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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Inuit 2025. 12. 27. 09:31

1️⃣ 한줄 

충격적인 문장력, 말로 그린 바니타스(vanitas).  

 

Inuit Points ★★★★☆

  써진 글들 많지만, 책은 제가 꼽을만한 글입니다. 시와 철학과 견문의 이야기들로 중첩되었습니다. 단정하고 함축적인 문장이 실처럼 풀려나오며, 씨줄 날줄 엮이며 관념으로 직조됩니다. 글로 짜여진 옷감은 철학적 통찰이 무늬 박혀있습니다. 유려한 문장과 매혹적인 이야기를 통해 만물이 어떤 상념으로 연결되는게, 기막힌 솜씨입니다.

 

🎢 Stories Related 

  • 레베카 솔닛은 맨스플레인이라는 말을 만든 것으로 유명합니다.
  • 그러나 글에서는 페미니즘이 그리 도드라지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 주로, 사람다워지기, 다워지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The faraway nearby

Rebecca Solnit, 2013

 

🗨️   자세한 이야기

책을 관통하는 소재이자, 솔닛이 쓰게 만든 원동력은 그의 어머니 병구완입니다.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돌보면서 생기는 감정이 책의 토대적 문장입니다. 여느 책과 다른건, 돌봄이 슬픔과 사랑이 아니라, 증오와 짜증, 서운함 펄떡거리는 아픈 감정입니다. '아들은 곱셈이었고, 딸은 나눗셈'인이었던 엄마는, 싱글인 외동딸이라는 이유로 작가가 돌봄을 주로 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통속적인 페미니즘 산문인것 같지만, 책은 예상을 배반합니다. 빤한 계곡의 물줄기인 알았지만, 이내 이야기의 대양으로 나아갑니다. 거울처럼 스스로의 모습을 겹쳐보며 딸을 질투해 평생 미워했던 엄마, 와중에 작가 스스로도 병에 걸려 수술과 치료를 받는 이야기, 참에 아이슬란드의 독자가 초청을 도피하듯 바다 건너가 낯선 곳에서 사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모퉁이를 때마다 풍경이 휙휙 변하는 테마 파크같습니다.

 

모든 챕터가 좋지만, flight이라는 4장이 압권입니다.

족자 그림 속으로 사라지며 왕에게서 도망친 우다오쯔의 고사로 시작해, 문이 벽이 되고 벽이 문인 관념들을 이리저리 이야기합니다. 실타래 끝에 솔닛의 본심이 나오죠. 책이 바로 우다오쯔의 족자라는 점을 짚습니다. 작가와 독자는 막혀있는 속으로 뛰어 들어 건너 세계로 넘어간다는 매혹적인 관점입니다. '책은 다른 이의 안에서만 박동하는 심장'이라든지, '글쓰기는 아무에게도 없는 이야기를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라는 표현에서 그의 이야기 이론을 엿볼 있습니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나병 환자들을 두루 만나며 혁명가가 게바라의 챕터도 백미입니다. 나병에 대해 온갖 기이한 이야기를 하던 끝에, 솔닛은 고통이 신체적 자아의 한계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남의 고통을 동일시하는 공감과 연민이 정신적 자아의 확장임을 제시합니다. 게바라는 나병환자의 고통을 받아들이면서 혁명가로서의 자아를 확장했던 행적을 말하며, 독자 자신을 생각하게 합니다. 고통 자체를 회피할 일도 아니고 자아로 받아들이되, 공감과 동일시를 통해 언제든 자아를 확대하고 연대할 있다는 , 이걸 잊지 않으면 고통 속에 의미를 발견하며 살아갈 있는 거지요.

 

솜씨좋은 환상술사가 카드 마술과 손수건 마술, 대상이 사라지고 나타나는 경이를 매끄럽게 연결하며 감탄을 자아내듯, 매우 생경한 조합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풀어내되, 읽다보면 이야기들이 연결되며 의미가 새로 잡히는게 재미납니다. 1001 밤동안 목숨을 걸고 이야기를 풀어내던 세헤라자드와도 일견 닮았습니다.

 

혹은, 네덜란드 미술 바니타스(vanitas) 닮았습니다. 해골과 시계, 악보 등으로 삶의 덧없음을 자각하여, 지금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그림말이죠. 책은 바니타스의 텍스트 버전입니다.

 

에세이지만, 매우 T스러운 솔닛은 목차에서도 진면목을 봅니다.

살구부터 매듭까지 진행된 글은 다시 살구로 돌아옵니다.

 

치매로 인해 아이처럼 퇴행하는 엄마의 모습도 보이고, 무에서 와서 무로 돌아가는 생명의 덧없음도 느껴집니다. 그런면에서 제목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원제가 멋진데, the faraway nearby, 곁에 있는 머나멈입니다. 부대끼면서도 외로운 정서가 풀풀 느껴집니다.

 

옥의 티라면, 오역이 난무하는 번역입니다. 미궁과 미로를 거꾸로 해석한걸 필두로, 군데군데 오역과 거꾸로 뒤집힌 의미들이 많아 매우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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