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uit Blogged
불황기 일본 소비자 트렌드의 변화 본문
문권모 | 2004.08.27 | 주간경제 795호
‘잃어버린 10년’ 동안 일본 소비자들의 성향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일본 소비자의 사례를 통해 불황기 국내 소비자의 변화된 모습을 예측해보자.
10년간 장기불황의 늪에 빠져 있던 일본 경제가 최근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2003년 경제성장률(3.2%)은 거품 붕괴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이다. 7년 연속 감소세를 보이던 개인소비는 지난해 말부터 회복세로 돌아서 올해 1/4분기에는 2.9%나 증가했다.
국내 경기는 97년 IMF 이후 잠시 회복이 되는 듯 했지만 최근 몇 년간 계속 하락세를 걷고 있다. 앞으로도 당분간 경기가 회복되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유사한 성향을 지닌 일본 소비자의 선례를 살펴본다면 국내 소비자들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편의점과 노래방, 건강가전 등 일본에서 유행한 트렌드가 국내에서 히트한 사례는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잃어버린 10년’ 동안 일본 소비자들의 성향이 어떻게 변화했으며, 이를 통해 국내 기업들이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웰빙 트렌드는 계속된다
일본에서의 웰빙 트렌드는 경제가 호황기에 있던 80년대 후반에 그 토대가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은 88년부터 단계적으로 주5일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웰빙 트렌드가 주는 시사점은 80년대 형성된 웰빙 성향이 버블이 꺼진 90년대에도 지속됐다는 점이다. 불황이 한창이던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도 음이온 가전, 아미노산과 녹차 음료, 배기 차단 청소기 등 ‘웰빙형 상품’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에 대해 이달 초 필자가 만난 니케이 산업소비연구소 나가야(永家) 주임연구원은 “웰빙에도 학습효과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일단 ‘삶의 질’ 향상의 혜택을 본 소비자들은 여간해서는 이전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여가와 레저 등 웰빙 관련 활동이 앞으로 10년 정도는 일본 소비자들의 최고 관심사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노무라 연구소의 2001년 보고서 역시 불황임에도 불구하고 일벌레(Workaholic)에서 탈피해 가정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새로운 트렌드로 지적했다.
‘욕심쟁이 소비자’의 등장
불황기 일본 소비자의 변화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상품 선택이 훨씬 까다로워졌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싸면서도 좋은 물건을 추구하는 경향이다. 이것은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기업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과제라고 볼 수 있다. 아무리 불황이라고 해도 단순히 싼 물건만으로는 시장에서 호응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은 좋은 물건의 가격을 내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원가절감 노력을 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야 한다.
싸고도 좋은 물건의 예로는 발포주와 의류브랜드 유니크로(Uniqlo), 시마무라를 꼽을 수 있다. 발포주는 맥주의 맛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세금 회피로 가격을 대폭 내린 알코올 음료다. 일본 주세법에 의하면 맥주는 맥아의 비율을 67% 이상으로 유지해야 하며 한 캔당 세금이 78엔 정도 부과된다. 반면 발포주는 맥아의 비율을 25% 이하로 내리는 대신 세금을 절반 정도로 낮춰 맥주의 70% 가격에서 판매가 가능하다. 하지만 맛과 알코올 도수는 일반 맥주와 거의 같다. 불황기 움츠러든 소비자의 심리를 이용한 이 전략은 발포주의 초고속 성장을 가져왔다. 발포주는 전체 맥주 시장의 40% 가량을 차지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유니크로와 시마무라 역시 단순한 싸구려가 아니라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두 회사는 저가격 고품질과 독자적인 상품 기획력을 무기로 포스트 버블 시대의 대표주자로 성장했다. 유니크로는 가격을 내리면서도 상품 기획에서 생산, 판매까지를 일관 관리체제로 묶어 디자인과 품질을 심혈을 기울여 관리했다. 시마무라는 품질을 유지하면서 가격을 내리기 위해 현금 구입으로 원재료 구입비를 낮췄다.
한편 기존에는 한가지 속성에 만족하던 소비자들이 최근에는 다양한 욕구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제품을 찾기 시작했다. 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일본 맥주업계의 경쟁 구도이다. 일본 맥주업계의 경쟁 초점은 초기 맥주의 맛 중심에서 알코올 도수와 칼로리를 내리는 등 건강으로 옮겨갔었다. 그러나 건강 맥주가 맛이 없다는 지적을 받자 최근에는 맛과 건강 모두를 동시에 추구하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 카메라폰이나 음이온 에어컨 등 컨버전스 제품 역시 다양한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키기 위한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일점 호화소비와 브랜드 중시 심화
2002년 일본 루이비통은 사상 최고의 매출을 기록했다. 1357억 엔에 이른 매출은 전년도보다 15%나 늘어났다. 루이비통 재팬은 불황 중에도 도쿄의 명품거리 오모테산도(表參道)에 최고급 매장을 개설하며 성장을 거듭했다.
