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더 이상 한줄도 못 쓰겠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느낌입니다. 지금 쓰는 책은 힘겹게, 힘겹게 한줄씩 뇌신경을 뽑아내듯 한계를 돌파하고 있는 중입니다. 마음에 안 들어도 일단 저기까지만 가보자, 스스로 달래고 얼르며 말입니다. 책은 엉덩이로 쓰는거라는 산나님 조언대로, 되든 안되든 시간 정해놓은 만큼은 앉아있으려 합니다. 벌써 석 달째 주말들입니다. 어제 밤엔, 잠시 쉰다고 읽던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순례자의 팍팍한 피로와 갈증을 느끼며 사막과 숲길을 따라 타박타박 걸었습니다. 글맛을 즐겨 야금야금 읽겠다는 각오와는 정반대로, 카미노를 단숨에 내달아 한 밤에 산티아고 끝까지 도착해 버렸습니다.

문제는 책을 다 읽어버린게 아닙니다. 이 책을 읽으니 너무 비교가 되어 맥이 탁 풀리고 글 쓰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물론, 저랑은 주제도 다르고 목적도 다른 책입니다. 산나님은 기행과 수필의 믹스고, 전 정보와 레슨이 범벅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책이라면 읽는 맛이란게 있는데, 산나님 글이 천상의 목소리라면 제 글은 삑삑거리는 기계어군요. 맥이 탁 풀어지는 느낌입니다.

김희경

원래, 육체가 야생에 놓이면 인류라는 종이 공들여 발달시킨 내면의 기제가 작동하게 마련입니다. 생존에 몰두하고, 존엄과 투쟁해야 합니다. 예리한 감각과 명료한 집중력, 정신과 육체가 호응하는 그 순간 해방감과 몰입을 느끼게 되지요. 동서의 현인들이 육체 노동을 신성시한 까닭이기도 합니다. 

코엘료가 걷고 삶의 전기를 맞았다하여 그 명성을 더한 산티아고 가는길, 카미노(Camino)입니다. 800km 길을 한 달 남짓 걷다 보면 같은 길을 걷는 순례자들끼리 교감하고 소통하고, 무엇보다 스스로와 깊이 대화하면서 어떤 답을 얻게 되어 치유의 길(therapy route)라고도 불리웁니다.

오프에서 산나님을 뵈었을 때 몇 마디 주어듣고 상상했었습니다. 그러나 제 상상은 빈곤했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걸었다' 했는데 사소한 무게에 일희일비하게 되는 그 고행의 의미가 어땠는지 책을 보니 조금이나마 짐작을 하게 됩니다. 외길이라 '만난 사람 또 만나는' 인연의 살랑거림과 묵직함, 여러 사람 만나서 '파티했었다'는 그 우주적 융합은 형용하기 어려운 생의 압축일테지요. 함께 걸음한 짧은 시간, 그리고 무언의 몸짓에서 서로 어루만지고 북돋우는 시간들은 타인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화해와 소통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며 관계의 선함에 대해 많은 생각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부러웠던건, 글쟁이로서 산나님이 이룬 돌파(breakthrough)입니다. 전작인 '흥행의 재구성'과 비교하면 극명합니다. 장르적 차이 이면의 본질적 성장 아닐까 싶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스스로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 이야기와 직조합니다. 남의 이야기 써서 날로 먹는다 미안해 하던 마음의 보상인지, 결국 남의 삶에서 내 삶을 보게 됨인지, 내밀한 저자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진솔하게 적어 내립니다. 읽으면서 마음이 함께 뜨끈해지는 느낌입니다. 수호천사와 함께 찾은 크루즈 데 페로 장면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묘하게도 슬프기만 한게 아니라 정화의 느낌이 강했지요. 

산나님 스스로 표현하기를 광화문 한복판에서 벌거벗고 선 느낌이라고 하는데, 딱 그렇습니다. 자의식 강한 기자 출신의 저자로서는 무궁한 용기가 필요했을겁니다. 그러나, 이젠 글쟁이로서 오롯이 길을 가실 수 있겠다 싶어 느꺼웠습니다. 마음의 짐을 훌훌 벗어야 자유롭게 글을 쓸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 힘든 마음을 정결하게 써내릴 수 있다면, 무슨 글을 못 쓸까요. 만일 카미노가 신통력이 있다면, 산나님은 내면의 강함을 끌어내는 마법을 선물로 받았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며 소원한건, '카미노에 가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제가 거기 간다는건, 마음 속 평화가 사라졌음을 의미할테니까요. 어쩌면, 유사시에 가볼 데를 안 것 자체로 이미 위안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내> 이 책 증정하는 이벤트(클릭)가 진행 중입니다. 참고하세요. 
신고

'Culture >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브라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  (4) 2009.09.03
발칙한 유럽 산책  (10) 2009.08.26
르누와르 전  (14) 2009.08.10
학문의 즐거움  (40) 2009.08.02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34) 2009.05.17
유혹하는 글쓰기 (On writing)  (11) 2004.12.08

WRITTEN BY
Inuit
@inuit_k / CxO / Author ("가장 듣고 싶은 한마디 YES!") / Making better world, every minute.

