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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문학 vs 참여 문학 논쟁 (김수영과 이어령) 본문
김수영 글을 읽다가 또 눈물을 흘렸다.
419 혁명 당시 정부와 엘리트들에게 카랑카랑 고함치는 글에도 눈물을 흘렸었고,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칼을 못 휘둘러 안달난 권력에 두눈 부릅 뜬 글에서도 눈물 흘렸었다. 아직도 이 땅에 계엄이 선포되고, 아직도 광화문 여의도로 시민들이 몰려나가는 그 데자뷔에 한탄하고, 지금보다 더 살벌한 상황에서 그의 오롯한 정신에 찬탄하며 눈물 흘렸었다.
오늘 글은 좀 더 미묘하다.
몰랐는데, 1968년 초 이어령과 김수영이 희대의 한판을 벌였었나 보다.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에 관한 공개 논쟁이다.
이어령: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 한국문화의 반 문화성' (67.12)
시인들이 '에비'같은 유아의 마음으로 권력에 주눅들지 말고, 예술가다운 예언자적 목소리를 회복하라 시전.
김수영: 지식인의 사회 참여 -일간신문의 최근 논설을 중심으로 (68.1)
지금 한국의 '에비'는 막연한 명사가 아니라, 가장 명확한 금제(禁制)다. 대문호와 대시인의 씨앗이 볼온을 걱정없이 발표될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이어령: 누가 그 조종을 울리는가? 오늘의 한국문화를 위협하는 것
참여론은 문학이 아니다. 문화를 정치활동의 예속물로 만들어선 안된다. 현실의 들판에서 자라는 진짜 백합의 순결한 꽃잎과 향기는 외부의 선물이 아니라 해충, 비바람과 싸워 얻은 것! (이딴 소리)
김수영: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 -이어령씨와의 '자유 대 불온' 논쟁 첫번째 글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 모든 살아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끝
이어령: 문학은 권력이나 정치이념의 시녀가 아니다 -오늘의 한국문화를 위협하는 것의 해명
진보가 불온이고, 불온이 전위고 전위가 예술이 되는게 아니다. 지금 한국의 위정자는 이데올로기를 예술가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만 하지 말아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 뿐이다. 관심없는 소극적 검열이다. 진짜 두려워할 건 대중의 검열자다. (헐..)
김수영: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이어령 씨와의 '자유 대 불온 논쟁 두번째 글 (68.3)
불온할 가능성이 있는 작품은 불온한 작품이니 그런 문화풍토에서 문학이 말살된다는 궤변은 뭐가. 전형적인 기관원의 논법아닌가. 똑똑한 기관원은 이런 비과학적 억측마저 하지 않는다.
김수영 팬심으로 이어령에게 박하게 요약이 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평론가가 창작자에게 '권력을 겁내지말고 마음껏 말해라.' '문학의 테두리 밖을 겨냥하지 말고 순수하게 예술만 하라,' 이런 말을 어찌 할 수 있는지. 최소한 동료 작가가 말했다면 모를까, 이 무슨 오만인지.
김수영 시인의 마지막 글 몇 달 후 김수영 시인이 사망하며 논쟁은 어물쩍 일단락 되었고, 수십년 지나, 이어령이 김수영과 이 일로 사이가 틀어진걸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평론가, 비평가, 해설가, 심사자 등 남의 가치에 빌붙어 먹는 사람이 갖춰야할 덕목이 있다. 최소한 목숨 걸고 창작하는 사람에 버금가게 뭘 걸고 이야기하라.
아, 내가 울컥했던거.
지금은 예술의 지향점에 대해 논의라도 하나. 돈이라는 잣대 말고 순수든 참여든 주장이라도 하나 살짝 아쉬움.
그리고, 그나마 핵심은 있는 저 우아한 논쟁과 달리, 작금의 한국에선 공약하나 없이 선거 후보자 토론에 입만 달고 나와 말싸움만 하는 사람도 있다. 뭐가 발전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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