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할 때, 유독 달팽이 속도로 읽게 되는 책이 있습니다. 재미난 책인데 지명이 나오는 경우지요. 주로 지정학을 다루는 책이나, 역사서, 건축 관련한 책이 그렇습니다. 이땐 아예 구글 지도를 태블릿에 띄워두고 글속 장소를 더듬어 가며 읽습니다. 몰두하는 책은 스트리트 뷰까지 켜고 거리의 기운까지 잠시 감상을 하기도 하지요.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 베른 동선 

소설은 읽지 않지만 기억나는 책이 있습니다. 포르투갈 여행 '리스본행 야간열차' 읽다가, 주인공이 베른에서 다닌 동선을 지도에 찍어가며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냥 단어의 나열과 연결이 아니라, 공간 속에서 소설을 보면 생생합니다. 단지 현실성의 증강을 넘어, 주인공이 이동한 물리적 거리감과 느껴질 심상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군요?

제목은 중의적입니다. 소설 현장을 지도에 매핑해본 내용이라, 읽을 지도, 떠날 지도입니다. 아마 트레바리 독서모임에서 만난듯한 저자들은, 소설 현장을 실제로 답사해보고 글을 적었습니다.

 

'김약국의 딸들'이 살았던 통영, '운수좋은 날'에서 김첨지가 인력거를 끌었던 혜화동에서 서울역까지 그때와 지금을 비교합니다. '소년이 온다' 금남로와 전남대, '차남들의 세계사' 무대였던 원주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전지훈련을 삼천포와 남일대, 그리고 그들의 본거지 부평을 살핍니다. '한국이 싫어서', 정확히는 아현 달동네와 역삼역 2호선과 군상들이 싫어서 떠난 호주 시드니까지 지평을 넓혀도 봅니다.

 

이렇게 보면 소설 속 지명과 건물을 보물찾기한 기행문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베른과 리스본을 지도로 훑듯 책을 풍부하게 이해하기에 필요한 정도로만 지리를 탐합니다. 책의 전편은 오히려 치열할 정도로 주인공의 상황에 몰입합니다. 과정에서 지리적 거리감, 빈부의 아득함, 공권력에 대한 상상적 공포, 지형의 시대적 차이를 꼼꼼히 짚습니다. 그래서 굳이 따지면 책은 여행기나 기행문이 아니라, 리뷰 또는 독후감에 가깝습니다.

 

그런면에서 여섯 소설과 물리적 장소를 매칭한 아이디어는 훌륭합니다. 글읽다 미묘하게 놓칠수 있는 신호를 증폭해준 점은 고맙습니다. 읽었거나 읽지 않았거나 작품을 물리공간이란 테이블 올려두고 날렵히 해체한 솜씨도 매끄럽습니다.

 

여섯 작품 좋았지만, 책의 백미는 마지막 두권 같습니다. 프로 또는 성공의 신화에 반기를 드는 '삼미슈퍼스타즈..' 헬조선을 탈출해야했던 '한국이 싫어서' 지금 젊은 세대의 시대 정신과도 맞닿아 있어서 그럴것입니다. 마치 트레바리 토론에 참여한듯,  내용을 이리저리 곱씹어보고 의미와 교훈을 여러방면으로 궁싯거리는 문장 하나하나가 좋았습니다.

 

Inuit Points ★

책은 4 공동작품이며, 아마도 같습니다. 그럼에도 어찌나 매무새있게 공들였는지 이음매 없는 목조건축같이 단정합니다. 누가 어느 부분을 썼는지, 아니 챕터가 넘어갔는지도 느끼기 힘들만치 톤과 매너가 일관성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곁다리로 알게된 사실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했던 소설인 '삼미 슈퍼스타즈..' 표절이라고 하네요. 저자 근황이 궁금해 검색하다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주제의식과 메시지는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장소를 답사하며 독서 토론을 하는 책이라니. 이런 고품질만 유지한다면 장르적 존재감도 생길만 합니다. 책장을 덮기도 전에 속편이 기대되는 독서였습니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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