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uit Blogged
물빛인쇄소 본문
1️⃣ 한줄 평
시인이 늙어간 만큼, 신작이 빈티지가 되는구나
♓ Inuit Points ★★★★☆
13년 만에 나온 신작 시집입니다. 시인이 세월을 겪은만큼 언어도 부드러워졌고, 세상 이치를 더 본 만큼 내용도 땅에 뿌리를 단단히 박고 있습니다. 이번 문장들이 인상적인데, 시어나 멋부림을 극도로 배제한채, 산문의 언어로 운문을 썼고, 이 담백함은 피카소 말년의 순진무구한 붓질에 가깝게 소박합니다. 그의 옛 작품을 알고 보면 놀라운 절제입니다. 특히, 노년의 시인이 죽음에 대해 담담히 관조하는 시들은, 중년 필독일 정도로 귀한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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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이 리뷰는 제 bias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함민복 시인은 제 최애 시인 둘 중 하나고 두 시인의 시와 산문을 거의 다 읽었습니다.
- 제가 하도 좋아하다보니, 주변에서 도와주셔서 시인님을 직접 뵌 적도 있습니다.

함민복, 2026
🗨️ 좀 더 자세한 이야기
제 최애 시인 두 분 중 한분은 돌아가신지 오래고, 아직 살아 있는 함민복 시인님을 실제로 뵈었을 때, 그야 말로 전 성덕이 되었지요.
강화도 가서 같이 식사하고 이야기 나눌 때, 사실 지금 시집의 핵심 테마를 들었습니다.
화살표라고. 당시 방문기에는 쓸 수 없었지만 출간되었으니 엠바고는 풀렸네요. 시인님께 다음 작품은 언제 볼수 있냐 여쭸고 작업중이라 곧 볼거라고 하면서 넌지시 이야기해 주신게 화살표입니다. 신호로서의 화살표, 질서로서의 화살표, 기하로서 화살표 등 세상 온갖 화살표에 푹 빠져서 이런저런 상념을 풀어주신걸 강렬하게 기억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시인님의 시 짓는 방식과 창작론까지 덤으로 들을 수 있었고요. 마침 제가 산티아고 길 떠나기 직전이라, 시인님께 까미노 화살표 사진 찍어 보내드릴까 여쭸고, 그래달라 해서 까미노 노란 화살표와 조개 화살표 사진을 잔뜩 찍어 보내드리기도 했습니다.
'물빛인쇄소'는 화살표만으로 이뤄진 시집은 아니네요.
중간에 화살표 연작이 10편 정도 있지만, 그외에도 강렬한 주제어가 여럿 있습니다. 그물(관계망), 중력을 거스르는 물, 노화와 죽음 등이요.
그의 젊은 날 시들은 거침없고 날카롭고 처절한 부분도 있습니다. 딱 금호동 시절까지요. 그리고 그의 인생 전환점인 강화도 시절 이래로 쓴 시는, 장르로서 함민복이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홀딱 매료된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은 제가 생각하는 시의 이상적 케이스에 가깝습니다. 절제된 언어지만 겉멋이 없고, 개념을 포개두지만 수수께끼같지 않으며, 사물을 묘사하는데 삶과 우주의 지혜가 녹아나옵니다.
그게 벌써 13년전 나온 시집인데 이후론 또 더 깊어졌겠지요.
우선, 시인 특유의 재기 넘치는 시각이 압권입니다.
[병뚜껑이 나를 연다]아래위에서 왼손 오른손이
다른 방향으로 힘을 줘도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고
..
내가 못 알아듣는
우주의 노크 소리는
얼마나 많을까
[물빛인쇄소]
잔잔 잔잔 제 몸을 구부려
반짝 반짝 빛을 출력하는 바다
[엘리베이터 저울]
여럿이 합쳐 몸무게 달아볼 기회를 주는
엘리베이터는 배려심이 깊다
[막걸리]
윗물이 맑은데
아랫물이 맑지 않다니
이건 아니지
이건 절대 아니라고
거꾸로 뒤집어 보기도 하며
하지만, 그보다 더 삶의 모순과 진리에 깊이 파고 듭니다.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에서]한국전쟁 당시의 배경과 피해상황을 앞세우며
격앙된 채 한가로운 안보전시관
평화의 마음보다 미운 마음이 배양될 것 같은
최첨단 전시관의 낡은 전략
[손]
코스모스 꽃잎을 만져보는 것도
깻잎장아찌를 낱장으로 떼는 것도
생명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것도
손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아직 광화(光化)는 멀고
서로 빛이라 외치는
화살표들만 가득하다
[광화문 촛불 바다]
위에서 아래로 따르는
물을 받을 수 있는 컵에
아래서 위로 초를 꽂아
불을 담아 들고 있네
아 좋다하며 읽다가 책장을 덮고도 한참 머리에 박혀있는 시들은 삶의 정체에 관한 시들입니다.
[노안]이젠
쉼표와 마침표가 구분되지 않으니
다가올
죽음도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란 훈수이런가
[임종]
눈동자 단추 여며
반가움의 분수
꼬리가 멎고
이제야 목줄 풀린
기다림
한 덩어리가 죽어간다
[왕관]
(스텐트 세개 박은 수술한 시인의 이야기)
쉿, 나도 말은 안 했지만 컴퓨터에 마지막 인사말도 써놓고
그동안 썼던 시들도 다급히 정리해
'삶과 죽음은 모래시계, 끝나지 않은 키스'라고 가제도 달고.
그래서 이 시집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시, 충격적인 시는 모시조개입니다.
서해안 특유의 드넓은 뻘에서 조개 캐다 물 때 못맞추면 바로 끔찍한 최후를 맞는 생과 사의 장소죠. 여기 연백댁의 이야기는 엄청납니다. 글인데, 다큐를 본듯하고, 사람이 자연의 일부임을 알게 하고, 그리고 동물과 인간의 모호한 경계에서 피어나는 어미의 모성. 앉은 자리에서 세번을 읽었습니다.

13년간 깊어진 그의 시는 문득 네루다 같다 느껴졌어요.
네루다의 긍정적인 부분에서말이죠. 흔히 '빻았다고' 하는 면을 제외한 네루다는, 사실 제게 시의 매력을 한껏 알려준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탐미적이면서도 사랑과 평화를 맘껏 노래하며, 사랑과 평화를 압살하는 모든 세력에게 차가운 저주를 읇조리는 말들. 번역한 시임에도 전율할 문장을 쓴 그 압도적 높이를 가늠해보며 만감이 들었는데, 바로 지금 제 앞에 네루다를 넘는 시가 있네요.
이 시집은 모든걸 줄이고 줄여야 하는 제 순례길에 가져간 유일한 사치품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의미 깊게 읽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시의 안락의자나 오피스에서 읽는 시와, 고속질주하는 KTX, 숙소 방, 그리고 걷다 지쳐 쉬는 벤치에서 읽는 시는 매우 다릅니다. 쓰고 있는 시인 곁에 앉아 읽는 느낌이었어요. 특히 이번 5일 순례길, 거친 걸음이었는데 쉴때, 물 마신후 폰 안보고 이 시집을 읽었어요. 처음엔 무게가 아까워서 본전 뽑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나중엔 길이 윤택해지고, 제 생각이 생기가 더해지는 느낌이었어요. 다음 긴 걸음, 순례 때도 꼭 시집을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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