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uit Blogged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본문

Review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Inuit 2009. 5. 17. 09:04
아, 더 이상 한줄도 못 쓰겠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느낌입니다. 지금 쓰는 책은 힘겹게, 힘겹게 한줄씩 뇌신경을 뽑아내듯 한계를 돌파하고 있는 중입니다. 마음에 안 들어도 일단 저기까지만 가보자, 스스로 달래고 얼르며 말입니다. 책은 엉덩이로 쓰는거라는 산나님 조언대로, 되든 안되든 시간 정해놓은 만큼은 앉아있으려 합니다. 벌써 석 달째 주말들입니다. 어제 밤엔, 잠시 쉰다고 읽던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순례자의 팍팍한 피로와 갈증을 느끼며 사막과 숲길을 따라 타박타박 걸었습니다. 글맛을 즐겨 야금야금 읽겠다는 각오와는 정반대로, 카미노를 단숨에 내달아 한 밤에 산티아고 끝까지 도착해 버렸습니다.

문제는 책을 다 읽어버린게 아닙니다. 이 책을 읽으니 너무 비교가 되어 맥이 탁 풀리고 글 쓰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물론, 저랑은 주제도 다르고 목적도 다른 책입니다. 산나님은 기행과 수필의 믹스고, 전 정보와 레슨이 범벅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책이라면 읽는 맛이란게 있는데, 산나님 글이 천상의 목소리라면 제 글은 삑삑거리는 기계어군요. 맥이 탁 풀어지는 느낌입니다.

김희경

원래, 육체가 야생에 놓이면 인류라는 종이 공들여 발달시킨 내면의 기제가 작동하게 마련입니다. 생존에 몰두하고, 존엄과 투쟁해야 합니다. 예리한 감각과 명료한 집중력, 정신과 육체가 호응하는 그 순간 해방감과 몰입을 느끼게 되지요. 동서의 현인들이 육체 노동을 신성시한 까닭이기도 합니다. 

코엘료가 걷고 삶의 전기를 맞았다하여 그 명성을 더한 산티아고 가는길, 카미노(Camino)입니다. 800km 길을 한 달 남짓 걷다 보면 같은 길을 걷는 순례자들끼리 교감하고 소통하고, 무엇보다 스스로와 깊이 대화하면서 어떤 답을 얻게 되어 치유의 길(therapy route)라고도 불리웁니다.

오프에서 산나님을 뵈었을 때 몇 마디 주어듣고 상상했었습니다. 그러나 제 상상은 빈곤했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걸었다' 했는데 사소한 무게에 일희일비하게 되는 그 고행의 의미가 어땠는지 책을 보니 조금이나마 짐작을 하게 됩니다. 외길이라 '만난 사람 또 만나는' 인연의 살랑거림과 묵직함, 여러 사람 만나서 '파티했었다'는 그 우주적 융합은 형용하기 어려운 생의 압축일테지요. 함께 걸음한 짧은 시간, 그리고 무언의 몸짓에서 서로 어루만지고 북돋우는 시간들은 타인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화해와 소통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며 관계의 선함에 대해 많은 생각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부러웠던건, 글쟁이로서 산나님이 이룬 돌파(breakthrough)입니다. 전작인 '흥행의 재구성'과 비교하면 극명합니다. 장르적 차이 이면의 본질적 성장 아닐까 싶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스스로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 이야기와 직조합니다. 남의 이야기 써서 날로 먹는다 미안해 하던 마음의 보상인지, 결국 남의 삶에서 내 삶을 보게 됨인지, 내밀한 저자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진솔하게 적어 내립니다. 읽으면서 마음이 함께 뜨끈해지는 느낌입니다. 수호천사와 함께 찾은 크루즈 데 페로 장면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묘하게도 슬프기만 한게 아니라 정화의 느낌이 강했지요. 

산나님 스스로 표현하기를 광화문 한복판에서 벌거벗고 선 느낌이라고 하는데, 딱 그렇습니다. 자의식 강한 기자 출신의 저자로서는 무궁한 용기가 필요했을겁니다. 그러나, 이젠 글쟁이로서 오롯이 길을 가실 수 있겠다 싶어 느꺼웠습니다. 마음의 짐을 훌훌 벗어야 자유롭게 글을 쓸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 힘든 마음을 정결하게 써내릴 수 있다면, 무슨 글을 못 쓸까요. 만일 카미노가 신통력이 있다면, 산나님은 내면의 강함을 끌어내는 마법을 선물로 받았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며 소원한건, '카미노에 가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제가 거기 간다는건, 마음 속 평화가 사라졌음을 의미할테니까요. 어쩌면, 유사시에 가볼 데를 안 것 자체로 이미 위안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내> 이 책 증정하는 이벤트(클릭)가 진행 중입니다. 참고하세요.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증의 기술  (25) 2009.05.26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31) 2009.05.21
뇌의 기막힌 발견  (14) 2009.05.16
최고 결정권자를 움직이는 영업기술  (16) 2009.05.12
질문력  (10) 2009.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