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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Inuit 2019. 12. 21. 08:15

직장은 대전의 연구소였습니다현장을 알아야 한다는 '그룹' 방침에 따라,  연구원은 의무적으로 6개월 공장에서 근무해야 했습니다. 창원의 방산 공장에 배치됐고, 라인에 들어가 일을 하며 작업자 형들과도 친해졌습니다.

담배를 피우며 간간히 듣던 이야기 당시 느낌으로는 아라비안 나이트 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창원에서조차 '아프리카 정도의 오지' 치는 거제에는 '돈이 넘치는데 쓸 곳은 없어 술집이 발달했고, 러시아 아가씨들도 와 있는데 그리 이쁘다카더라.' 이야기지요. 당시 저는, 현실성 없어 보이는 이야기지만 반대로 굳이 화자가 거짓말을 할리도 없고, 실제 (북방정책을 펼치기 전이라 우리나라에 별로 없던) 러시아 미녀가 있건 없건 그저 바그다드 이야기처럼 느껴졌었지요.

별세계 거제에 관한 책입니다.

반공포로와 김영삼이라는 정치인의 고향 정도 말고는 서울 쪽에선 인지도나 거리가 머나먼 거제입니다. 인식론적 무인도에서 우리나라 기간 산업인 조선 산업이 태동하고 성장하고 한풀 꺾이는 40년을, 책은 다양한 렌즈로 들여다 봅니다.

섬의 유일한 조직인 회사가사교이고 생활인지라 '가족'으로 매몰되는 외딴 . 그리고 물리적 위치는 경상도인지라 끈끈한 유대 아래 강한 가부장의 문화가 지배하는 . 어설프게 출발하여 야드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혁신하며 성장했기에, 강한 현장 문화가 지배하는 . 그러다 우리나라 3사가 세계 1, 2, 3 회사가 정도로 잘되어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졸지에 부자동네가 , 돈을 소비하기엔 토대가 쫓아오기 힘들게 부가 넘쳤던 . 그러다 해양 플랜트 사업에서의 잇단 실패로 급속도로 물적, 심정적, 인적 토대가 한방에 와해된 곳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입장에서 눈에 띄었던 대목들은 이렇습니다.

지금은 잊혀진 기능올림픽과 우수한 기능인들. 산업의 성장을 인력공급 면에서 버텨야 했기에 기능인의 지속적인 물량 확보가 국가적 어젠다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기능인을 개발자로 대체하면 같은일이 30 뒤에 벌어진다는게 신기했습니다. 슬픈건 이젠 우리나라의 성장도 더뎌져 그런 양적 공급 자체도 화두에서 벗어났다는 점입니다.

 

경제학에서 지대(rent)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초과지급 개념인데, 거제의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키워드 같습니다. 호황 인재를 남단의 고독한 섬에 붙들기 위해 지대를 지급하고, 덕에 loyalty 응집력, 장기 근속이라는 어려운 가치를 동시에 달성했지만, 산업이, 회사가 어려워져서 지대의 지급이 불가능해지자 모든게 급속히 와해됩니다.

개인은 노동시장에 다시 나오기엔 경쟁력이 없고, 회사는 인재와 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지 못하고 거래기반으로 옮겨가다보니 문제가 문제를 낳습니다. 불량이 불량을 낳고, 지연이 지연을 낳고 악순환입니다. 특히 튕겨져 나가거나 비효율에 갈려 들어가는 개인의 비극은 참혹한데, 이게 축적된 구조의 문제라 딱히 누가 잘못인지 짚기도 쉽지 않습니다.

끝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제는 산업화 대한민국의 진열장(showcase)이었구나.

당시 우리나라의 산업 성숙도보다도 한발 늦게 시작한 조선 산업. 야드의 특성상 원격오지의 섬에서 시작할 밖에 없었던 지리와 교통상의 불리함. 천형같은 핸디캡을 미친듯한 투지로 극복하고 사반세기 만에 세계 1, 수출 한국의 중심 기둥산업으로 거듭납니다.

그러나 와중에 다양성은 매몰되고 효율에만 몰빵을 합니다. 그리고 외생적 변수가 촉발한 수많은 내적 허상들이 한번에 허물어지지요. 안타까운 거제의 일을 스쿠루지가 크리스마스 전야에 이리저리 돌며 플래시백하듯 세세히 있어서 인상 깊었습니다.

Inuit Points ★★★★☆

책은 화학자가 만든 요리 같이 섬세한 균형이 돋보입니다. 간과 양념과 재료의 취급이 모두 온전히 균형 잡혔습니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습니다. 특히 좋았던건 객관적 애정입니다. 교수로서 학자의 냉정함과 OB로서 동료의 뜨거움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립니다.사실의 추구는 논문 같지만, 사람 냄새가 진한 르뽀의 훈기도 있습니다. 치열한 문체와 형식 면에서도 기억에 남을 만한 책이었습니다. 거제 말고 다른 시공간에 이런 렌즈를 대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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