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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Soccer

축구가 고마울 때

Inuit 2010. 3. 14. 22:08
오늘 성남 일화의 인천전이 있는 날입니다. K리그 개막전 승.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AFC) 파죽의 2연승으로 물오른 성남입니다. 상대가 강팀 인천이지만 홈경기니 해볼만 합니다.

인간은 밤에 소변 욕구가 줄어든다. 바소프레신 덕이다.
 물을 마실 수 없으니 수분 감소를 막기 위한 방편이다.
진화적으로도 유리한게, 밤에 목 안마른 대신, 소변 때문에 잠 안깨도 되니 좋다.

하지만, 비자연적인 상황은 인간의 프로그램에 예외처리 규정마저 없는 법.
수술 한 아이는 식사를 할 수 없어 하루종일 수액을 맞는다. 그러다보니 밤에는 고역이다.


시즌 오픈 전부터 전문가들로부터 중위권으로 점쳐졌던 성남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그나마 성남 뒷심의 뿌리인 허리를 들어냈으니 말입니다.

아이는, 가뜩이나 온 몸이 아프다.
엉겨붙고 부어버린 모든 내장들,
복강경이 들어간 세군데 구멍.
어린 핏줄이라 제대로 못 찔러 생긴 바늘구멍,
초보 간호사가 구경 틀려 다시 찌른 구멍,
바늘이 혈관을 뚫고 나가 생긴 부종까지.

미드필드 이야깁니다. 주장이었던 김정우는 군 문제로 상무가고, 이호는 중동으로 날랐지요. 설상가상으로 빼어난 장학영, 조병국도 입대설이 솔솔 나오고 있습니다.

아픈 아이 낑낑 대는 소리에 퍼뜩 깨어 보면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에 가려고 혼자 분투중.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해도 세시간 있으면 또 조용한 인기척.

그러나, 내전과 국제전을 동시에 치러야 하는 성남은 얇은 스쿼드에도 불구하고 정예로 거듭났습니다. 정대세가 활약하는 가와사키 프론탈레를 홈에서 2:0 제압. 넘4벽 사샤의 친정팀인 멜버른 빅토리 원정경기를 또다시 2:0 승리로 장식했지요.

맹장 터진 아이의 난적은 크게 세가지다.
첫째, 고름집.
터진 맹장이 등까지 돌아 문제가 심했지만 최대한 씻었다고 한다.
그러나 남은 상처와 잔존물이 다시 고름이 되면 재수술까지 해야한다.
 둘째, 시술부위다.
통상적 맹장수술은 괜찮은데 터진 경우는 감염 우려가 있어 예후를 봐야 한다.
셋째 장유착이다.
장끼리 들러붙어 기능을 못할경우 장마비나 부차적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운동을 많이 해서 장들이 자리를 잡게 해야 한다.

K리그 개막전은 신생팀 강원. 그 상승세가 무섭지만 최근 3년 개막전 무승의 징크스도 무섭지요. 하지만, 몰리나 - 라돈치치 - 파브리시오 의 3각 편대 위력은 정상급이었습니다.


금요일 칼퇴근하여 꼬박 이틀, 아들과 함께 했다.
토요일은, 아파서 눈물 글썩이거나 까칠한 짜증 내는 아이
설득하고 달래서 운동시키는게 일이었다.
목표는 가스 배출. 금요일은 하루 여덟번을 돌았는데 무소식이었다.
다행히 토요일 오후되어 피식 성공.

마침 인천전은 탄천 홈경기. 일찌감치 아이와 함께 보기로 약속했었습니다. 아들은 직관이 무산된걸 누워서도 아쉬워 했지요.

미음 먹이며 회복을 빠르게 하려했는데,
담당의는 아직도 장이 부었다고 물만 허락한다.
음식에 대해선 예민해진 아이라서
 금요일부터 아이앞에서 아무것도 먹질 못했다.
아픈 아이두고 식욕도 없고.
단지, 아내가 낮에 오면 잠시 '바람쐬러' 가서
딸과 이야기 나누며 싸온 음식을 도둑질하듯 먹었다.

병원에서 집으로 오는 택시 안에서 받은 전화는 아이의 기쁜 목소리입니다. '아빠 성남 1:0 이기고 있어!' 케이블일지라도, K리그를 TV 중계 해주는게 희한하고, 고새 몇분이나 되었다고 골 넣은 성남도 신통방통합니다.

일요일 오후되어서 딸 데리고 귀가. 아내와 교대다.
집에 오자마자 TV를 켠다. 다행히 인천전 축구 중계를 한다.
스코어를 본다. 1:0이다. 아니 다시 골이다.
또 골 또 골. 순식간에 5:0이다.

작년 플레이오프 때 기대 이하의 플레이로 우리 부자의 속을 상하게 했던 파브리시오 선수, 올해는 포텐 제대로 터지면서 연일 플레이 메이킹을 합니다. 게다가 정대세 선수마저 자신을 겸허히 돌아보게 만든 라돈치치. 확실한 공간 만들기와 게임의 흐름 바꾸기 능력을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더이상 말할 필요도 없는 몰리나...

아이와 통화를 한다.
방금전까지 아팠던 모습을 못봤다면
아이가 한시라도 아프다고 생각하기조차 어렵다.
아이는 최고의 기분과 최상의 컨디션이다.
골 하나하나 동작 하나하나를 각인하여 아빠에게 조잘댄다.

축구는 스포츠입니다. 그냥 경기고 게임이지요.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희망이고 어떤 상황에서는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저도 고된 주말에 웃음을 지을 수 있었고, 아이도 멍하니 바라보던 주말 TV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6:0. 성남 창단 이래 최대 골 타이 기록.
올시즌 최다 골, 최다 골 득실.
노란 옷 입은 선수들이 고맙다.
아비가 이틀 붙어서 지극 간병해도 주기 힘든 기쁨을 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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