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uit Blogged
디자인과 인간심리 본문
장면 1.
당신은 여행 중입니다. 작고 낡았지만 유럽의 멋이 잘 살아있는 호텔에 체크인 하고 들어왔습니다. 저녁 비행기로 도착해 방에 들어오니 11시라 깜깜합니다. 방의 불을 켜려고 하는데, 스위치가 어딨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스위치를 켜니 천장의 팬이 돌아갑니다. 더듬더듬 겨우 램프를 찾아 줄을 잡아 당겨 불을 켰습니다. 추워서 히터를 켜야하는데 등불보다도 난이도가 높습니다. 스위치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습니다. 피곤하니 나중에 찾기로 하고 따끈한 물로 씻으려 샤워부스로 갔는데 찬물 더운물이 어느쪽인지는 나중 일이고, 일단 물 나오게 하는 일 조차 어렵습니다. 하아.. 집 떠나면 고생이구나 생각합니다.
장면 2. (심사하러 가면 자주 목격하는 일입니다.)
오늘은 중요한 데모데이입니다. 각자 준비한 내용을 최대한 매력적으로 발표하려 투지가 불타고 있습니다. 첫번째 발표자가 멋지게 오프닝 스피치를 하고 슬라이드 조작하는 리모컨을 누르는 순간, 프레젠테이션 모드에서 빠져나갑니다. 모두 당황합니다. 부랴부랴 주최측에서 다시 세팅해주고 겨우 진땀 흘리며 피치를 진행합니다. 레이저로 중요한 점을 가리키려고 하는데 슬라이드는 전 페이지로 넘어갑니다. 다시 죄송하다고 말하고 진행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사람이 나와서 프레젠테이션 밖으로 한번 나갔다 오고, 중간에 앞장을 여러 번 다녀옵니다. 그 다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어수선한 피치 데이입니다.
이 두가지 경우,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요.
장면 3.
당신은 애플 제품을 처음 샀습니다. 의례히 따라오던 두꺼운 매뉴얼이 없습니다.
UX (user experience, 사용자 경험)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도널드 노먼은, 앞에 같은 장면들을 보고 잘라 말합니다.
이건 절대 사용자 잘못이 아니다. 기계 잘못이다.
기계는 정해진 규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반면 사람은 유연하기 때문에 기계에 맞춰서 어떤 작업도 수행가능합니다. 그러다보니 기계와 사람 간 공백은 무엇이든 사람이 채우도록 상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사람은 반복적 작업을 지루해하거나 비효율적으로 느껴 자동으로 진행하는 시스템 1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맥락에서 벗어나거나 상황을 잘못 읽으면 오류가 생깁니다.
장면 1은 흔히 접하는 경우입니다. 스위치나 수도꼭지, 온도계는 조절장치의 위치와 작동 방법, 방향이 지역마다 다릅니다. 문화적 배경과 관습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한 지역에선 익숙해서 디자인 할때 생각할 여지도 없는 당연한 일이, 다른 문화에선 전혀 알 수 없는 내용일 경우가 많습니다.
장면 2는 디자인할 때 사용자 관점이 아닌 생산자 관점으로 설계해서 그런 경우입니다. 버튼의 크기가 똑같다든지요. 더 미묘한 어려움은 상응(mapping)의 문제입니다. 위 아래 버튼일 때, 문화와 개인차 때문에 위가 뒤를 뜻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앞을 뜻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좌우로 배열해도 뒤집어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누가 리모컨을 잡더라도, 누가 방에 들어와 스위치를 찾고 누르더라도 쉽게 만드는게 디자인의 핵심입니다. 미학만이 디자인이 아닌거죠. 도널드 노먼은 말합니다.
흔히 실패라고 하는 인간 오류(human error)란건 없다. 디자인 오류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디자인하는게 합당할까요?
책에 정리해둔 디자인 7요소라고 있지만, 노먼의 주장 중 가장 피부로 와 닿는건 행위지원성(affordance)와 기표(signifier)입니다. 어떤 행위가 가능한지 물리적, 의미적, 논리적 제약을 만든 후, 기기를 사용하는 사용자가 쉽게 찾고 이해하도록 세심하게 길을 표시해주는 겁니다.
