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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Inuit 2019. 3. 30. 08:30

이렇게 우아하게 재기발랄한 글을 본게 얼마만일까.

만난적은 없지만, 페친이 낸 책이라 출간소식을 듣고 일찌감치 사두었습니다. 몇 달간 급히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아 미뤄덨다가, 여행가는 독서처럼 눈과 상상의 호사를 누려보고 싶은 충동이 든 어느날, 읽던 책 치워두고 꺼내 읽었습니다.

김혼비

개인주의적이라 집단 운동과 거리가 멀고, 학생때 체육시간 이후론 크게 땀흘릴 일조차 별로 없었던 젊은 여성이 갑자기 '동네' 축구단에 들어가 운동을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선 국가대표 축구가 먼저 연상되는 축구입니다. 외국에서의 일상성보다는 이벤트성이 강합니다. 게다가 저처럼 축구를 정기적으로 보는 사람도 직접 축구 클럽에 들어갈 생각은 선뜻 들지 않는데, 저자는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랬을까요.

처음 덜컥 지원서를 내놓고, 가기 싫어 날씨가 안좋기를 바라다 어색한 운명에 코꿰어 끌려가듯 시작한 클럽 축구입니다. 서서히 적응하는 과정부터 재미납니다. 마치 독자도 얼결에 친구따라 축구 클럽에 가 있는듯한 어색함, 차차 스며드는 인간관계, 익숙지 않아 뻘쭘한 연습과정과 숨이 턱턱 막히는 시합 모습까지 생생합니다.

눈앞에 그려지는 이 생생함은, 아마 영화를 전공한, 천상 글쟁이인 저자의 재능 탓일겁니다. 묘사가 세밀하면서도, 애써 거리를 두는 영국 스타일 블랙유머와 자학 개그가 야금야금 탐독하게 만듭니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밑을 단단히 받쳐, 단어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빛납니다.

그래서 이 책은 여자축구 이야기지만, 그냥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축구는 재료일뿐입니다. 그리고 여자 이야기.

차츰 이야기속 세계관에 익숙해지고, 감정적 일체감이 느껴질 즈음 저자는 여성의 문제를 슬몃 올려둡니다. 어느 지역, 어느 커뮤니티에도 스며있는 차별과 기울어진 운동장의 이야기를 풀어놓지만, 머리에 띄 두르고 고함치는게 아니라, 벤치에 나란히 앉아 지난 이야기하듯 담담히 말합니다. 그래서 더 슬프고 공분도 깊어집니다.

축구, 여자란 키워드는 잊고, 그냥 재미난 글 읽고 싶은분은 무조건 보세요. 2019년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이야기임에도 가브리엘 마르케스 같은 마법적 리얼리즘이 자아내는 환상계 같습니다.

 

Inuit Points ★★★★★

저는 오래전부터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여자란 말을 잘 안썼습니다. '여성'이 중립적이라 생각합니다. 단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여자'라는 말의 현대용법이 폄하적이라 스스로 저어하게 되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냥 내 언어가 비루한 거구나.

여성주의적 시각이 알뜰한 저자가 본문에서 여자라는 단어를 마음껏 쓰는데, 그 용법이 시스터간의 연대의식을 넘어 보석을 다루듯 섬세하고 휘황찬란합니다. 여자란 말을 이렇게 우아하게 쓸 수 있다면 굳이 물빠진 느낌의 '여성'을 필요이상으로 쓰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아직 그 재주는 없습니다만. 문체의 쫄깃함만으로도 별점 다섯이고 감동까지 더하면 별점을 넘겨서라도 주고 싶은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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