트랙백  5 , 댓글  34개가 달렸습니다.
  1. 책은 엉덩이로 쓰라는 말에 밑줄 좌악 했습니다. 직장에서 하는 일도 그와 같지 않나 생각합니다만, 시간내에 주어진 분량(업무량)을 처리하는 것을, 시간을 어긴 성과물은 결코 좋은 결과가 아니라고 사무실 식구들에게 얘긴 하곤 합니다. 그래도 진듯히, 꾸준히... ^^

    여행기로 알고 있는데, 치유가 주제인 듯 합니다. 여행자는 느끼는 것을 정갈된 글로 표현했다는 것이 그 치유의 느낌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그 이야기가 궁금해 지는군요.

    비가 그친 일요일 오전. 다시 남산을 갈까 합니다. 그러다 보면 저도 치유가 있지 않을까요? 뱃살이 빠지는 뭐 그런... ㅡ.ㅡa;;;;
    • 뱃살 빠지는 치유.. 저도 원합니다. ^^

      오후에는 해가 나면서 날씨가 좋아지고 있네요.
      걷기 좋은 날입니다. ^^
  2. inuit님 책 나오면 이 책과 비교 이벤트라도 해야겠군요=_=
  3.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 걷는것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
    올레길 1km에 아쉬워했으나 800km 카미노 길을 걷는
    여정이라... 또 다른 나로 거듭나는 길이 될 것 같군요..
    무작정 가보고싶다라는 이 치기는 제 무지함 때문인 것 같습니다..
    • 네. 평소 걷기랑은 완전히 다른 걷기 같아요.
      재미난건 제주 올레길도 카미노를 다녀온 분이 만든거죠.
      우리나라에도 그런 멋진 걷는 길을 만들어보기로 하고 말입니다.
  4. 아깝지만 저도 모르게 다 읽어버린 책입니다. 산나님이 카미노를 걷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폭 빠져서 읽고나니 아까워서 다시 읽고 있습니다.
    • 와.. 저랑 같은 느낌.
      전 나중에 필요한 시기가 오면 다시 읽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5. 비밀댓글입니다
    • 아. 뭔가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했는데..
      유명한 그분일까요..

      암튼, 나중에 이야기하지요..
  6. 산나님은 좋으시겠습니다. ^^
    자신의 지난 날을 보듬고, 지금 상태를 알아보며, 앞 날을 응원하는 그 속깊은 배려에 누구인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 모든 것이 블로깅에서 시작된 우정이란 것이 거듭 놀랍습니다.

    저도 산나님의 책을 리뷰할 생각이 있었는데, 이누잇님의 리뷰를 읽고나니 쉽지 않겠습니다그려.
    • 미탄님의 들여다보는듯한 그 눈매가 참 부럽습니다. ^^
      미탄님 리뷰가 너무도 궁금해요.
      산나님의 정신적 서포터 시잖습니까. ^^
  7. inuit님에게는 사람을 끄는 '무엇'이 있는 듯?
    이미 하나의 기호가 된 '카미노' - 저 역시 가고싶지 않았거든요..- 근데, 이 산나님이 누구신가 궁금증과 함께 이 책을 읽어봐야지 싶어지니요.
    이미 내가 '좋아하지 않는' 과일인지 채소인지로 분류되었었던 방울토마토때와 같은 일이 벌어지니요.
    • 엥 카미노 다녀오셨나요?

      산나님 블로그 한번 보셔도 좋고, 아무튼 글로 느껴지는 이상으로 멋진 분입니다. ^^
    • ㅎ 시제를 잘못 쓴 탓에... 저도 깜짝 놀랐네요.
      '가고 싶지 않은 산티아고' 임에도 불구하고.

