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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자살을 할까, 커피나 한잔 할까?

Inuit 2013. 4. 13. 10:00

엘리엇 부

참 눈에 띄는 제목만큼이나 독특한 책이다.


책의 구성은 이렇다.

인생의 여섯가지 주제에 대해 다루는데, 모든 문장이 인용이다.
아마 쉽게 와닿지 않을 것이다.
샘플 한 페이지를 보자.

즉, 모든 문장이 인문학적 명사들의 언급을 인용하여 짜깁기한 것이다.
그래서 묘하다.
같은 주제에 대해 미묘한 파열과, 다른 인물간의 기묘한 화음이 어우러져 있다.

각 챕터별, 인용으로 이뤄진 도입부를 지나면 둘째 섹션으로 간다.
여기는 명사 인용에 대한 엘리엇의 패러디 형식이다.
도입부가 편저자 엘리엇 부의 육성을 삼가고 큐레이션으로 의도를 전했다면, 둘째 섹션은 좀더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언어유희적 댓글 같지만, 그 수준은 결코 만만치 않다.

인문학, 철학적 소양 위에, 영어의 어감을 충분히 살린 말 뒤틀기와 의미 꼬기는 그 자체로 읽기 즐겁다.

저자의 역량이 돋보이는 지점은, 영어는 영어대로 한글은 한글대로 별개의 스토리를 갖고 있다.
즉, 직역이 아니라 의역, 의역을 넘어 각각 언어에 맞는 커멘트를 남기고 있다.
이는 언어가 설정하는 지역적 특성까지 감안한 창의적인 부분이다.

이 책은 여러 가지로 묘하다.
첫째로, 매우 면구스러운 제목이다.
마치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오인 받을까 싶어 책 읽는 동안 앞면을 슬쩍 뒤집어 놓게 되더라.

둘째, 환원주의의 한계를 명확히 넘는다.
즉, 낱문장 자체는 명사의 인용이되, 이들을 모으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가 탄생한다.

셋째, 잠언 모음집이 갖는 일방적 수용성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한번 훑고 넘어갈 촌철살인의 문장을 엘리엇 씨의 댓구와 함께 다시 새겨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라면 이렇게 댓구를 하는게 낫지 않을까, 아니면 이런 생각 포인트도 있군.. 하며 생각의 쉼표를 찍어준다.

칭찬이 일색이긴 하지만, 책은 썩 재미나지 않다.
우선, 절묘하게 명언을 짜깁기했더라도 다른 시대 다른 공간의 다른 생각들을 모아놓았기 때문에 한 명의 저자가 쓴 글이 아니니 읽기에 매우 뻑뻑하다.
의미가 통하는듯 하지만 문장의 마찰이 심해, 쉽게 읽히고 산뜻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또한 어떤 개념의 전달이 아니라, 이미 해 놓은 말에서 새로 의미를 되새기자는 취지라 단말적 짜릿함은 있지만 일관된 주제를 갈파하는 책 특유의 심오한 배움에는 미치지 못한다.

아무튼, 상당히 재미난 기획이고 방대한 독서 DB가 뒷받침되지 않는한 또 나오기 힘든 책임에는 분명하다.
아니면, 뭔가 배우려 하지 않더라도, 140자 트위터에 '있어 보이는' 글귀 올리는데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