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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지 호르몬 본문
딱딱한 역사책일거라 각오하고 샀는데, 알고 보니 재미난 카툰이었다.
만일 이러면 왠지 수지 맞은 느낌일겁니다. 이 책이 딱 그랬습니다. 일에 필요해 공부하려고 읽었는데,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문장이 유려해 술술 읽히고, 한눈 팔기 어렵게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책은 15개 챕터에 걸쳐 성장, 사랑, 식욕, 성 등 인체의 작동을 관장하는 다양한 호르몬을 설명합니다. 각 챕터는 어떤 인물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해당 호르몬과 관련한 과학자나 의사의 분투를 적는 일관된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눈에 보면 어이없는 생각, 황당한 실패, 집요한 노력, 과감한 가설과 끈기 있는 실험 등의 이야기가 천일야화처럼 흘러나옵니다. 그러면서 해당 호르몬에 대해 조금 더 이해가 깊어집니다.
의외로, 책의 일관된 형식이 주는 미덕이 있습니다. 주변에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 이야기에게 생긴 진기한 에피소드로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이어서 과학사적 서술로 그 에피소드의 이유 또는 해결책을 읽게 됩니다. 매번 글이 완결성이 있되, 주간지 르포 기사를 읽는 듯한 가벼운 텐션이 좋습니다.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이는 저자의 이력 덕도 클텐데, 박사까지 의학을 전공한 채 AP 등 매체에 기고하는 전문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의학적 지식과 컬럼니스트의 예리한 각도, 작가의 매끄러운 글솜씨가 교집합으로 작용하니 세상 독특한 책이 됩니다.
책은 대체로 호르몬들의 발견 순서로 정렬한 전개라, 내분비학의 발달과정을 따라 가는 효과도 있습니다. 호르몬 백과사전보다는 개발통사 기분입니다.
지금은 받아들이기 쉽지만, 내분비학 이전엔 매우 받아들이기 힘든 개념이었을겁니다. 왜냐면 신경이 유선이라면 호르몬은 무선입니다. 뇌에서 신호가 나가면 난소에서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파블로프마저도 선 없는 점대점의 연결 양상이 나온 결과를 보고도 자기 실험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지, 원격으로 작용하는 어떤 화학물질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베일리스와 스탈링이 이 전달물질의 존재를 증명해서 호르몬이라 이름 붙인후에야 내분비학이 학문으로 인정받고 엄청나게 큰 하나의 분야을 이루게 됩니다.
내분비학의 발달도 백년 이상에 걸쳐 이뤄지다보니, 의료행위의 발전과도 궤를 같이 합니다. 예컨대 예전엔 환자에게 고지의무가 없어 검사받으러 온 환자에게 서비스로, 회춘하라고 정관수술을 해서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뇌의 샘플을 짐수레로 나르거나 뇌하수체를 우편으로 보내던 시절 이야기도 나옵니다.
읽고 나도 잊혀지지 않는건 의외의 대목이었습니다. 여성 과학자 이야기입니다. 저자 자신도 여성인데, 말도 안되게 고생한 선배 과학자의 노고를 담담히 적습니다. 기사체 특유의 중립적 감성으로 팩트만 나열했는데도, 독자인 제가 읽다 울컥하게 됩니다.
예컨대 조지아나 시거 존스는 임신 호르몬의 존재를 밝혀냈고, 1965년엔 세계 최초의 인공수정을 성공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당시엔 여성 과학자의 발견을 논문에 실어주지 않는 분위기라 이름을 G 에모리 시거로 중성화해서 등재가 됩니다. 이름을 이니셜 처리한겁니다.
로절린 얠로는 더 합니다. 미량으로 작용하는 호르몬의 정확한 양을 잴 방법이 없던게 불과 몇십년 전입니다. 호르몬이 얼마나 부족한지 모른채 결핍 진단을 내리고, 몇밀리가 적정한지 모르고 투여를 하던 시절입니다. 혈액 1밀리그램 내 1억분의 1 그램까지 미세한 호르몬을 잴 수 있는 방사면역측정법(RIA)을 개발한 사람이 로절린 얠로입니다. 그의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 과학자가 되고 싶었는데 지도교수는 과학자 조수가 되라고 조언
- 생화학을 배우려고 컬럼비아대 교수의 비서로 취직해는데, 비서 잘하게 속기술을 배우라고 권함
- 퍼듀 박사과정에 합격했고 모교에서 나중에 채용만 보장하면 합격인데, 헌터칼리지는 답을 안해줘 불합격.
- 결국 일리노이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이것도 남학생들이 2차세계대전에 참전해서 결원이 생긴 탓
- 박사과정 때 전과목 A+받고 딱 한과목 A-받았는데 학과장은 여성이 연구를 잘 할수 없다는 증거라고 비아냥.
- 브롱크스 재향군인관리국이 핵의학과 신설 때 합류. 연구실도 안줘서 수위가 사용하던 골방을 개조해서 사용
- 매일 연구실 출근하고 종종 야근했고 토요일도 근무. 주말엔 아이들 봐야해서 데리고 차에 숨겨 몰래 출근
애기 태어나면 발뒤꿈치에서 피 한방울 뽑는 검사 있지요? 결국 로절린 덕에 아주 간단하고 신속한 진단이 가능해집니다. 신생아의 갑상샘호르몬 결핍증은 조기에만 진단하면 고칠 수 있는데 시기 놓치면 잘못되기도 합니다. 미소량의 측정이 가능해졌기에 불임치료와 HIV 진단 등 수많은 호르몬 요펍의 중대 기반을 닦습니다.
더 웃긴건 그가 채용했고 평생의 연구 파트너였던 버슨이란 사람이 죽자, 로절린은 보조인력 취급을 받습니다. 의학박사도 아닌 이학박사이니 연구를 도운 테크니션 정도로 여긴겁니다. 이 대단한 로절린이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 50 넘은 나이에 의대진학까지 고려했다 합니다. 우여곡절끝에 결국 노벨상을 탑니다만 70년대까지도 여성 과학자의 지위란 투명인간이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책에서 배운 점이 많습니다. 폐경의 증상인 안면홍조가 제가 이름에서 연상하는 내용보다 훨씬 고통스럽다는 점이나, 옥시토신이 신뢰와 사랑의 호르몬 맞지만 정확히는 감정 증폭 호르몬이란 사실등은 처음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Inuit Points ★★★★★
과학책을 이리 재밌게 써도 되나 싶을 정도입니다. 호르몬에 대해 배운 점도 크지만, 이런 전달력을 닮고, 익히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호르몬과 과학적 방법론, 과학사적 관점 등 다양하게 배운 점이 많아 흡족한 독서였습니다. 별 다섯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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