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uit Blogged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 본문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맛나게 먹은 고기는 무엇인가요?
더 나아가, 지금까지 먹은 고기 요리중 가장 진귀하거나 기이한 경험은 무엇인가요?
글 머리로 이 질문을 던지고 저도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맛난 고기 경험은 많습니다. 어떻게 기준을 세워 갈라야할지 생각해봐야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특이한 육식 경험은 선뜻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려서 종종 먹은 번데기, 어두운 레스토랑에서 칼 대자마자 피가 분출해 놀랐던 파리의 부댕, 도쿄 출장에서 먹은 말고기 육회 바사시.
우린 매일 무언가 고기를 먹지만, 막상 그 재료는 단순하고 표준적입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이라는 범주 내에서 먹기 십상입니다. 평생의 육식 편력에 물음표를 던진 책입니다.
제목만 보면 채식주의의 교범처럼 느껴지나봅니다. 아내에게 '이 책 재미나 나중에 한번 봐.' 했더니 비건을 위한 책이냐 묻더군요.
십자군 이야기로 이름을 널리 알린 만화가 김태권. 하지만 그의 진정한 본질은 작가입니다. 이야기를 잘 전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거나 점토를 빚고 혹은 글을 씁니다. 미학과 출신이라서인지 그의 글은 철학의 향기가 은은합니다. 대 놓고 말하지 않으나 읽고 나면 뭔가 생각이 많아지고 깊어집니다.
이 책 역시, 맛은 좋은 고기지만 고기가 되기 전 동물이 살생되는 과정에서의 미안함, 즉 본성과 이성간의 긴장과 화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거대 담론같네요. 한겨레 컬럼의 모음집이라 간단히 잘 읽히는 글들입니다. 재미난 중심 이야기 하나와 그에 부수되는 짧은 상념을 엮은 글들입니다.
유럽에서 한국까지, 고대에서 현대까지 시공간을 촘촘히 훑어 고기 먹는 이야기를 합니다. 저도 처음 듣는 인상적인 메뉴가 많습니다. 게다가 작가 특유의 탐구정신이 보태져 가담항설들의 검증까지 시도합니다.
하지만 낱글의 밑에 버티는 생각 구조는 다시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로 돌아갑니다. (비건을 선택하지 않는 한) 고기를 안 먹을순 없다 치면, 가급적 덜 먹고, 먹되 존중의 마음을 지니는게 그나마 옳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다는 아닙니다. 산업화된 고기시장은 의도적으로 동물로서 사육을 재료로서의 고기와 분리합니다. 누구든 자세히 알면 식욕이 떨어지거나 절제를 하게 될 테니까요. 따라서 육식을 피할길 없다쳐도 최소한 사육과 도축과정에서 잔인함은 피할 수 있다면 좋겠지요. 여기서도 다시 인간사회의 문제로 회귀합니다.
정말 그렇게 공정하고 윤리적인 사육과 도축과정을 지켜서 고기값이 오른다면? 이미 cow와 pig, beef와 pork라는 단어에 포함된 계급구조가 재현되지는 않겠느냐는 겁니다. 고기값이 비싸지면 육식은 이제 돈 많고 지위 높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됩니다. 이게 또 온당한지는 생각할 일입니다.
그런면에서 다소 정신승리같은 답이지만 이누이트(inuit) 족의 고기에 대한 예의가 인간과 생태계 간의 적절한 거리감 아닐까 생각합니다. 필요한 만큼만 먹되, 고기가 된 동물에 제를 지낼만큼의 생각과 의식이라는 정신의 비용을 치른다면, 무분별하게 소비하진 않을 수 있겠죠. 슬픔과 잔인함을 외부화하고 맛만 즐기면 폭주하게 마련이니까요.
Inuit Points ★★★★☆
개인적으로 친하고 좋아하는 작가의 글입니다. 컬럼을 재료로 사용하여 만든지라, 최대한 미디어적 특성에 맞추려 주말에 한두개씩 1년 넘게 읽었습니다. 휘리릭 읽는 것과 또 다른 느낌입니다. 작가님은 지인들 간에 '썰렁한 유모어"로 유명한데 책에도 군데군데 등장합니다. 깔깔이 아니라 피식 웃게 되는 이 썰렁 유머를 찾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다재다능한 작가라 싸인도 예술입니다.
표지와 삽화도 직접 그렸기 때문에 내용과 싱크로도 좋고 디자인적으로 훌륭합니다. 다 읽고 육식에 대한 입맛이 전혀 떨어지진 않고 오히려 먹어보고 싶은 메뉴가 더 생기는 부작용은 있지만, 습관적 육식에는 생각의 제동장치를 가질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별 넷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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