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uit Blogged
말놓을 용기 본문
1️⃣ 한줄 평
말은 마음의 그릇 맞지만, 말만 놓는다고 마음도 놓아질까
♓ Inuit Points ★★★☆☆
외국어로서 한국말은 존대말이 어렵다고 정평 나있지요. 단어나 표현도 반말, 존대어 두가지이지만, 각각 사용하는 맥락까지 파악하려면 문화력이 필요하니까요. 한국인들끼리일지라도, 존대말-반말은 언어로 가두는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관점이 평어 운동입니다. 평어의 개발자라고 자처하는 이성민 저자의 시도는 가상하지만, 한계점도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실험이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함량은 별 둘인데, 응원하는 마음으로 별 셋 줍니다.
❤️ To whom it matters
- 말 잘 못 놓는 사람
- 모임 가면 나이따져 말 찍찍 놓는거에 혐오감 있는 사람
- 친구가 별로 없는 사람
🎢 Stories Related
- 요즘 스레드는 평어가 대세라지요
부제: 관계와 문화를 바꾸는 실전 평어 모험
이성민, 2023
🗨️ 좀 더 자세한 이야기
일단 평어란 말이 생소하다면, 최근 새로 만든거니 당연합니다. 저자를 포함해 뜻을 같이 하는 실험 공동체는 평어를 규정하길 '평등해지려는 언어'라합니다. 왜 우리는 같은 나이 아니면 친구가 못되는지. 굳이 형, 동생, 언니라는 구조 안에 넣어서야 관계의 질서가 생기는지 묻습니다.
성인이더라도 서로 평등한 언어를 쓸 수 있다면 평등한 관계가 확장되지 않느냐가 평어 운동의 취지입니다. 여기까진 백퍼센트 공감합니다. 그러나, 책이 사고의 틀을 잡아가면서 점점 사유를 위한 사유, 명칭을 위한 명칭으로 전진하면서, 논의가 맴돕니다.
우선, 이들은 우리가 존댓말이라고 하는 언어가 안쪽은 '존비어 체계'라고 간주합니다. 하나를 낮추어 하나를 올리는데 특화된 말이라 보죠. 존대말의 대척점엔 낮추기만 하는 말, 반말이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반말과는 다른 평어, 평등한 관계의 언어가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좋아요, 그럼 과연 평어가 어떤 형태냐가 관건이죠. 여기부터 궁색해집니다.
평어란, 말은 반말 그대로 쓰고, 호칭만 이름을 부르자는 겁니다. 즉,
경돈아 밥먹자. : 반말
경돈, 밥먹자 : 평어
라는 겁니다. '아무개야'라고 부르는 낮춤말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겨우 호격조사 하나 떼어낸 빈약한 형태적 차별성으로 반말과 평어를 구분합니다. 이러다보니 새로운 언어체계로서의 식별성은 사라지고, 의도와 목적, 주장만 강하게 존재합니다.
저자도 인정하듯, 그들의 첫번째 제주도에서의 평어 모임은 인생의 모멘트였는데, 서울의 2차모임은 엉망이었다고 하죠. 결국 평어라는 말 하나로 평등한 관계를 뚝딱 가져올수는 없다는 반증입니다. 마음을 열고 평등해지려는 그 정신적 유대와 토대가 더 중요한데 이걸 형태적 언어로 풀려니까 모든게 뻑뻑합니다. 결국, 관계성에 투자하지 않았다면, 어떤 대화도 평어만으로 평등한 관계를 끌어내긴 쉽지 않을 것 같네요.
반대로, 서로 존대말 쓰면 평등해질 수 없는건가요? 저도 지금 나이 차이가 나도 형동생 먹지않고 서로 말 높이지만 식구처럼 친한 사람도 많습니다. 한국 사회 역시, 70년대까지도 열살 터울까진 김형, 이형하면서 서로 깎듯이 반존대하면서 친구먹는 경우도 많았다 들었습니다.
반대로, 반말쓰면 진짜 낮추기만 하나요? 저자는 반말은 아이들의 거친 말투니까 평어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반말에 사상을 얹어보내도 존중이 유지되고 억압을 전제하지 않는 대화도 많습니다. 사이좋은 부녀간의 대화도 그러합니다. 이때 관계가 존비속이란 이유로 대화가 평등하지 못할거라 보는건 좁은 경험 아닐까요.
결국, 중요한건 나이 많다고 함부로 대하지 않고, 배경 무관하게 서로 마음을 열고 대화하려는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이건 각종 모임에서 많이 시도하고 있고, 저는 꽤 많은 좋은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감정적 포만감 넘치는 즐거운 대화를 나눈 행복한 기억이 많습니다. 끝나면 그 모임에서 말을 존대말 썼는지 반말 썼는지 잘 기억조차 안납니다.
평어란 관념에 기대어 낯선 사람끼리일지라도 대화를 여는 물꼬를 트자는 발상은 신선합니다. 그러나 평어 자체가 반말과 99.9% 흡사히고 유일한 형태적 차이는 대뜸 상대방 이름을 부르는거라, 모임의 평등성을 이끌어내기엔 그리 좋은 트리거 같지는 않습니다. 즉, 뜻은 훌륭한데 담긴 그릇이 그대로 낡았으니,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친절한 마음과 친근한 말씨가 원활한 대역폭을 보장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 보기 미비한 점을 나열했지만 책의 시도는 공감합니다. 전 한국말의 존비어 체계를 좋아하지 않으니, 이런 시도가 장하고 기쁩니다. 안타깝지만, 이성민의 시도는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마음의 문제를 기계적 언어구조 변경으로 풀고자 하니까요. 마치 내향인의 꿈같습니다.
모임에 나가면 자질구레한 설명 없이 서로 격의 없는 대화를 하고 싶은데
만일 '평어'란 키워드를 누르면 활성화 되는걸로 해줘 제발.
이런 실험에 기대어 후속의 다양한 시도가 나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언젠간 우아한 반말, 친근한 평어, 포스트모던 한국어로 격의 없이 또래처럼 이야기하는 시대를 고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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