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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딸 본문
1️⃣ 한줄 평
70년 지나 읽어도 확실한 재미. 서술, 전개, 소재 그 무엇 하나 모자람 없는 명작.
♓ Inuit Points ★★★★☆
원형적인 안락의자 탐정소설입니다. 부상으로 장기입원한 형사 앨런 그랜트가 침대에 누워 영국 역사의 비밀을 풉니다. '곱사등이에 조카 둘을 죽인' 희대의 악인 리처드 3세가 쓴 역사적 오명의 실체를 밝힙니다.
🎢 Stories Related
- 1990년 영국 추리작가협회는 이 작품을 시대 초월 미스터리 100 중 1위로 선정했습니다
- 테이의 안락의자 탐정은 동시대 및 후세의 추리소설 작가에에 많은 영향을 미쳐,
- 탐정이 못 움직이지만, 자료와 추론만으로 복잡한 지적 퍼즐을 푸는 멋진 장르가 탄생했습니다.
The daughter of time
Josephine Tey, 1951
🗨️ 좀 더 자세한 이야기
Truth is the daughter of time.
진실은 시간의 딸이다.
제목은, 결국 시간이 지나 드러날 진실에 대한 이야기란 점을 암시합니다.
이 소설은 스포일러랄게 없습니다. 초입부터, 리처드 3세가 누명을 쓴 것 같다는 가정 하에 진실을 추론하는 내용이니까요. 결론은 짐작가지만, 그걸 풀어가는 과정 자체를 온전히 즐기게 됩니다.
소설은 3가지 도드라진 매력이 있습니다.
첫째, 엄청난 필력입니다.
단어 몇 개와 대사 몇 마디로 개성 뚜렷하고 핍진한 인물들이 펄떡펄떡 살아납니다. 제가 지금까지 본 인물묘사 중 최고입니다. 사건해결과 무관할지라도, 짧은 몇 문장으로 인물들이 눈앞에 그려지면서, 독자는 소설의 시공간에 스며들듯 몰입됩니다. 마법적인 솜씨입니다. 빠르면서도 섬세한 필치는 선 몇 개로 실루엣과 음영을 그려내는 화가 같습니다.
둘째, 역사에 속박된 인물의 반전적 진실을 찾는 대담한 학문적 모험을 떠납니다.
주인공 앨런 그랜트는 범인을 쫒다가 크게 다쳐 장기 부상을 끊습니다. 고정된 공간이 답답해 짜증을 내자 친구가 얼굴 관상 보길 좋아하는 그랜트를 위해 초상화를 사다 줍니다. 그림속 인물은 리처드 3세입니다. 영국인 누구나 아는 악인,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곱사등이 괴물 리처드 3세입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전혀 악당 같지 않고 정의로운 판사같다는 기묘한 느낌을 받습니다.
뛰어난 형사인 그는 직감에 의지하여 자신의 상식을 검증해 봅니다. 점점 조사를 해나감에 따라, 승자가 기록한 역사대로 현대 영국의 역사적 고정관념이 세워짐을 알게 됩니다.
셋째, 안락의자 탐정이란 제약이 주는 독특한 지적 즐거움입니다.
소설 내내 그랜트는 침대에만 머물고, 그의 조력자들이 대신 몸을 움직입니다. 나가서 책과 문헌을 구해오고 그 자그마한 지식의 증량에 기반해, 토론하고 퍼즐을 맞춰갑니다. 혐의는 이미 600년전에 종료된 사건입니다. 범인이 도주하거나 연쇄사건이 벌어질 일도 없고, 잡으려 격투 벌일 일도 없습니다. 세월로 유실된 빈약한 자료를 놓고 추론합니다. 자료를 만든 사람의 처지를 보며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여 기각 또는 채택을 합니다. 어찌보면 문헌을 심문하는 것 같습니다.
크게 두가지 원칙을 사용합니다.
Cui bono?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가?
Fact, not story! 전해지는 이야기 말고, 원자료를 찾습니다. 서한이나 회계장부, 기록된 행동에 주목합니다.
결국, loyaulte me lie (loyalty binds me)를 문장(紋章)에 넣을만치, 충심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리처드입니다. 섬기는 왕이었던 형과 우애가 좋았고, 두루 가족도 잘 챙겼습니다. 외모도 곱사등이는 커녕 전장에서 용맹무쌍한 전사였을 거란 증거들을 찾아냅니다.
-결정적 증거부분이라, 소설 읽으실 분은 스킵하세요-
결정적으로, 리처드를 이긴 왕 헨리 7세는 찬탈한 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잡스러운 죄목을 다 씌웠지만, '조카 살인' 같은 최고의 명분은 기소된 죄목에 없습니다. 리처드를 처단한 후에도 상당기간 왕자들이 살아 있음을 알아냅니다. 후대의 살인죄는 쌩으로 덧씌워진 거죠.
심지어 살해된 조카들은 리처드의 형 에드워드의 적법한 왕자가 아니었습니다. 이건 왕자들의 실종과 무관하게 리처드가 온전한 적통의 왕이라는 증거인데, 헨리 7세가 이 증거를 왕령으로 숨겨버린걸 찾아냅니다.
결론적으로, 리처드는 정통한 왕이었기 때문에 조카를 죽일 이유도 없었고, 실제로도 가족을 끔직이 아꼈기 때문에 리처드가 조카 왕자를 죽인건 거짓말이죠.
그랜트는 계속 문헌을 수사하여, 누가 죽였을 것인지까지 찾아내며 마무리가 됩니다.
-End of detail-
이 추론의 수사 과정이 무척 재미납니다. 증인 대신 문헌을 추적하며 중요한 퍼즐조각이 채워지지 않아 애가 닳을 땐 독자도 같이 침을 꼴깍 삼키며 문장을 쫓아 내달립니다.
책에서 강조하는건 토니판디(Tonypandy) 이벤트입니다. 토니판디 광산의 데모에 정부군이 학살을 했다는 증오의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만, 실제는 아니었습니다. 외려, 정부는 유혈사태를 염려하여 군 아닌 경찰을 투입했고, 정녕 피가 났다면 찰과상일 정도의 조용한 마무리였다고 하죠. 그러나 누군가가 의도를 갖고 학살의 역사로 바꿨고 대중은 그리 기억합니다. 리처드 3세도 헨리 7세가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 왕위를 뺏으려 어린 조카 둘을 죽인 곱사등이 악마로 조작했을걸로 보입니다. 스토리가 드라마틱하니, 셰익스피어가 그 사건을 소설로 다뤄 대중에게 각인된 것이죠.
그래서 참 재미납니다.
실존하는 기록에 의존해 역사를 추정하되, 소설 특유의 재미난 이야기라는 형식에 태웁니다. 엄밀한 사료로 커버되지 않는 부분은 소설적 상상력으로 메워가며 진실을 찾아내는 구조는 지적으로 즐거우면서도 퍼즐을 풀듯 상쾌함도 느껴집니다. 소재도 작가도 희귀하니, 이런 소설이 몇 개나 더 나올 수 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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