어떻게 이런 신드롬에 가까운 현상이 생길 수 있었을까. 이 현상에 대해 일본에서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주류를 이뤘다.
첫째, 불황기일수록 브랜드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불황이 계속되면 소비 심리가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소비자는 물건을 사기 전에 여러 가지 사항을 꼼꼼히 따져본다. 불황기에 심화되는 경향은 바로 브랜드가 품질의 보증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다. 확실한 선택을 위해서 이미 시장에서 검증된 제품을 구입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실제로 잘 팔리는 제품과 그렇지 않은 제품의 구별이 명확해지면서 매장 진열이 히트 상품 위주로만 이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둘째, 소위 ‘일점 호화소비(一点 豪華消費)’와 관련한 해석이다. 일점 호화소비는 고급품을 구입하기 위해 다른 소비를 희생하는 소비 행태를 말한다. 이것은 고급품을 사고 싶다는 소비자의 욕구와 현실적인 경제적 제약이 맞물리면서 등장한 성향이다.
일점 호화소비와 같은 트렌드는 사실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미국의 ‘로켓팅(Rocketing, 일상용품은 싼 것을 쓰면서 특정 용품에만 고급 소비를 집중하는 현상)’ 트렌드도 이런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황기라고 해서 마케팅 비용을 줄이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행동일 수 있다.
중년 소비자의 부상
불황기 일본의 소비는 전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50대)와 이들의 자녀(20대 중반~30대 초반)가 함께 이끌어 나갔다. 이들이 없었다면 일본의 불황이 더 길어졌거나, 좀 더 많은 업체가 매출 부진으로 고사했을 지도 모른다.
베이비붐 세대는 2차대전이 끝난 이후인 1948년을 전후로(1946년~1951년) 태어난 사람들을 일컫는다. 인구가 700만명에 이르는 이들은 ‘인구 피라미드 위의 툭 튀어나온 덩어리’라는 뜻에서 단카이(團塊(덩어리) 세대로도 불린다.
이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소비성향이 강하고 인구가 많다는 점에서 기업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단카이 세대는 현재 주택 할부금 상환이 거의 끝나고 자녀들의 교육이 끝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게다가 버블 붕괴 이전에 어느 정도 부를 축적했다. 특히 이들은 2~3년 후 정년을 맞아 여가가 늘어나는 데다 제대로 된 연금 수혜를 받는 마지막 세대로 불린다. 일본의 마케팅 전문가들은 단카이 세대가 가전, 주택 등의 부문에서 고급화를 주도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중년 소비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분위기다. 국내의 중년 소비자들 역시 젊은 세대에 비해 주택구입과 자녀 교육으로부터의 부담이 적다. 따라서 기존의 소비 주체인 젊은층에 이어 높은 구매력과 소비성향의 중년층이 소비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다만 일본의 중년에 비해 연금 혜택이 적어 가처분 소득이 다소 적다는 점이 차이일 것이다.
일본 소비자 트렌드 변화의 시사점
지금까지 불황기 일본 소비자의 성향 변화와 그에 따른 구체적 사례를 함께 살펴 보았다. 그렇다면 일본의 소비자 변화가 한국 기업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 웰빙≠소비증가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웰빙 열풍이 한창이다. 일본의 예로 미뤄볼 때 국내에서 앞으로 경기가 계속 침체되더라도 웰빙 성향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웰빙 열풍이 무조건적인 소비증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불황이라는 변수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웰빙 열풍도 모든 부문의 대대적인 소비 진작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부합하는 제품 위주로 히트상품을 만들어 냈다.
따라서 기업은 무작정 웰빙 트렌드를 추구하는 것 보다는 사업 기회가 있는 분야를 잘 발굴해 낼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기존 상품에 웰빙 속성을 첨가해 차별화하거나, 기존 제품이 제공하지 못하는 웰빙 욕구를 찾아내 신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살찌지 않는 식용유 ‘에코나’가 후자의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이 제품은 기존 식용유의 단점을 신기술로 극복해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 저가전략 만으론 통하지 않는다
불황기 일본 소비자 변화의 핵심은 소비자들이 저가의 상품을 원하는 반면 상품을 고르는 기준은 상당히 엄격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황이라고 해서 무조건 값이 싼 물건이 팔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품질이 뒷받침되어야 소비자의 지갑을 열 수 있었다. 일본 기업들은 이런 트렌드에 대응해 가격을 내린 고품질의 제품으로 소비자를 감동시켰고, 새로운 디자인과 기능의 조합을 통해 디지털 가전과 같은 신수요를 창출해 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대로 소비자 취향이 까다로워지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현상은 국내 상황에서도 그대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불황기에는 가격 뿐만 아니라 품질까지도 꼼꼼히 따지는 가치지향적 소비가 대세를 이룰 것이다. 이런 소비자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기업은 커다란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다.
