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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Inuit 2022. 12. 24. 07:01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만치나 독특한 제목인데, 내용은 유니크합니다.

와, 이런 글도 가능하구나,
이런 글쟁이가 있구나.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Why fish don't exist:A story of loss, love and hidden order of life

Lulu Miller, 2020

 

겉보기엔 과학사 책입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란 어류학자의 이야기입니다. 별을 분류하기 좋아하던 소년은 커서 어류를 중독적으로 분류합니다. 결국 어류학자로 유명해져서 스탠포드 대학의 초대학장까지 됩니다. 책은 조던 인생사와 과학적 세계관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에 스탠포드 초대학장 조던씨라니.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는 인물입니다. 관심 없는 그의 인생 이야기인데도 빨려들 듯 보게 되는건 무슨 까닭일까요.

 

바로 저자의 진솔한 이야기가 주는 힘입니다. 학교 때 남자 애들이 자기 점수를 7이라 주는걸 어깨 넘어로 듣고 '나쁘지 않군' 생각했지만, 그건 함께 자기 위해 필요한 맥주의 갯수란걸 알게되고 절망한것. 정신적으로 불안한 언니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스스로의 우려. 모쏠로 지내다 어찌저찌 남자와 사랑에 빠졌지만 저자가 소녀와 외도를 해서 깨어진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

 

" 중요하지 않아. 개미보다도 중요하지 않아."

과학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불안 속에 헤어나지 못하는 딸에게, 아버지의 과학관에 따른 아이의 우주적 자리매김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힘든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저자는 조던씨를 탐닉합니다. '그는 분류에 집착했을까. 그가 모은 수많은 샘플을 화재로, 지진으로 두번 잃고, 아내에서 낳은 가장 사랑하는 아이를 차례 잃고도 구김없이 그의 이유는 무엇일까'를 찾습니다.

 

그러니 이야기가 재미납니다. 조던씨는 관심 없지만, 저자 밀러의 고행 같은 여정에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글은 과학사의 탈을 수기입니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유사한 책은 더러 있지요. 하지만 책은 커브볼을 던집니다. 중간에 크게 방향을 선회하여 추리소설로 바뀝니다. 조던 씨를 축출하려는 강령술에 빠진 창립자의 아내 제인 스탠포드가 하와이에서 변사합니다. 덕에 그는 학장의 지위를 유지하며 자신의 연구와 삶을 계속하지요. 하지만 그냥 우연이 아니지요. 그가 어류 샘플 채취하는 , 그가 동원한 언론과 거짓 증인들에 대한 풍성한 증거를 모아 공소시효가 끝난 살인 사건을 밝혀둡니다.

 

여기서 또 한번 반전이 있습니다. 은폐한 살인이라는 개인적 죄를 넘어, 미국에 우생학을 들여온 조던 씨를 추적합니다. 저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조던씨와 일파의 도움으로 미국이 수입한 우생학은 초기에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다위니즘의 흑화버전인 우생학을 사용하면 나쁜 유전자를 거세하고 좋은 유전자만 남길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니까요. 신세계적 발상입니다. 실제로 이에 바탕한 입법과 수용소가 있었고 피해자들을 인터뷰한 글이 이어집니다. 지금은 미국의 과학사에서 우생학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버렸지만요.

 

여기까지만 해도 놀라운 글인데, 책은 다시  하나의 마술을 펼칩니다. 바로 어류를 사라지게 만듭니다. 캐롤 계숙 윤의 책에 기대어, 포유류, 조류는 있어도 어류가 없음을 밝힙니다. 책의 제목도 여기에서 유래하지요.

 

결국 인식적으로는 존재하지만 과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어류. 어류를 과연 독자는 놓을 있는지 저자는 묻습니다. 천동설적 별을 놓아주고 지동설적 우주를 얻을 있는지의 문제이지요.

 

Inuit Points ★★

마술사의 솜씨입니다. 이걸 보여주고 저게 갑자기 튀어나오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납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철저히 통제합니다. 필요한 만큼만 보여주고, 읽은 데까지만의 세계가 온전합니다. 여기에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면 경탄하고 앞의 세계와 덧대어져 또 다른 세계가 보입니다. 자체가 신선하고 철학적 함의도 대단합니다.

결국 희망은 무엇인지. 차가운 우주에서 오는지 내적으로 발현되는 건지. 신념과 의심의 적절한 비중은 무엇인지. 혼돈과 질서는 어떤 관계인지 묻고 생각하도록 채근합니다.

저자 스스로가 '꼬리를 잃어버린 영장류처럼' 안타까이 찾던 곱슬머리 남친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정작 지금의 아내를 만나는 장면은 생각할 점이 많습니다. 과연 분류란게 무슨 의미일까. 어류도 없다는데. 조던은 있지도 않은 어류를 평생 분류하다 죽었는데 그건 무슨 의미일까. 최소한, 덕에 스탠포드에선 초대학장의 동상을 철거했다 하니 책은 하나에게만 감흥을 일으킨건 아닌듯 합니다. 이런 종류의 책에겐 줘본 적 없는 별을 넷이나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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