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공대에서 구조역학을 전공했습니다. 이 학문은 물리학, 그중에서도 뉴턴의 고전적 세상입니다. 힘과 변형을 다루는 정역학, 시간을 감안해 미분과 적분을 왔다갔다하며 진동문제를 푸는 동역학 등이 범주입니다. 그러니 학교 때, 아인슈타인의 세상은 멀게 느껴졌습니다. 슈레딩거는 딴나라 이야기 같았고요.

 

한번은, 물리학과에 다니는 친구에게 상대성 원리를 설명해 달라고 한적이 있습니다. 외계어같은 소리와 공식을 읊조리는데, '야야 됐어 당구나 치자'하고 말을 막았었지요. 당시 저도 인내심이 없었지만, 친구도 실상 제대로 알지 못했었다는 점을 나이 들어서야 알게 됩니다. 개념을 확실히 이해하면 청자의 눈높에에 맞춰 환언(paraphrasing) 가능하기 마련이니까요.

 

어쨌든, 이해는 안가도 년에 한번은 들춰보는 분야가 상대성 원리나 양자역학입니다. 그리고 책은 그런 주제인지도 모르고 읽게 되었습니다.

L'ordine del tempo

소개받을 그냥 과학 에세이 정도로 이해했던 책은 현대 물리학의 끝판왕입니다. 물리학의 프론티어에 서서, 지금까지 정리된 이론의 경계 너머를 모색하는 과학자 카를로 로벨리가 아직 정설로 인정받지 않은 자신의 견해까지 망라하여 한가지 주제를 설명합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책은 시작부터 기어를 높여 달립니다. 산 위 친구와 아래 친구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는 사실로 출발하여 중력장이 시공간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고유한 시간 따윈 없다고 고정관념을 부숩니다.

 

심지어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의 방향도 없음을 설파합니다. 그나마 상대성 원리라는 아인슈타인의 세상은 상상을 동원하면 어렴풋이라도 느낌이 옵니다만, 시간의 양자성으로 들어가면 직관 따윈 압사당하고 순수한 추상의 세계로 진입합니다.

 

시간은 중력장의 시공간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양자적 성격도 띕니다. 그래서 시간의 입자성을 수긍하면 시간이 연속적이지 않음을 받아들여야합니다. 시간이 중첩하는 미결정성을 인정하면 과거-미래의 차이가 의미 없어지고, 결국 시간이란건 물리적 실체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결국 시간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건 엔트로피입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에너지가 아니라 엔트로피라고 간주하고 있죠.

 

그럼 우리가 경험한, 목격한 시간은 대체 무엇일까요?

로벨리는 말합니다. 시간에 상응하는 가장 근사한 물리량은 열적 시간입니다. 시간의 경과로 보이는 모든 현상은 엔트로피의 증가 뿐입니다. 그리고 엔트로피 자체는 우리의 주관적, 관계적 세계란 점을 역설합니다. 흐릿한(blurring) 시각이 선명해지는 과정이 엔트로피의 증가란 뜻입니다.

 

과학의 서늘한 결론은, 기억, 원인과 결과, 과거의 확정성, 미래의 비결정성은 모두 통계적 결과에 우리가 붙인 이름이란 점입니다.

 

여기서 탁월한 부분은 '그럼에도 시간은 있다' 로벨리의 관점입니다. 확정적이지 않은 수많은 시간 속에서 내게 의미있는 하나의 시간은 '현재' 이름으로 존재하고, 현재와 현재 사이가 시간입니다. 따라서 주관적 시간의 중요 요소는 놀랍게도 '기억'입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 우리의 선택이 있고, 선택의 기준은 기억과 예측을 토대로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Inuit Points ★

책은 아름답습니다. 추상의 끝판왕인 물리학을 섬세한 시인의 필치로 설명했습니다. 물론 이해가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일반인이 알아듣기 쉽게 다양한 비유와 환언으로 설명하는 노력은 대가만이 지닐, 압도적 높이의 사유입니다.

 

예컨대 제가 매료된 부분입니다.

세상은 사물로 이뤄지는가 사건으로 이뤄지는가.
답은 사건이다.
사물은 시간 속에 매우 오래 머무는 사건이기 떄문이다.

양자적 시간의 난해함을 인정하면서도 주관적 시간과의 연결고리를 통해 현대물리학과 인문적 삶을 화해시킨 점이 놀랍습니다.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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