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uit Blogged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본문
1️⃣ 한줄 평
평냉 같은 미스터리 단편집
♓ Inuit Points ★★★☆☆
차페크가 실험적 글쓰기로 선택한 형식은 단편 미스테리 소설이었습니다.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생각해 봅니다. 미스테리라는 장르적 특징을 준수하니 추리나 반전, 호기심과 경이 같은 재미도 있습니다. 워낙 예전이라 요즘 글에 비해 덜 자극적입니다만, 깊은 맛이 있습니다. 평양냉면처럼 말이죠. 별 셋 주었습니다.
❤️ To whom it matters
- 미스터리, 추리 쪽에 내가 좀 친다 하는 분
- 독특한 형식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
- 체코나 근대 유럽 문학에 관심 있는 분
🎢 Stories Related
- 카렐 차페크는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와 함께 체코 문학 3대장으로 꼽히는 작가입니다.
- 이 양반 이름이 낯설지만 친숙하기도 합니다. 로봇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이니까요.
- 차페크와 별개로, 골렘이라는 말도 프라하의 도시 전설로 시작해 수많은 유럽 문학의 재료가 되었죠.
Tales from one pocket
Karel Čapek, 1929
🗨️ 좀 더 자세한 이야기
책을 읽다보면, 실마리를 찾아 범인을 추리하기보다는 그 시대와 작가 차페크를 생각하게 됩니다.
왜 그는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글쓰기 실험의 도구로 썼을까.
1920년대는 애거서 크리스티, 앨러리 퀸 등이 맹활약하며 포와 도일에서 성립된 추리소설 장르의 황금기입니다. 대중적 기대도 풍성하지만, 작가로서도 연마해보고 싶은 장르였을겁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전문 추리작가가 아니라서 차페크의 미스터리는 독보적입니다.
우선 분량입니다.
꽁트, 요즘 초단편에 가깝게 짧습니다. 디테일한 빌드업, 떡밥 배치와 회수 등엔 큰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짐짓 아이디어 기록용으로 쓴 마냥 큰 뼈대따라 훌쩍 전개됩니다.
둘째, 인물과 사건이 단촐하고 소박합니다.
소규모 극장의 연극 같습니다. 배역 수가 극도로 적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공간이 좁고, 정적입니다. 그래서 사건에 집중하기 좋습니다. 심지어 사건조차 완전 복잡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반전에 대한 강박이 없습니다.
반전을 위한 반전을 넣으려 애쓰지 않습니다. 어떤 글은 반전이 있지만, 어떤 글은 뒤집힘 없이 슴슴히 끝납니다. 영악한 독자라면 이미 반전의 방향이나 범인을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위장이 적은데, 글솜씨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별로 신경쓰지 않은 느낌입니다.
이 요소가 모여 독보적 장점이 됩니다.
문장은 흡인력 있고, 독후의 정서가 매력적입니다. 내내 깔려있는 작가정신 덕입니다. 모든 글에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 묻어납니다. 누구 하나 절대 악도 없고, 문제 푸는 사람에겐 무당 같은 직감이나 홈즈 같은 가추적 추리 능력도 없습니다. 이상한 사건이 벌어졌고, 합리적 지성인이 최선을 다해 전모를 추정할 뿐입니다. 더러 추리에 실패하기도 하고, 미스테리의 정답 자체엔 관심 없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결과로, 인간에 대해 집중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SF와도 같은 효능입니다. SF가 시공간 또는 물리 법칙을 살짝 완화해 인간과 사회의 진실 혹은 부조리를 비춰보듯, 차페크의 이야기는 미스터리를 통해 인간 자체를 들여다봅니다. 즉 사건의 진범은 처음부터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각자 보는 진실이 다를 때, 그 진실에 향하는 길이 무엇인지, 어떻게 찾을지가 그의 궁극적 물음입니다. 우리 모두 불완전한 인간일진대 어떤 기이한 사건을 통해 옳고 그름, 도덕과 선한 의지가 뭔지, 곱씹어 보게 되지요.
그래서 차페크의 글은 평냉 같습니다. 맹맹한데 자꾸 생각나는 맛이에요. 문장이 스릴과 서스펜스 넘치는 화려한 전문 추리소설에 비하면 밋밋하지만, 외려 기품이 있습니다. 동료 인간에 대한 온정의 눈길, 조국 체코에 대한 자부심, 근대 유럽의 다양한 상세 등이 얽혀 우러나오는 멋이 있습니다. 정밀화보다는 스케치 같은 원형적 미스터리에서 시작해, 차페크가 글쓴 목적인 미스터리의 철학화가 독특한 매력입니다.
작가의 임무는 미스터리를 푸는게 아니라, 더 깊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말은 울림이 셉니다.
아주 예전 책이라 잊혔지만, 더 많은 사람이 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