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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유럽 산책

Inuit 2009. 8. 26. 23:45
어떤 관점으로 보면, 여행은 그야 말로 '사서 고생'이지요. 돈 내고 고생을 자처하니까요.

대개, 여행 떠나기 전에는 온통 미사여구가 주는 환상에 취해 있습니다. 하지만 낯선 그 곳에 떨어지면 냉정한 현실만 존재하지요.

예컨대, 당장 공항에 내린 후 어디서 택시나 지하철을 타는지, 택시를 타면 목적지까지 가자고 어떻게 소통을 할지, 가는 동안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어딘가로 끌려가지는 않는지, 혹은 바가지 쓰지는 않을지. 호텔만 해도, '소박하고 정감있는 목조형 5층'이 알고보면 여인숙 수준이라든지. 식당에  호기롭게 갔는데 메뉴가 온통 외계어인데다가 그림도 없고 종업원은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경우에 가격 보고 '로또' 돌리는건 어떤가요. 짐승의 눈알만 안나오길 기도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중독적 매력이 있습니다. 진하게 고생하고 돌아와도, 체력과 일상과 그리고 금전이 복구되면 또 나갈 궁리를 슬슬 하게 되지요

(원제) Neither here nor there
미국인이지만, 더 타임즈 지와 인디펜던스의 기자로 영국 생활을 오래했던 빌 브라이슨, 여행작가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무엇보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쓴 장한 이지요. 최신 과학 조류를 정리한 방대하고도 흥미로운 서적입니다. 놀라운건 문외한이 공부와 인터뷰를 통해 이룬 작업이란 사실이지요. 그 끈기와 집중력 그리고 지적 능력이 제게 찬탄을 자아냈더랬습니다.

그 브라이슨 씨의 전공인 여행 책이니 제 눈에 띄자 마자 샀습니다. 그리고, 꽁꽁 아껴 두었다가 휴가 때 집어들었습니다. 글 맛이나 상상력 등 목적 없이 책 자체를 즐기는 독서는, 휴가의 최고 아이템이니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긴 휴가 동안 20페이지도 못 읽었습니다. 물론 휴가여행이 너무 재미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책이 재미 없어서 손에 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재미 없는 이유는 순전히 제 개인적인 취향과 안 맞아서 입니다.

So Outdated
무엇보다 책의 발간년도가 1992년입니다. 프랑과 리라가 나오는 정도는 애교라 쳐도, 지금 유럽과 너무 동떨어진 묘사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근대소설의 한성 저자거리 묘사를 보면서 서울을 상상하는 그 느낌입니다.

Teasing Kidding
빌 브라이슨의 최대 매력은 솔직담백한 문장과 예리한 과장력입니다. 제목대로 발칙하지요. 하지만, 번역에서 그 글맛을 살리기 어려웠음인지, 서양식 블랙유머 자체를 서양의 감각으로 즐겨야 하는지 아무튼 저는 불편했습니다. 지나친 두루뭉수리는 저도 싫어합니다만, 하나의 단편적 사실로 한 나라와 민족을 신랄히 평가하고, 자신의 선입견을 내내 자가발전하는 이야기 구조는 제겐 별로 재미가 없네요.

Not Agreeable
저자처럼 유럽을 다 훑지는 못 했어도, 파리, 암스테르담, 밀라노, 이스탄불에는 직접 가 봤습니다. 시기의 차이인지, 시각의 차이인지 저자의 삐딱한 시선들에 저는 공감하기 힘듭니다. 프랑스 시골은 몰라도 파리는 예전처럼 여행객에게 불친절하거나 적대적이지는 않습니다. 다른 도시도 생경한 불편함은 있지만, 그 자체를 문화로 인정하고 보면 교감 나눌 여지는 있습니다. 심지어 베를린에서 그렇게 야박한 꼴 당해도, 전 그 사람의 문제지 도시나 국민의 고질적 문제라고 여기지는 않으니까요.

Fun to read
그래도 책의 장점은 분명 많습니다. 우선, 특유의 과장된 문체는 꽤 재미있습니다.
(프랑스 여관 주인) '걸어서 가세요' 라고 말하고, 프랑스계 특유의, 턱은 허리띠 부근까지 떨어뜨리고, 어깨는 귀를 정수리까지 밀칠 정도로 끌어올리는 어깻짓을 했다.

(이탈리아 경찰) 내 대답을 엄청나게 느린 독수리 타법으로 기입해 나갔다. 감전이라도 될까봐 겁이 나는 듯이 넓이가 0.5에이커는 될 것 같은 자판을 샅샅이 살핀 다음에야 한 글자를 치곤 했다.

(이탈리아 웨이터) '주문하시겠어요?' '어, 에스프레..' 웨이터는 가버리고 없었으며, 그 웨이터의 여동생과 결혼이라도 하지 않는 한 그가 내게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일은 없을거란 걸 깨달았다.

(유고슬라비아에서 발을 헛디딘 후) 이 순간은 좀 길게 느껴졌는데 그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그때 내 두발이 나무판자의 양쪽에 걸쳐져 있던 줄은, 그래서 곧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버티는데 내 생식기를 쓰게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중략) 나는 내 침대에 누워서 10분 동안 고환을 찾아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녀석들은 어깨 부근 어디께 있었는데 덤으로 내 재킷 안감속에 돌아다니던 동전까지 찾았다.

또한, 서구인이 보는 심미안도 느낍니다. 광장을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찾는 시계탑 같은 랜드마크랄지, 이쯤 되는 지형에는 교회가 와야하고, 여기는 광장이 와야한다는 도시지리 감각 등은 일반적 책에서 가늠하기 어려운 발견이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브라이슨 씨는 자기보호적 냉소와 혼자 키들키들 주절거림이 심한 문체입니다. 여행 다녀보면, 생경한 도시에서 낯선 느낌을 갖다가도 머문 도시에 동화되면서 교감을 갖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브라이슨 씨는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자신의 편견을 확인하고 다음 여행지로 가기 일쑤입니다.

앞서 말했듯 저자는 지적 수준이 결코 낮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냥 신명나게 떠드는게 자기 생김새인듯 합니다. 사실, 책을 읽고나면 저자가 귀엽게 느껴지고, '나도 보따리 싸들고 여행을 갈까'하는 진한 방랑벽을 깨우는 재주도 있단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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