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uit Blogged
올리브색이 없으면 민트색도 괜찮아 본문
1️⃣ 한줄 평
읽는 자보다 쓰는 자에게 딱인 소설집
♓ Inuit Points ★★★☆☆
매우 독특합니다. 아홉 꼭지 이야기가 다 다르지만 어떤 문구가 꼭 나옵니다. 어느 이야기에선 꽤 중심 소재이고, 어떤 이야기에서는 성격을 드러내는 소재이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에선 아예 문구 자체가 주인공입니다. 모든 글에, 문구가 일상인 고등학생들이 등장하고, 매우 섬세하고 생동감 있는 묘사가 강점입니다. 책은 덜 좋아하더라도, 문구 좋아하는 사람은 꼭 보시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 Stories Related
- 구한나리 작가는 부산의 수학교사입니다.
-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 대상을 포함 다수의 작품을 낸 소설가이기도 합니다.

구한나리, 2022
🗨️ 좀 더 자세한 이야기
우선 이 책의 미덕인 소재가 된 문구들부터 소개합니다.
- 올리브색이 없으면 민트색도 괜찮아: 모리스 스타플로 3C
- 삼각형이 아니라 삼각기둥이라고 수민이 말했다: 핸드메이드 필통
- 프린트를 모을 때는 더블클립이나 날클립: 델리 더블클립
- 시와 수필과 나와 만년필 세 자루: 라미 알스타/몽블랑149
- 점착 메모지는 격자무늬 노란색으로: 3M 포스트잇 657R·스티키 노트 CL5176W
- 가을 정원의 다이어리: 호보니치 태초
- 중요한 노트는 반드시 복사를 해 둘 것: 문화 30공 바인더/모닝글로리 제본 노트
- 스테이플러가 있으면 무섭지 않아: KW-TriO 5360R
- 흔들리는 것보다는 부러지는 게 낫다: 모리스 아티카 제도샤프
각 소설마다 브랜드 없이 묘사로만 문구가 등장합니다. 부록에 실제 문구의 스펙이 나오고요. 이 목록은 책을 재미나게 읽은 독자에겐 최고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이중 제가 제일 좋아했던 작품은 8번 스테이플러 이야기입니다. 문구가 말을 할수 있는 세계관인데, 타이페이에서 사온 스테이플러가 주인공입니다. 토이스토리 같기도 하고 규중칠우쟁론기 생각도 납니다. 화평한 문구들 속에서 사람이 외려 낯섭니다. 누군 거칠고 누군 다정해요. 이런 상황도 수험의 스트레스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주인'을 바꾸지 못하는 순정의 문구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따스한 마음의 사람을 새 '주인'으로 맞이하는 이야기가 잔잔하니 재미납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마음이 뜨거워 진 글도 많습니다.
'올리브색이 없으면 민트색이 괜찮아'. 제목이자 글 말미의 어떤 화해를 상징하는 이 문장에서 날선 아이의 마음을 따라가며 느끼던 긴장이 따스하게 풀렸습니다. '흔들리는 것보다 부러지는게 낫다'의 언니 말도 그랬고요. '점착 메모지'에서 '혜민아 지민아 내 딸, 내 이쁜 딸들, 내 이쁜 새끼들'이라는 엄마의 말에 눈물이 핑 돌기도 했습니다. 글마다 자잘한 복선과 반전이 있어 자세히 설명은 안하겠습니다.
총평은 이렇습니다.
우선 학생들의 이야기가 생생합니다.
수능과 무관한 과목에 대한 경시 풍조, 전학생은 내신 따먹으러 온 나쁜이로 여겨 공격적인 아이들, 벌써부터 조모임의 팀운에 신경 쓰는 분위기 등, 요즘 교실이 어떤지 상상이 자세해집니다.
둘째로 또 다른 미덕,
교사가 써서 그런지 구석에 있는 아이들을 잘 짚어 냅니다. 내내 졸고 있어 학습 부진아라고 여겼지만 실은 모종의 이유로 밤샘 공부를 해서 그럤다든지, 공부를 잘 못하는 아이인줄 알았는데 실은 바느질과 공예에 소질이 있고 이미 그쪽은 전문가랄지, 실은 평범히 잘 하는데도 언니가 너무 대단해 누구누구 동생이란 멍에를 쓰고 기죽어 다니는 학생 등 조감의 시각에서 쳐져 보이는 아이들도 다 내면에 아름답고 귀한 세상이 맺혀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셋째, 큰 빌런은 없음에도, 삶은 녹녹지 않습니다.
예컨대, 아주 몹쓸 아이는 아니지만 분명 학폭의 기미가 있는 학생, 공부 잘하는 급우를 견제하는 아이, 며느리가 마음에 안들어 구박하는 시어머니, 아들을 못 낳는다고 대놓고 면박하는 대구 시아버지 등 못 된 사람은 있지만, 선넘는 악랄은 없고, 벗어나지 못하는 악의 구조도 없습니다. 그래서 딱 청소년 소설마냥 푸릇푸릇한 점도 장점입니다.
마지막 가장 손 꼽는 미덕은 문구의 사용입니다.
작가 자신이 라미 만년필로 초고를 작성할만큼 문구 매니아입니다. 샤프, 멀티펜, 만년필 같은 필기구는 물론, 노트와 바인더 클립, 스테이플러, 포스트잇 같은 다양한 문구의 진정한 가치를 저변에 단단히 깔고 이야기를 펼치니, 이 섬세한 감각이 문구인으로서 너무 감사하고 흡족합니다.
결국 이 문구의 가치를 보는 미세하고 따스한 시선이, 교실이라는 고운 결의 아이들과 엮여 물성 풍부한 이야기가 술술 풀려 나옵니다. 자극적이거나 드라마를 좋아한다면 좀 슴슴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문구 좋아하는 분이라면 확실, 그리고 파스텔 톤의 감성이 맞는 분에겐 기분 좋은 독서가 될 것입니다. 문구와 주인이 딱 맞는 궁합이 있듯, 문구와 구한나리 작가는 천부의 짝이었습니다.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1) | 2026.06.27 |
|---|---|
| 경험수집가의 시대 (1) | 2026.06.20 |
| 음악소설집 (1) | 2026.06.13 |
| 실리콘밸리 프로세스의 힘 (0) | 2026.06.06 |
| 믹스 (0) | 2026.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