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uit Blogged
편집광만이 살아 남는다 본문
현장에서 경영을 하는 제게, 경영학은 교과서가 아닌 실전 교범입니다.
배우고 써먹으며 익히고, 다시 수정하여 배우지요. 수많은 경영인과 선인(先人)에게 배웠지만, 제 경영학의 정신적 토대가 되는 두 스승은 피터 드러커와 앤디 그로브입니다. 드러커는 경영학을 사회과학의 반열로 올렸으니 그 통찰의 힘은 언어 이면에 있지요. 반면 그로브는 드러커를 육화 했습니다. 아카데미아의 훌륭한 이론을 실전에 어떻게 적용할지 보여준 사람이죠. 특히 그로브의 공학적 세계관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아, 최근 유행한 OKR을 만든것도 그로브에요.
Only paranoid survive: How to exploit crisis points that challenge every company
Andy Grove, 1988
책을 읽은 느낌은, 양가 감정입니다.
내용은 좋지만 누구나에게 도움되진 않는다.
이 일이 닥친 사람에겐 긴요한 처방이지만, 무관한 사람에겐 그저 시큼한 비타민입니다.
책의 핵심 주제는 단 하나입니다. '격변에서 살아남기'입니다. 저는 책 읽기 전까진 편집광에 방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디테일에 집착해야 성공한다는 느낌이었지요.
아닙니다.
이책은 살아남기(survive)의 책입니다. 편집광은 거들뿐입니다.
워낙 예전 책이라 맥락을 알면 조금 도움이 됩니다.
아주 조그마한 부품 제조 업체였던 인텔. 무어와 노이스가 페어차일드에서 독립해 처음 차린 회사에 데려간 똘똘한 3번 사원이 그로브였습니다. 이들은 공학적으로 우수한 메모리를 만들어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두가지 격변을 겪지요.
하나는 버티컬 화 되어 있던 PC 시장이 가치사슬 따라 수평적으로 통합되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이때 전문화를 해서 규모를 키우고, 규모의 경제를 향유한 업체만이 살아 남게 되죠. 인텔은 이를 통해 어엿한 메이저 회사가 됩니다.
이어 두번째 격변은 잘 알려진 인텔의 피봇입니다. 메모리 산업 자체가 공정기술과 생산성 싸움이 되다보니 일본업체의 공세를 이겨내기 힘듭니다. 회사가 존망의 갈림길에서 무어와 그로브는 이야기를 하죠.
자 우리 회사가 망해서 팔렸다고 하자. 새 경영진은 무엇을 할까?
메모리 사업을 접고, 마이크로프로세서로 몰빵 하겠죠?
그치? 자 그럼 우리가 망했다 치고 저 문을 나갔다가, 새로 샀다치고 다시 들어오세.
이들은 경쟁력이 떨어지는 메모리 사업을 가차없이 정리하고, 인텔의 기술역량을 극대화 하는 CPU로 피봇해서 지금의 인텔을 만들죠.
그로브의 입장에서 볼게요.
이 두가지 격변은 인텔이 이름 없다 사라질 업체가 될지 세계 최고의 회사가 될지 가르는 큰 흐름이었습니다. 실력보단 우연의 도움이 더 컸다고 느껴지는 상황이죠. 이 과정을 겪으며 그로브는, 편집증이 생깁니다.
저런 격변을 알아채고 싶다.
그 격변을 견디고 살아남아 급성장을 하고 싶다.
결국 책은 이러한 격변의 흐름을 알아채는 방법과 실행에 관한 내용을 말합니다. 그러다보니, 회사의 선장이나 조타실에 있는 사람이 아닌 한 그닥 재미없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지만, 방향타를 쥔 사람에겐 문장하나 놓치기 싫은 귀한 내용이죠.
그로브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어떻게 알아채나? 포터의 5가지 힘에 보완재(complementor)를 더해 6가지 힘을 관찰하라고 합니다. 그중 하나 이상이 10배의 힘이 된다면 아주 면밀히 검토하라고 합니다. 이를 전략적 변곡점(strategic inflection point)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변화의 실행입니다. 일반적 조직의 한계점과 같은 지점을 고민합니다.
"많이 대화하라. 최고의 인재를 옮겨라, 정했으면 겁내지 마라."
제 관점에선 세부보다 큰 틀의 징후포착에 대한 내용이 감명 깊었습니다.
책 나온지 오래되었으니 상황을 감안해서 보면 외려 도움이 됩니다. 예컨대 말미의 한 챕터가 그렇습니다. '인터넷이란 무엇인고'에 대해 한 챕터를 할애해서 고민과 노력을 적습니다. 지금 보면 고민 거리도 안되지만, 당시엔 오리무중이었을겝니다. 유사한 수많은 혁신기술이 왔다가 사라졌을테니까요. 또 하나 배운건, 인터넷에 대한 그로브 방향성이 옳았고 상상을 치열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훨씬 더 크고 심원한 변화가 진행되었다는 점입니다. 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요. 지금, 챗GPT의 논의도 유사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서비스 챕터가 의외로 인상깊었습니다. 기업에게 전략적 변곡점이 있듯, 개인에게도 경력적 변곡점(career inflection point)이 있다 말합니다. 기업과 마찬가지 프레임으로 생각해볼 것을 말합니다. 막연히 느끼며 그리 행동하며 살아 왔지만, 똑 떼어 명확히 말하니 더 또렷이 보입니다. 그리고 제 인식의 지평이 훨씬 넓어졌습니다. 즉 산업적 변곡점이 올 때 개인도 준비해야, 그것도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점이지요.
Inuit Points ★★★☆☆
그로브의 글만 읽어도 기분이 좋을 제게 몇몇 깨달음까지 있었으니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주제의 협소함과 과하게 옛이야기란 점에서는 적극적으로 추천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원전을 놓고 배우려는 경영자들에겐 좋은 자료입니다.
예전 인텔의 투자를 받는 과정에서 인텔 내부의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단 3분이지만 오텔리니 회장과 독대도 했었지요. 그래서 인텔에 많은 관심과 적절한 애정도 있습니다. 현재 인텔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않으니 책 읽으며 다양한 생각이 듭니다. 인텔의 헛발질을 단 하나 지점으로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PC 에서 스마트폰으로 옮겨가는 시점의 결정적인 판단착오는 뼈아플겁니다.
책 읽다 생각했습니다. 그로브가 버티고 있었다면 그때 잘 따라오지 않았을까. 지금 ARM이 저 위치를 가질까. 아니, 그보다도, 모바일 이전까지의 엄청난 성장은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룬거겠구나. 그로브의 저 편집광 적인 생존 정신이었겠구나. 겉보기 순탄할 뿐 이미 많은 계곡을 지나왔겠구나.
저와도 오래 교류한 유정식 님이 번역했기에, 잘 읽힙니다. 이제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그로브의 글을 본 것 만으로도 좋았습니다. 별 셋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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