문을 예로 들겠습니다. Push, pull (미시오, 당기시오) 써도 그대로 안하는 경우가 많죠. 양쪽 다 열리니까요. 하지만 어떤 문은 절대 한방향으로만 움직여 쿵 부딪히기 쉽습니다. 더 큰 문제는 재난 상황입니다. 언어적 문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응급상황에선 문자를 잘 안보고 본능이나 습관대로 행동합니다. 이때 대형사고가 납니다. (노먼의 초기 저술 이후 세계적으로 엄청난 숫자의 어처구니 없는 문의 디자인이 수집되었고 '노먼의 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문의 행위지원성과 기표는 쉽습니다. 밀어야 하는 문은 손잡이를 삭제하고 미는 장치를 뚜렷이 보이면 됩니다. 푸시 바나 패닉 바를 놓고 절대 당길 수 있는 장치를 만들지 않으면 누가 봐도 압니다. 반대로 당겨야 한다면 잡기쉬운 고리형태의 손잡이를 달고 밀 생각이 드는 플레이트 형태는 붙이면 안됩니다.
이러한 기표를 확연히 하는게 중요한건 산업이나 안전시설입니다. 비행기 대시보드를 비롯해 40개 스위치가 있는 산업시설에서 뭐가 어느 조절장치인지 아는거 자체가 노하우가 될 정도입니다. 익숙해지는데도 오래 걸리지만 문제는 급할때 오작동이 된다는게 문제입니다. 체르노빌도 그 중 하나였지요.
4구짜리 가스렌지에서 자기집 말고 언제든 자신 있게 켜는게 쉽지 않은건 한 예일 뿐입니다.
그래서 노먼은 사용자 경험(UX)을 중요시 합니다. 그리고 이런 노먼의 철학을 철저히 계승한게 애플입니다.
애플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매우 직관적입니다. 매뉴얼이 없이도 바로 사용가능하고 약간의 기술을 익히면 매우 일관되게 안 해본 작업도 유추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더 잘 배우기도 합니다. 초기에 애플을 애플답게 만든 스큐오모피즘(skeuomorphism, 사물의 특성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 쉽게는 폴더를 종이폴더 그림으로 이북을 넘기면 종이책처럼 넘어가는)의 신봉자였던 스티브 잡스와 조너선 아이브는 인간과 고객을 이해하는 진정한 디자이너 였습니다.
그 외에 재미난 이야기가 더 나오지만 인상 깊었던 대목 하나만 더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실패가 아니라 학습경험이다. (LX, learning experience)
단번에 좋은 디자인이 나오긴 어렵더라도, 사용자가 겪는 어려움을 이해하고 개선하여 다음 버전의 기표로 삼는 마음가짐이 훌륭한 디자인, 인간을 위한 디자인의 초석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책에서도 지적하고 제도 싫어하는 디자인은 이런겁니다.
- 대소문자+숫자+문자 섞어서 10자 이상 억지로 만들라는 암호 규정 (밖에 써두게 하거나 하나를 다 쓰게 만들어 보안을 취약하게 함)
-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액티브X 같은 수많은 프로그램을 깔아야 되는 것들 (전체적인 사용자 경험에는 전혀 관심이 없음)
- 피드백이 없어, 되었는지 안되었는지 몰라 또 누르고 결국 작업 실패 (홀수번에 작동하는 스위치들)
- 가입이나 구매하다가 문제생기면 리셋하고 처음부터 다시 (x개 훈련. 이건 매출 떨어지는 직방이기도 함)
Inuit Points ★★★★★
명불허전입니다. 예전부터 도널드 노먼에 대한 언급을 많이 듣고 디자인 쪽의 구루인가보다 생각은 했는데, 책을 읽으니 기대 이상으로 매력적이네요. 디자인을 위해 미학보다는 뇌과학을 연구하고, 기계공학과 심리학까지 궁극으로 추구합니다. 사용자의 고민과 불안과 의문을 디자이너가 알아서 리서치하고 미리 해소해 두는 인간중심디자인(HCD)이 노먼이 평생 추구한 아름다운 철학 같습니다. 간혹 원전 급의 서적을 만나면 행복한데 이 책도 그랬습니다.
노먼의 디자인 사고방식(design thinking)은 애초엔 디자이너의 업무를 하위에서 상위로 올리려는 노력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노먼의 집대성은 디자인이란 색이 묻어 있을 뿐 '제대로 일하는 법', '사용자를 생각하는 법', '사업을 잘 하는 법'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건 디자인 서적이 아니라 인문학 책이고 경영학 책입니다.
흠도 있습니다. 책 중간 어딘가부터 대학원생 강제로 작업시킨듯 발번역이 심각합니다. 내용은 흥미진진한데 문체는 교과서보다 더 딱딱한 직역체로 바뀌는 시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의 메시지는 통찰적이기에 별다섯 줄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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