● 세대별 시장의 맹점에 주의하라
세대별 시장에 있어 일본의 예에서 알 수 있는 교훈은 무턱대고 ‘어떤 세대가 구매력이 있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첫번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실버산업에 대한 접근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실버산업에 대한 장미빛 전망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예를 살펴볼 때 기업이 실버산업에서 득을 볼 수 있는 분야는 극히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실버산업 특수를 누리고 있는 것은 의료와 재택간호(개호·介護 서비스) 등 공공성이 강한 분야이다. 이 분야들은 일본에서도 정부지출 의존률이 높으며, 특히 재택간호의 경우는 일정 규모 이상 기업의 진출이 제한되어 있다.
실제로 연령별 소비자들의 소비지출 비중을 살펴보면 노년층은 여행 이외의 부분에서는 다른 연령층에 비해 소비 비중이 극히 미약하다. 따라서 설사 노년층이 소비 구매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표면화하기 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특정 세대에만 집중하는 전략 또한 위험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현재 일본에서는 단카이 세대의 자녀인 단카이 주니어의 소비 트렌드를 집중 공략해 온 기업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왕성하고 개성 있는 소비를 자랑하던 이들이 취업, 결혼, 육아로 생활의 중심을 옮겨감에 따라 소비의 대상을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불황기 일본 소비자의 변화와 시사점에 대해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불황기 소비자 변화에 대응하면서 자연스레 일본 기업의 체질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일본 기업들은 이런 체질강화를 바탕으로 디지털 카메라와 같은 신제품을 만들어 불황 극복의 계기를 만들어 냈다. 불황기에 어렵지 않은 기업은 없다. 그러나 소비자의 변화를 정확히 읽어 위기를 이용한다면 오히려 더 많은 기회가 만들어질 것이다. -끝-
‘잃어버린 10년’ 동안 일본 소비자들의 성향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일본 소비자의 사례를 통해 불황기 국내 소비자의 변화된 모습을 예측해보자.
10년간 장기불황의 늪에 빠져 있던 일본 경제가 최근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2003년 경제성장률(3.2%)은 거품 붕괴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이다. 7년 연속 감소세를 보이던 개인소비는 지난해 말부터 회복세로 돌아서 올해 1/4분기에는 2.9%나 증가했다.
국내 경기는 97년 IMF 이후 잠시 회복이 되는 듯 했지만 최근 몇 년간 계속 하락세를 걷고 있다. 앞으로도 당분간 경기가 회복되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유사한 성향을 지닌 일본 소비자의 선례를 살펴본다면 국내 소비자들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편의점과 노래방, 건강가전 등 일본에서 유행한 트렌드가 국내에서 히트한 사례는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잃어버린 10년’ 동안 일본 소비자들의 성향이 어떻게 변화했으며, 이를 통해 국내 기업들이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웰빙 트렌드는 계속된다
일본에서의 웰빙 트렌드는 경제가 호황기에 있던 80년대 후반에 그 토대가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은 88년부터 단계적으로 주5일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웰빙 트렌드가 주는 시사점은 80년대 형성된 웰빙 성향이 버블이 꺼진 90년대에도 지속됐다는 점이다. 불황이 한창이던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도 음이온 가전, 아미노산과 녹차 음료, 배기 차단 청소기 등 ‘웰빙형 상품’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에 대해 이달 초 필자가 만난 니케이 산업소비연구소 나가야(永家) 주임연구원은 “웰빙에도 학습효과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일단 ‘삶의 질’ 향상의 혜택을 본 소비자들은 여간해서는 이전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여가와 레저 등 웰빙 관련 활동이 앞으로 10년 정도는 일본 소비자들의 최고 관심사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노무라 연구소의 2001년 보고서 역시 불황임에도 불구하고 일벌레(Workaholic)에서 탈피해 가정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새로운 트렌드로 지적했다.
