지 원인을 궁구한다. 이 부분이 최적화(optimization)이다.
건물은 문화다. 종종, 진화적 선택압이 사라진 이후에도 선대의 진화적 진보를 무의미하게 답습하거나 미 자체를 추구하기도 한다. 이 부분은 양식화(stylization)다. 이 둘의 구분이 중요하다. 그리고 배흘림 기둥은 그 교점에서 논란의 불씨를 제공한다, 물론 책에서 배흘림기둥은 단 한 페이지정도의 분량이고, 고대건축의 셀러브레티로서 얼굴마담일 뿐이지만.
서현의 설명은 유려하고 논리적이다.
우산에서 시작하여 기둥의 구조, 모임지붕, 맞배지붕, 우진각지붕, 팔작지붕에 이르는 지붕론을 바로 관통한다. 그리고, 포작. 우리 목조건축의 위대한 발명이자 꽃이 피어나는 화려함을 지닌 그 구조의 필연적 생겨남을 담담히 서술한다.
어떤 관점에서, 서현의 논리전개는 유려하되 검증 불가능하다. 어떤 문서나 학문적 정리 없이 다만 양식에서 추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학도의 reason과 경영자의 rational을 지닌 내가 판단하기에, 믿을 가치가 있다. 이 구조를 쓰지 않은 모든 목조건물은 천년의 세월을 못 버텼다. 오직 5개의 고려건물만이 오롯이 남아 상상력의 실마리만 겨우 던져주고 있으니..
우리나라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 이 책 꼭 한번 읽어라. 절집 하나를 봐도 구석구석이 다 달리 보일 것이다.
결국 안 속았다.
부석사 가기 전날 다 읽고 부석사에 갔고, 난 단숨에 부석사의 비밀과 역사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지적인 즐거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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