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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Inuit 2025. 9. 27. 09:07

1️⃣ 한줄 

극도로 절제된 단어들, 읽으며 배어나오는 감정. 

 

Inuit Points ★★★☆☆

명불허전입니다. 매우 짧고 고요하며 자극없는 이야기임에도, 막판 줄에서 현기증이 정도로 감정적 동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가서 부분부분 읽게 되지요. 키건의 최근작 '이처럼 사소한 것들'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제가 소설 쓰는 사람이면 문체의 비결을 깨달을 때까지 필사하며 공부할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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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는 #우물, #양동이, #물에 비친 소녀의 모습 이란 세가지 키워드로 글짓기를 하다 나온 작품이라 합니다
  • 이 소설로 만든 영화는 제목이 '말없는 소녀'입니다.

Foster

Claire Keegan, 2010

 

🗨️ 좀 더 자세한 이야기

인상적인 부분이 네가지입니다.

 

우선 매우 분량이 짧은 점이 가장 눈에 띕니다.

첫부분 읽으며 분위기 적응하다보면 벌써 1/3 지나가 있습니다. 하지만 문장이 고농축이라 휘릭휘릭 읽게 되지 않습니다. 꼭꼭 씹어 읽게 됩니다.

 

둘째, 소녀의 시선으로 이야기하여 작가가 상황을 통제합니다.

낯선 곳에 갑자기 맡겨진 아이, 어리니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게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건 소녀보다 독자가 먼저 눈치채고, 어떤건 소녀가 무심결에 놓쳐 독자는 중요한 정보를 모른채 읽게 됩니다. , 소녀라는 화자를 통해 작가는 독자와 비대칭성을 유지하면서 의도한 감정을 이끌어갑니다. 필요한 만큼만 보여주고 들려줍니다.

 

셋째, 저자극이라서 으스스합니다.

자식 많은 가난한 집의 소녀가 부유한 친척집에 잠시 맡겨졌다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기본적으로 없는 설정이지만, 소설이라면 실은 어떤 일도 일어나기 쉽습니다. 문장마다 반전의 여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무구한 소녀의 눈으로 보고, 듣고, 맡고, 느끼는 모든 생경함에, 왠지 일이 일어날까 조마조마합니다. 너무 고요하기 때문입니다. 맡아준 킨셀라 부부가 너무 선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 미디어에 익숙한 독자는 이쯤 사건이 일어날텐데, 어두운 복도 모퉁이를 돌듯 조심스레 발디디며 읽게 됩니다.

 

넷째, 키건 다운 결말입니다.

천번은 고쳐썼을 마지막 문장은 마법입니다.

'Daddy,' I warn him, I call him, 'Daddy'.

문장 하나로 많은 진실이 휘몰아치며 머릿속을 채우고 이내 감정이 폭발합니다. 그간의 조바심, 소녀의 불안, 세세한 궁금증이 순식간에 엮여, 하나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앞으로 가서 읽게 됩니다. 이미 읽었던 문장이 마지막 문장을 이후에 어찌 달리 보일지 궁금하니까요.

 

모든 마법은 키건 특유의 문체 덕입니다.

단어 하나조차 아껴쓰는 그의 글쓰기는 독특합니다. 그는 애써 세계를 만든 후엔 다시 애쓴 흔적을 철저히 들어내는데 힘을 쏟는다고 합니다. 허구 세계의 창조자로서 보여주고 싶고 설명하고 싶은 모든 욕구를 거세하고, 독자의 지력만을 믿고 윤곽에 필요한 선만 모두 지워버립니다. 그래서 단어 하나를 써도 물성과 시간, 공간과 지역성, 빈부가 중첩하는 말을 골라 적습니다.

 

결말마저 그러합니다.

모호한 문장은 사실 두가지로도 해석 가능합니다. 심지어 앞과 뒤의 daddy 다를 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Warn call 주는 묘한 긴장감 때문이고, 번잡한 접속사조차 절제한 문장이라서 그렇습니다.

 

지점에서 번역이 약간 아쉽기도 합니다. 원문 찾아보니 소녀는 father dad 구분해서 쓰는 점이 매우 힌트가 되는데, 번역에선 모두 아빠로 되어 있습니다. 아빠여야만 하도록 키건이 공들여 쌓은 이야기 구조가 간과되는 점이 옥의 티입니다.

 

형식 자체를 즐길 소설이지만, 굳이 주제의식을 따지자면 지나치게 많은 말보다 외려 침묵과 절제가 많은 말을 한다는 내용입니다. 절묘한건 주제의식을 소설의 문체가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글의 재미로 따지면 근작인 '이처럼 사소한 것들' 낫습니다. 하지만, 어떤 거대한 사건에 기대지 않고 일상적 소재만으로 두려움과 사랑, 긴장과 이완, 미지와 확신 사이의 미묘한 결을 표현하는 작품성으로는 '맡겨진 소녀' 탁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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