‘욕심쟁이 소비자’의 등장
불황기 일본 소비자의 변화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상품 선택이 훨씬 까다로워졌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싸면서도 좋은 물건을 추구하는 경향이다. 이것은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기업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과제라고 볼 수 있다. 아무리 불황이라고 해도 단순히 싼 물건만으로는 시장에서 호응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은 좋은 물건의 가격을 내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원가절감 노력을 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야 한다.
싸고도 좋은 물건의 예로는 발포주와 의류브랜드 유니크로(Uniqlo), 시마무라를 꼽을 수 있다. 발포주는 맥주의 맛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세금 회피로 가격을 대폭 내린 알코올 음료다. 일본 주세법에 의하면 맥주는 맥아의 비율을 67% 이상으로 유지해야 하며 한 캔당 세금이 78엔 정도 부과된다. 반면 발포주는 맥아의 비율을 25% 이하로 내리는 대신 세금을 절반 정도로 낮춰 맥주의 70% 가격에서 판매가 가능하다. 하지만 맛과 알코올 도수는 일반 맥주와 거의 같다. 불황기 움츠러든 소비자의 심리를 이용한 이 전략은 발포주의 초고속 성장을 가져왔다. 발포주는 전체 맥주 시장의 40% 가량을 차지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유니크로와 시마무라 역시 단순한 싸구려가 아니라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두 회사는 저가격 고품질과 독자적인 상품 기획력을 무기로 포스트 버블 시대의 대표주자로 성장했다. 유니크로는 가격을 내리면서도 상품 기획에서 생산, 판매까지를 일관 관리체제로 묶어 디자인과 품질을 심혈을 기울여 관리했다. 시마무라는 품질을 유지하면서 가격을 내리기 위해 현금 구입으로 원재료 구입비를 낮췄다.
한편 기존에는 한가지 속성에 만족하던 소비자들이 최근에는 다양한 욕구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제품을 찾기 시작했다. 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일본 맥주업계의 경쟁 구도이다. 일본 맥주업계의 경쟁 초점은 초기 맥주의 맛 중심에서 알코올 도수와 칼로리를 내리는 등 건강으로 옮겨갔었다. 그러나 건강 맥주가 맛이 없다는 지적을 받자 최근에는 맛과 건강 모두를 동시에 추구하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 카메라폰이나 음이온 에어컨 등 컨버전스 제품 역시 다양한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키기 위한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일점 호화소비와 브랜드 중시 심화
2002년 일본 루이비통은 사상 최고의 매출을 기록했다. 1357억 엔에 이른 매출은 전년도보다 15%나 늘어났다. 루이비통 재팬은 불황 중에도 도쿄의 명품거리 오모테산도(表參道)에 최고급 매장을 개설하며 성장을 거듭했다.
어떻게 이런 신드롬에 가까운 현상이 생길 수 있었을까. 이 현상에 대해 일본에서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주류를 이뤘다.
첫째, 불황기일수록 브랜드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불황이 계속되면 소비 심리가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소비자는 물건을 사기 전에 여러 가지 사항을 꼼꼼히 따져본다. 불황기에 심화되는 경향은 바로 브랜드가 품질의 보증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다. 확실한 선택을 위해서 이미 시장에서 검증된 제품을 구입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실제로 잘 팔리는 제품과 그렇지 않은 제품의 구별이 명확해지면서 매장 진열이 히트 상품 위주로만 이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둘째, 소위 ‘일점 호화소비(一点 豪華消費)’와 관련한 해석이다. 일점 호화소비는 고급품을 구입하기 위해 다른 소비를 희생하는 소비 행태를 말한다. 이것은 고급품을 사고 싶다는 소비자의 욕구와 현실적인 경제적 제약이 맞물리면서 등장한 성향이다.
일점 호화소비와 같은 트렌드는 사실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미국의 ‘로켓팅(Rocketing, 일상용품은 싼 것을 쓰면서 특정 용품에만 고급 소비를 집중하는 현상)’ 트렌드도 이런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황기라고 해서 마케팅 비용을 줄이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행동일 수 있다.
중년 소비자의 부상
불황기 일본의 소비는 전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50대)와 이들의 자녀(20대 중반~30대 초반)가 함께 이끌어 나갔다. 이들이 없었다면 일본의 불황이 더 길어졌거나, 좀 더 많은 업체가 매출 부진으로 고사했을 지도 모른다.
베이비붐 세대는 2차대전이 끝난 이후인 1948년을 전후로(1946년~1951년) 태어난 사람들을 일컫는다. 인구가 700만명에 이르는 이들은 ‘인구 피라미드 위의 툭 튀어나온 덩어리’라는 뜻에서 단카이(團塊(덩어리) 세대로도 불린다.
