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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scana trip (1): 사막의 풍요

Inuit 2025. 7. 23. 14:57

아내와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 다녀왔습니다.

이번 여행의 컨셉은 '사막의 풍요'입니다.

 

작년 산티아고 순례길은 삶의 변곡점이었습니다. 좋았는데 이유가 뭘까 반추했습니다. 문득 깨달았던 '사막의 풍요'입니다. 절제된 감각 속에서 삶의 의미가 풍성하게 닿는단걸 알게 되었습니다.

 

비행

가장 어려웠고, 완수 뿌듯했던 도전은 '적막한 비행'입니다.

 

유럽가는 12시간 비행이면, 통상 영화를 세개쯤 봅니다. 영화로 시간을 때워야 지루하지 않으니까요. 이번엔 갈때 올때 영화를 한편도 보지 않았습니다. 음악도 듣지 않았습니다.

 

대신, 철저히 아날로그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읽고, 쓰고, 다시 읽다 시들하면 복도 꼬리까지 가서 한참 있었습니다. 마침 아내도 따라나서 둘이 서서 오래 속삭이다 들어오곤 했습니다.

 

처음엔 참는데까지 참아봐야지 했는데, 외의로 저자극에 익숙해지니 크게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비행하니, 부산물로 눈이  편했고, 비행시간도 생의 일부 같았습니다. 억지로 시간 때우고 졸면서 서울에서 유럽으로 분절적 이동을 하는게 아니라, 연속적 경험으로 이동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동안의 생각과 느낌이 온전히 제것이었으니까요.

달리기

현지에서 매일 달렸습니다.

달리기를 시작한 이후론 여행지에서 달립니다. 사막의 풍요가 목표라 이번엔 더욱 열심히 달렸습니다.

 

첫날 볼로냐 달리기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탐험적 달리기(explorative run)였거든요. 체류 기간이 짧아 못가봤던 대학지구까지 달리니 금방 도착입니다. 좋은 스팟 있으면 잠시 사진도 찍고 고르고 달리고, 다시 좋은 풍경 있으면 돌아본 달리는 식이었습니다. 페이스에 강박이 없으니 뛰어 다니는 여행입니다. 도보에 비해 커버리지가 넓어 좋았습니다. [볼로냐 달리기 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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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 시골에서 달리기는 좋았습니다. 숙소가 산지라 의도치않게 인생 트레일런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침 분량인 5km 달리려면, 아득히 높고 낮은 산을 두어개 넘어야 거리가 나옵니다. 실제로 지형을 보고 아득했지만, 촘촘하게 뛰다보니 어느새 완주했고 시시각각 펼쳐지는 풍광에 감탄하며 달렸습니다. 매일 아침 설레임 속에 달렸습니다. [토스카나 산골 달리기 릴스]

 

Unconnected

토스카나 산골에 머무는 동안은 인터넷 연결이 거의 되지 않았습니다. 방의 위치가 음영지역이라, 와이파이도 데이터 로밍도 한칸 뜨다 사라지기 일쑤였죠. 그러나, 저는 익숙한 상황입니다. 작년 산티아고 순례길 갔을 때도 산골을 지나는 3주동안 그랬거든요.

 

업데이트를 위한 메일과 페북은 텍스트 위주로 눌러두고 느긋이 기다렸다가 읽습니다. 일할 때는 개방된 실외에서 작업했습니다. 심심할 아내나 형님누나, 주인과 수다 떨고, 그도 지루하면 끄적끄적 그리고 메모하며 지냈습니다. 순례길에서 그랬듯, 여기서도 연결되지 않은 순간이 도리어 순수한 즐거움(pure joy)였어요.

 

식탐하지 않기

제가 원래 맛난 좋아하지만, 여행가면 특히 먹을 것에 집착합니다. 여기 오면 이건 먹어봐야 하는' 리스트가 길어서 그렇습니다.

 

이번엔 아예 먹을 것에 대한 기대를 낮췄습니다. 꼭먹(Must eat) 리스트를 아예 갖고 가지 않았습니다. 되면 근처 평점 좋은 식당에서, 눈에 보이는 메뉴로 먹었습니다. 심지어 예전에 극혐했던 방식, 있는 음식으로 대충 때우는 식사도 많이 했습니다. 심지어 호텔 조식도 대동소이하다고 싫어했습니다. 새로운걸 먹어볼 기회가 사라진다고 생각했어요.

 

놀랍게, 음식이 소박해도 여행의 기쁨이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는걸 배웠습니다. 이미 달라진 풍토와 물산이면, 어떤 음식도 미식입니다. 싱싱한 재료 사다가 만들어 먹은 요리도 맛났고, 근처에서 사다 먹은 피자도 훌륭했고, 밥먹을 시간이 없어 카페에서 대충 먹은 커피와 빵도 기쁜 식사였습니다.  

 

P 여행: 계획따윈 갖다 버려라

극강의 J입니다. 여행을 간다치면 사전에 많이 공부하고 준비합니다.

이번엔 무계획을 염두하고 갔습니다. 개략적으로만 알아두되 상세를 짜두지 않았습니다.

 

볼로냐 같은 경우는 중앙역에 내린 후에야 이제 어디가볼까나 검색을 했습니다. 예전의 저라면 있을 없는 일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해 2시간 체크인 시간과 짐가방을 지닌 가야할 상황을 고려해 MAMBA라는 현대 미술관에 갔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짐을 카운터에 맡아 주셔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 쐬며 모란디를 비롯해 다양한 미술을 실컷 감상했어요. 볼로냐의 인상까지 좋게 만든 경험이었습니다. 만일, 예전의 저처럼, '두시간 남았다면 두개의 들러서, 마조레 광장 갔다가 여기서 젤라또 먹은 숙소로 이동해야햐 .' 시나리오로 갔다면 이만큼 즐거웠을까요.

 

밤에도 검색해서 찾은 식당에 가려 문을 나서는 순간 뇌우가 쏟아졌고, 모든 관광적 소망을 깔끔히 접었습니다. 근처에 이쁜 집에서 맛나게 먹었습니다. 식사 마칠 때쯤 비가 그쳐 보너스처럼 시내를 잠깐 둘러볼 있었고, 뇌우 보상으로 무지개까지 봤습니다.

 

뭔가 스케줄이 단단히 꼬였지만, 눈앞의 신기한거에 아내랑 담소하며 즐겼습니다.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와인 한병을 사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낭만 발코니.

몰랐는데 숙소에 손바닥만한 발코니가 붙어 있었고, 거기에서 가난한 유학생 부부처럼 아름다운 석양을 보며 홀짝 홀짝 잔을 기울였습니다. 계획을 했더라도 죄다 엎어졌을 상황인데, 우연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서핑하듯 지내보겠다는 마음이 이벤트의 파도를 즐거움으로 바꿨습니다.

모든 면에서, 관성에 역행하는 여행이었습니다.

감각을 절제하고 우연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제가 우려하던 불편함과 추가적인 리스크는 없었습니다.

반면, 새롭게 스며드는 감각과 기쁘게 방문해주는 우연들로 여정이 빛나는걸 느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여행이 좋은 인생공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