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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scana trip (4): 시간이 놓인 길 본문
숙소 앞으로 이탈리아 순례길이 지나가는건 제겐 감탄이었습니다.
Via Francigena
프란치제나 길(via francigena)은, 영국 캔터베리에서 출발해 도버를 지나 프랑스를 관통한 후 스위스 산지를 넘고 토스카나를 통과해 로마까지 도착하는 순례의 길입니다.
숙소가 있는 산 지미냐노는 시에나쪽 발도르차 평원에 비해서 고원이라, 길의 풍경이 제가 작년에 걸었던 스페인의 까미노 프리미티보와 매우 흡사했습니다. 그래서 집앞 길을 더더욱 좋아했습니다. 매일 아침 달리는데, 평평한 길은 없고 산위아래를 달려야 하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길 걷는 순례자와 종종 대화도 나눠보는데, 같이 걷는 자가 아닌, 머무는 자의 입장에서 대화하는 경험도 신기했습니다.
"언제 출발했니? 오늘 어디까지 가는게 목표야? 그래 천천히 잘 가. 행운을 빈다."
Pancole
순례길을 따라 15분 정도 걸어가면, 판콜레(Pancole)라는 귀여운 마을이 나옵니다. 수십 가구가 살고 있지만 1km에 대여섯 채 있는 우리 동네보단 확실히 대처입니다. 순례자를 위한 숙소도 있고, 관광객을 위한 아그리투리스모도 있지만, 상당히 큰 규모의 수녀원이 있는 점이 독특합니다.
Gambassi Terme
집에서 순례길을 거슬러 걸어가면, 감바시 떼르메(Gambassi Terme)라는 소도시가 나옵니다. 대개 여기서 출발한 순례자가 아침무렵 집앞을 지나지요. 감바시 떼르메는 스페인 까미노에 흔한 전형적 순례 거점입니다. 순례자를 위한 소박한 가정식 메뉴가 있는 식당도 있고, '알베르고'가 몰려 있는 마을 중심지도 있습니다. 갑자기 작년 까미노 걷던 순간으로 플래시백 된 느낌이었고, 살짝 뭉클했습니다.
San Gimignano
프란치제나 길 따라 로마쪽 순방향으로 가면 산 지미냐노가 나옵니다.
감바시를 떠난 사람들이 하루의 목표로 삼는 거리입니다. 이곳은 중세 이탈리아 특유의 타워하우스(torre)가 유명합니다. 훌륭한 탑들의 도시라는 별명입니다.
타워하우스는 요새가 아닌 주거건물인데, 인간의 공포와 탐욕으로 진화했습니다. 건물은 한 층의 넓이가 매우 좁은채 위로 올라가는 구조입니다. 중세 이탈리아에선 유력한 가문이 안전을 위해 탑을 짓고 살았습니다. 원래는 높은 1층의 창으로 사다리를 타고 들어간 후 사다리를 거둬들여 안전을 도모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탑의 높이란게 워낙 눈에 띄다보니, 가문끼리 자존심 경쟁이 붙습니다. 누가 더 높이 짓느냐로 경쟁을 하다보니 끊임없는 소모전이 벌어졌고, 아예 산 지미냐노 시청(Palazzo Comunale)보다 더 높이 짓지 못하는 법이 생기면서야 좀 조용해졌습니다.
탑 위에 올라가봤는데, 풍경도 좋지만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층이 매우 좁고, 위로 층이 많아 이동이 극도로 불편합니다. 이 비실용을 견디게 하는 질투심은 무엇일까 하는 점이 첫째 궁금증입니다.
그리고 든 생각은 다른 유럽 중세 도시에 없는 풍경이란 점입니다.
통상 힘의 경쟁은 최소 마을 대 마을 규모입니다. 도시 풍경을 보면 성의 외곽을 튼튼하게 하되, 내부는 대체로 화평한 풍모입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중세도시는 도시 내에서도 개인적 성을 짓고 가문과 가문이 대결한 흔적이 인상적입니다. 도시 내에서의 약탈 내지는 라이벌로부터의 습격이 더 두려웠던 건물의 기억이랄까요. 로미오와 줄리엣도 베로나의 못잡아 먹어 안달인 두 집안의 이야기니, 중세 이탈리아의 독특한 심리였을까 싶습니다.
실은 볼로냐 같은 경우 '중세의 맨하튼'이라고 할 정도로 탑이 많았습니다.
아직도 두개의 탑은 남아 있고 가장 유명한 관광 스팟입니다.