      '좋아하지 않았던 토마토'임에도 불구하고 토댁님네 것에는 끌렸던 바로 그 이끌림을 말한다는 것이 그만^^
    • 아직 안 다녀오셨군요. ^^
      나중에 편한 마음으로 걷는다면 그게 행복일듯해요.
      책에 다섯번 카미노를 걸은 분도 나옵니다. ^^
  8. 점심 때 사서 다 읽었습니다. 그럴수밖에 없었지요. 아주 잘 쓰셔서 저도 책 쓰기가 두렵습니다. -_-; 기회가 되면 sanna님 뒤를 따라 카미노를 걷고 싶습니다.
    • 유정식님도 그랬군요..
      산나님은 글쟁이 킬러! OTL
    • sanna님의 글은 여러 가지 맛이 났습니다. 어떨 때는 달디단 쵸코 케잌 같기도 하고, 어떨 때는 푹 고아 삶은 설렁탕 같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지리산 산기슭의 샘물 같기도 했습니다. 웃다가 울다가 명랑해지다가 심각해지면서 오늘 오후 내내 책 읽느라 작파했지요. ^^
      그나저나 sanna님 때문에 저도 글 한 줄 못 쓰게 생겼으니 대략 난감입니다. -_-;
    • 그게.. 제 좌절의 단초지요 ^^
      여러 맛이 나는데, 또 하나로 어울리는 그 부분이요..
      유정식님도 참 감성적이시네요. ^^

      그나저나 직접 타격은 저 아닐까요.
      원고 넘길 날은 자박자박 다가오고.. 제 글은 흉해서 보기 싫고.. ㅠ.ㅜ
    • 어허~ 두 분 왜 이러십니까..
      고춘자와 장소팔 만담처럼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태워주시는 비행기에 현기증이 납니다 그려~ ㅎㅎㅎ
      두 분 필력이야 제가 익히 아는데, 두 분 좌절시킬 일이야 절대 없다는 거 제가 장담하고요.
      잘 봐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
    • 장소팔, 고춘자라니.. -_-

      전 젊어서 누군지 모르겠거등요. ;;;;
    • 유정식님이 그정도라면 저는 금서목록에 넣어야할 것 같습니다 ^^
    • 글 다쓰고 읽으시면 됩니다. ^^;
    • 장소팔, 고춘자를 모른다고라고라~~~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왜 이러서염~^^
    • 전 아직.. 젊은걸로 되어 있습니다.
      제 블로그 손님들에게 거짓 폭로를 하시려고 하시나이까.. ^^;;
  9. 산티아고의 길을 걷는 건 제 삶에 하나의 목표처럼 되어있습니다. 그 길을 걸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긴 알게 되면 늘 찾아 읽곤 합니다. 질투도 들고, 설렘과 그리고 내가 그 길을 걷는 모습의 상상 등으로 한번 읽고나면 몇일을 정신도 못차리지만.. 그래도, 거부할 수 없는 뭔가가 또 책을 집어들게 하지요. 언제 가게 될지 확실치 않은 카미노지만.. 늘 느끼는 건, 그 곳에 분명 스스로와 마주할 마법 같은 무언가가 있다는 거죠. 소개해주신 책도.. 기대됩니다.
    • 정말 산티아고를 동경하시는군요.
      다녀온 사람 질투할 정도면 말입니다. ^^

      만일 그렇다면, 이 책 읽지 마세요.
      몸살 나실겁니다. ^^;;
  10. 저는 inuit님의 이 서평을 아껴가며 읽었습니다 ^^ 글 쓰는 사람으로 나보다 더 잘 쓰는 사람에 대한 선망이 왜 없겠습니까. 넘어설 수 없는 벽이라 느껴지면 절망이 되기도 하구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다들 잘 쓰시는 분들이라 그런 걱정은 안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 다들 겸손하셔서 그렇지요.

    저도 이 책은 꼭 읽고 싶네요. 기다리겠습니다. 이 책을 만날 수 있는 날을요 ^^
    • 재주로 치면 어찌어찌 흉내는 내는데, 저 깊은 마음 엉킴없이 풀어내는 솜씨는.. 그냥..
      '속을 진솔하고 담담히 드러낼 수 있어야 글쟁이'라는 하나의 criterion을 얻었습니다.
  11. 짧게 쓴다고 계획했던 글이 지루하게(?) 길게 되었네요. 트랙백이 안되는 것을 아시죠? 아래에 글 링크를 남깁니다. ^^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http://zizukabi.blogspot.com/2009/05/my-santiago.html
    • 아.. 지저깨비님 글쓰기 싫어하신다고 해서 전 기대도 안했는데
      너무 감동적입니다. ㅜ.ㅠ
  12. inuit님^

    저 드뎌 산나님과의 여행을 끝냈습니당..
    너무 아쉬워용^^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