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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본문
얼마 전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이 오스카 4관왕이 되어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그의 초기작 '살인의 추억'은 꽤 오랫동안 미제사건으로 남았었기에 관심을 모으기 좋은 스토리였고요. 어떻게 그런 연쇄살인범이 잡히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해 봉감독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범인과 시대의 갭(gap)이었다."
원한이나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병적인 심리로 사람들을 상하게 하는 연쇄살인범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선진국형 범죄입니다. 살인의 추억 당시엔 아직도 우리나라 경찰에선 그를 잡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음을 봉준호 감독은 꽤나 명료하게 표현했습니다.
한편, 이런 사회구조적 변화를 읽으면서 미리 준비를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윤외출과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이지요.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느낀 점은 프로파일러라는 직업이 상상과는 다르단 점입니다.
CSI나 '양들의 침묵' 같은 영화, 드라마에서 접하는 프로파일러는 세련되고 명석한 사무직 느낌입니다. 하지만 극화의 숙명 상 일부의 진실일 뿐이죠. 프로파일러는 경찰 같은 심리학자가 아니라 심리학자 같은 경찰이라는 책의 언명은 적절한 눈높이를 잡아 줍니다.
연쇄살인범 혹은 마음 사냥꾼(mindhunter)을 사냥하는 사람들. 그래서 경찰의 소양 뿐 아니라 범죄자의 심리도 훤히 꿰뚫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그냥 체스 두듯 머리로 상상하거나 홈즈처럼 추리하는게 아닙니다. 사건 현장에 범인이 갔던 같은 시간, 같은 조건, 같은 동선으로 임장하며 그에게 몰입하고 결국 범인화하는 직업입니다.
'그化'된다는 책의 표현대로 흉악범에 일체화가 된 후 다시 원래의 자아로 돌아오는것 오롯이 프로파일러만의 아픔입니다.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 병원에서 수액 맞으며 모드 전환한다든지, 아픈 속내를 미주알고주알 가족에게 말조차 못하는 엄청난 아픔의 일상이란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권일용이 첫 연쇄살인범과 인터뷰를 끝내고 밥을 먹이면서, '내가 평생 범인들과 밥을 먹어야 하는구나.'라는 탄식이 어떤 의미인지 읽다보니 절절히 느껴졌습니다.
어쨌든, 프로파일러는 수사관에게 확신을 주지만 직접 해결은 하지 않는 방식으로 수사에 기여해야하는 애매한 포지션입니다. 결국 범인을 잡는건 일선 수사관이어야 하고 그들이 프로파일러를 배격하면 기껏 찾아낸 추리와 프로파일도 무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건들을 추적하는 수사 이외의 한축은, 보수적이고 냉담한 경찰 조직에 프로파일러라는 조직을 이식하고 신뢰를 얻어가며 공조하여 연쇄살인범을 잡는 지난한 인내의 길이기도 합니다.
결국 책이 집요하게 탐구하는 질문 중 한가지는 이겁니다.
연쇄살인범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어떤 연쇄살인범은 타고 났을 정도로 사악하지만, 대부분의 사이코패스는 만들어진다는게 정설입니다. 경찰이 범인을 잡아도 처음엔 단건의 범인인지 단순한 잡범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수사관이 몸을 체포해오면, 연쇄살인범의 마음을 체포하는게 프로파일러의 업무이기도 합니다. 프로파일러가 범인의 마음으로 들어가 자백을 얻기전에 전형적으로 묻는 질문이 이렇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좋은 기억은 무엇인가. 나쁜 기억은 무엇인가. (트라우마)
면회오는 친구는 있는가. (지인관계)
부모는 어떤 사람이었나. (가족관계)
이 세가지 렌즈로 들여다 보면 범인이 자라면서 뒤틀어지는 지점이 보이고, 그 지점에 대해 언급을 하며 마음을 열면 나머지 연쇄적인 살인을 자백하는 식입니다. 결국 연쇄살인범의 공통된 특징은 반사회적 인격장애입니다. 사이코패스라고 하는 이상심리학입니다.
규범을 준수하지 않음
자기이익을 위해 반복적 거짓말과 사기
책임감이 결여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음
보다 현상적으로는, 모든 연쇄살인범은 남자고, 이전에 방화나 동물학대 등으로 전조를 보인다고 합니다.
연쇄살인범과 별개로 제가 놀란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보령의 한 소녀 살인사건입니다. 어린 자매 중 하나가 범행을 했다고 진술하고 나머지 형제들도 그렇게 증언하지만 프로파일러는 허위자백임을 짚어냅니다. 이유는 작화(confabulation)라는 심리기제였기 때문입니다. 증언한 사람들이 죄다 아이였고, 경찰이 강압수사나 고문 등을 하지도 할 이유도 없던 차라, 프로파일러팀에서도 허위자백임을 언급하기 힘들어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작화는 이런 상황에서 발동합니다.
일상에서 차단되어 심리적 안정감을 잃어버릴 때
+ 죄책감 + 무력감 + (센 사람인) 경찰의 기대에 영합하려는 심리
이 경우 노약자처럼 취약한 사람은 압박감을 느끼면서 어떤 암시도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스톨홀름 신드롬도 그런 기제인가 봅니다. 아무튼 죽은 줄 알았던 소녀는 다햏이도 살아서 돌아옵니다. 프로파일러의 추측이 맞았던거죠.
책이 추구하는, 그러나 명확히 답을 내리지는 않는 주제는 이겁니다.
왜 2000년대에 들어서 공감능력을 상실한 새로운 인간종이 태어났는가.
Inuit Points ★★★★☆
이 책의 제작 후일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사실 기반의 픽션을 표방하는 팩트스토리의 고나무 대표가 권일용 프로파일러를 비롯, 수많은 사람을 취재하여 발과 땀으로 쓴 공동저작입니다. 그래서인지 매우 독특한 향이 있습니다.
프로파일러가 나오는 액션영화 같은 호들갑도 없고, 조명이 최대로 켜진 해부대 위에 스토리를 올려둔 다큐멘터리같은 냉정함도 없습니다. 다만, 사실관계를 다루는 기자의 건전한 훈련이 빛을 발합니다. 집요한 사실관계 추구, 인물들과 공기 쿠션 같이 떠있는 거리감, 연쇄살인범을 악마화하지도 연민하지도 않는 절제된 수사, 피해자의 가족의 고통을 배려하는 조심스러운 글쓰기 등, 새로 자리 잡는 '실화 기반 픽션'의 장르적 요소를 제대로 정립하는 느낌입니다. 머니볼 같은 작품을 우리는 왜 못가질까 드는 의문은, 이 책이 답을 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후속의 작품들이 기대됩니다. 저자에게 선물로 받아두고도 연쇄 살인 이야기는 우울할 것 같아 미뤘는데 진작 읽었어도 좋았습니다. 바빠서 이 책을 읽기 어렵다면 서문이라도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한국형 장르의 탄생을 증거하는 백미이기 때문입니다. 별 넷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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