산 지미냐노는 현존하는 탑이 12개로 가장 많이 남아있어 유명합니다. '훌륭한 탑들의 도시'란 별명까지 생겼습니다.
Siena
산 지미냐노를 지나 계속 프란치제나 길을 따라 걸으면 순례길의 주요 거점인 시에나에 당도합니다.
시에나는 순례 종착지인 로마 가기 전 중요한 대거점 도시입니다. 여러모로 까미노 프리미티보의 루고를 닮았습니다. 인근의 대 거점이라 도착 열흘 전부터 사람들 대화에, 길 가 마일스톤에 소문처럼 존재하는 도시입니다. 교통의 요충지라 돌을 단단히 두른 강인한 모습도 비슷합니다.
시에나 성당과 시내에 가보면 늑대의 젖을 먹고 있는 유명한 그림이 곳곳에 보입니다. 늑대와 자란 두 형제 중 형 로물루스가 로마를 세우고 동생 레무스를 죽인 후, 레무스의 자식들이 북부로 도망쳐 에트루리아 인의 도시를 장악해 거점으로 삼은게 시에나입니다. 늑대 소년 그림은 정통성에 대한 자부심과 로마에 대한 강한 질투가 중첩된 느낌입니다. 양모와 금융으로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토스카나 지역의 맹주였던 시에나는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피렌체와 숙명의 라이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후일 르네상스의 기원이 된 메디치 등이 있는 피렌체의 발흥을 견디지 못하고 패퇴합니다. 엎친데 덮진 격으로 흑사병까지 돌아 시에나는 14세기라는 시간에 박제된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에나는 매우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과거 대도시의 위용이 그대로 느껴지면서도, 언덕위에 옴짝달짝 못하고 도시가 정체된 느낌, 40만 인구의 피렌체에 비해 5만인구라는 귀여운 사이즈, 도시 전체가 아름답고 단단하며 고풍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Firenze
토스카나라면 피렌체를 빼놓을 수 없네요.
르네상스의 발원지로, 마키아벨리가 메디치 가문에 취직하려고 쓴 논문이 '군주론'일 정도로 학문과 정치, 예술, 국제감각이 중세 정점에 달했던 도시 피렌체입니다. 프란치제나 길을 끼고 성장한 강호 시에나를 이기기 전까진 도전자의 입장이었는데, 이는 키안티 와인의 로고에도 면면히 살아 있습니다. 도시국가는 영토가 불분명하니 라이벌 도시끼리는 관할지를 놓고 다툼이 잦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불필요한 싸움을 줄이기 위해 시에나와 피렌체가 게임을 합니다. 아침 닭이 울면 각 도시에서 말타고 달려 서로 만나는 지점을 경계로 정하자고 했다지요. 이때 시에나는 건강한 흰 닭을 택했고, 피렌체는 병약한 검은 닭을 택한 후 굶겨서 일찍 깨도록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피렌체의 기수는 시에나 쪽으로 엄청 닥쳐와 경계가 정해졌고, 피렌체가 넓디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연유로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엔 검은닭이 그려져 있습니다.
피렌체는 예전 여행 때 두루두루 봤지만 또 봐도 좋습니다. 중세 공학의 경이인 엄청난 돔(쿠폴라)가 올라간 두오모, 다비드상이 있는 광장, 다리가 길이던 시절의 흔적인 아름다운 베키오 다리 등은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습니다.
미켈란젤로 광장이 있는 언덕에서 도시를 내려다 보면 많은 상념이 생깁니다.
왜 피렌체는 시에나를 이겼을까. 확장성이 좋은 평지라 그런가, 문화와 시스템이 강한 소프트 파워일까.
시에나가 더 진화하여 피렌체는 중세시대의 세계 중심지가 되고, 더 진화하여 고속철과 비행기로 맞물린 현대도시까지 성장한 반면, 시간속에 박제된 시에나와 비교해보면 만감이 듭니다.
공간에 펼쳐진 프란치제나 길을 따라 시간을 오가는 여행을 했습니다.
집들이 띄엄띄엄 있는 산골,
걸어서 10분 거리의 판콜레 마을,
탑들이 뺴곡한 읍성 도시 산 지미냐노,
중세 거점인 시에나,
그걸 극하고 현대 대도시가 된 피렌체까지
문명의 시간적 빌드업이 한 길에 펼쳐져 있습니다.
차로 달려 시간을 관통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을 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정, 사랑, 대화고,
규모를 달리 하는건 질투, 욕망, 탐욕, 부인 것 같습니다.
오감으로 상상이 많아진 토스카나 여행은 감탄 그 자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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