이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소비성향이 강하고 인구가 많다는 점에서 기업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단카이 세대는 현재 주택 할부금 상환이 거의 끝나고 자녀들의 교육이 끝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게다가 버블 붕괴 이전에 어느 정도 부를 축적했다. 특히 이들은 2~3년 후 정년을 맞아 여가가 늘어나는 데다 제대로 된 연금 수혜를 받는 마지막 세대로 불린다. 일본의 마케팅 전문가들은 단카이 세대가 가전, 주택 등의 부문에서 고급화를 주도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중년 소비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분위기다. 국내의 중년 소비자들 역시 젊은 세대에 비해 주택구입과 자녀 교육으로부터의 부담이 적다. 따라서 기존의 소비 주체인 젊은층에 이어 높은 구매력과 소비성향의 중년층이 소비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다만 일본의 중년에 비해 연금 혜택이 적어 가처분 소득이 다소 적다는 점이 차이일 것이다.
일본 소비자 트렌드 변화의 시사점
지금까지 불황기 일본 소비자의 성향 변화와 그에 따른 구체적 사례를 함께 살펴 보았다. 그렇다면 일본의 소비자 변화가 한국 기업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 웰빙≠소비증가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웰빙 열풍이 한창이다. 일본의 예로 미뤄볼 때 국내에서 앞으로 경기가 계속 침체되더라도 웰빙 성향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웰빙 열풍이 무조건적인 소비증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불황이라는 변수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웰빙 열풍도 모든 부문의 대대적인 소비 진작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부합하는 제품 위주로 히트상품을 만들어 냈다.
따라서 기업은 무작정 웰빙 트렌드를 추구하는 것 보다는 사업 기회가 있는 분야를 잘 발굴해 낼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기존 상품에 웰빙 속성을 첨가해 차별화하거나, 기존 제품이 제공하지 못하는 웰빙 욕구를 찾아내 신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살찌지 않는 식용유 ‘에코나’가 후자의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이 제품은 기존 식용유의 단점을 신기술로 극복해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 저가전략 만으론 통하지 않는다
불황기 일본 소비자 변화의 핵심은 소비자들이 저가의 상품을 원하는 반면 상품을 고르는 기준은 상당히 엄격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황이라고 해서 무조건 값이 싼 물건이 팔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품질이 뒷받침되어야 소비자의 지갑을 열 수 있었다. 일본 기업들은 이런 트렌드에 대응해 가격을 내린 고품질의 제품으로 소비자를 감동시켰고, 새로운 디자인과 기능의 조합을 통해 디지털 가전과 같은 신수요를 창출해 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대로 소비자 취향이 까다로워지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현상은 국내 상황에서도 그대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불황기에는 가격 뿐만 아니라 품질까지도 꼼꼼히 따지는 가치지향적 소비가 대세를 이룰 것이다. 이런 소비자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기업은 커다란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다.
● 세대별 시장의 맹점에 주의하라
세대별 시장에 있어 일본의 예에서 알 수 있는 교훈은 무턱대고 ‘어떤 세대가 구매력이 있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첫번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실버산업에 대한 접근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실버산업에 대한 장미빛 전망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예를 살펴볼 때 기업이 실버산업에서 득을 볼 수 있는 분야는 극히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실버산업 특수를 누리고 있는 것은 의료와 재택간호(개호·介護 서비스) 등 공공성이 강한 분야이다. 이 분야들은 일본에서도 정부지출 의존률이 높으며, 특히 재택간호의 경우는 일정 규모 이상 기업의 진출이 제한되어 있다.
실제로 연령별 소비자들의 소비지출 비중을 살펴보면 노년층은 여행 이외의 부분에서는 다른 연령층에 비해 소비 비중이 극히 미약하다. 따라서 설사 노년층이 소비 구매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표면화하기 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특정 세대에만 집중하는 전략 또한 위험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현재 일본에서는 단카이 세대의 자녀인 단카이 주니어의 소비 트렌드를 집중 공략해 온 기업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왕성하고 개성 있는 소비를 자랑하던 이들이 취업, 결혼, 육아로 생활의 중심을 옮겨감에 따라 소비의 대상을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불황기 일본 소비자의 변화와 시사점에 대해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불황기 소비자 변화에 대응하면서 자연스레 일본 기업의 체질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일본 기업들은 이런 체질강화를 바탕으로 디지털 카메라와 같은 신제품을 만들어 불황 극복의 계기를 만들어 냈다. 불황기에 어렵지 않은 기업은 없다. 그러나 소비자의 변화를 정확히 읽어 위기를 이용한다면 오히려 더 많은 기회가 만들어질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