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uit Blogged
아무튼, 술 본문
전작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을 읽다가 전 깜짝 놀랐었더랬지요. 묵직한 주제의식을 어찌 저리 날렵하고 우아한 문체로 담아낼 수 있는지. 소설보다 흡인력이 있는 에세이는, 제겐 거의 처음이었지요. 그래서, 작가의 두번째 책을 소망 했었습니다. 글 자체가 중독성이 있어, 익숙해지면 갈급하게 되거든요.
그의 두번째 책이 나왔을때, 바로 샀고 읽었습니다. 느낌은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우아하지만 호쾌한 분이 글로 술을 만나니, 그냥 날개를 달았구나.
이번에도 주옥같은 글줄들이 영롱합니다. 제 마음에 쏙 든 문장들을 주제 따라 모아봤습니다.
술꾼의 자세에 관한, 보편적이어서 공감 뚝뚝하고, 가끔은 분발해야겠다는 느낌이 드는 글들
언젠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을 보면서 추운 날에 마시는 독한 보드카 한 모금과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평일에는 일찍 술자리를 파한다. 특별한 일이 지나치게 자주 생기기는 하지만.
물음표를 붙이고 ‘일단은’이라는 애매한 말을 쓴 이유는 술꾼들의 미래에 절대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역시 ‘오늘의 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건 그나마도 ‘어제 마신 술’밖에 없다. (중략) 그렇다.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중략) 어제 그렇게 마셔놓고도 술이 또 들어가다니, 이건 술인가, 마술인가.
면세 천국의 도시라 똑같은 와인도 한국에 비해 저렴하다는 점이 돈을 쓰면서도 버는 것 같은 착시를 일으켰고 (중략) ‘세 치 혀가 사람 잡는다’는 속담이 말에 관한 경고인 줄만 알았지, 미각에 대한 경고가 될 수도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
새벽인지 아침인지 시급히 판별해줄 필요가 있는 시간인 5시까지 마셨다.
마시기 전부터 이미 마시고 난 이후의 미래가 빤히 보인다는 점에서나,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앞일 뒷일 따위 생각 안 하는 비선형적 사고를 한다는 점에서 너무나 헵타포드어 같지 않은가.
친구 중에도 제일 잘 통하는건, 술 친구
알맞고, 술 좋아하고, 웃기고. 술친구 삼합이 다 갖춰졌네.
게다가 우리는 둘 다 태생이 ‘가급적’ 같은 인간들이다. 한쪽이 ‘그래도 오늘은 좀 마시자’고 말하면, 안 된다고 엄격하게 선 긋는 척하다가 어느 순간 슬그머니 ‘그럼 그럴까?’ 쪽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글러먹었다.
쭈뼛쭈뼛 서로 눈치를 보다가 결국 내가 먼저 술을 시켰다. 반찬 없이 맨밥이 안 먹히더라고. 그렇게 우리는 밥도 먹고 술도 먹고 술도 먹고 술도 먹고 술도 먹게 되었다.
최고의 술친구와 함께 산다는 건 세상 모든 술이 다 들어 있는 술 창고를 집에 두고 사는 것과 같다
술꾼이라고 하면 보통 다음 두 가지를 기본으로 치기 때문이다. 강술을 즐기는가와 혼술을 즐기는가.
결국 기질 차이인 것 같다. 술이 얹어진 말들을 싫어하는 기질과 술이라도 얹어져 세상 밖으로 나온 말들을 좋아하는 기질
밥먹듯 하지만 늘 힘든 사람과의 관계 맺기, 그리고 술로 드러나는 권력구조. 그나마 술이 있어서 견딘달까
어딘가에 묻어 있는 무방비하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면모, 이 사람 또한 인간으로서 나름 매일매일 실존적 불안과 싸우고 있으며 누군가의 소중한 관계망 속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라는 걸 상기시켜주는 흔적을 봐버리면 필요 이상의 사적인 감정과 알 수 없는 책임감 비슷한 감정이 생겨 곤란하다.
안 그래도 비참한데 뻔하기까지 한 건 싫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힘내라는 말을 싫어했다. 힘내라는 말은 대개 도저히 힘을 낼 수도, 낼 힘도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서야 다정하지만 너무 느지막하거나 무심해서 잔인하게 건네지곤 했고, 나를 힘없게 만드는 주범인 바로 그 사람이 건넬 때도 많았다.
같은 소맥이라도 누군가 말아서 마시기를 강요하면 폭탄주지만, 내가 마시고 싶을 때 누군가 말아주면 칵테일이 된다.
남자 밖혼술러들에게는 없을 상수였다. 여자 혼자 타는 택시와 남자 혼자 타는 택시가 다른 세계를 싣고 달리듯이.
술이 들어가면 술술 나오는 욕에 관해
술이 들어가면 그들의 욕은 찰기가 돌다 못해 생기가 돌았다.
보통 프로씨발러들의 욕을 보면 ‘씨파’와 ‘씨바’ 사이 어딘가에서 발음의 경계가 살짝 흩어지듯 자연스럽게 굴러 나오는데 나의 그것은 아나운서가 저녁 뉴스 중에 씨발을 말했어도 이렇게는 못 하겠다 싶을 정도로 너무나 또박또박하고 굴곡 하나 없었다.
세상에는 뭘 하든 어딘가 어색한 사람이 있는데, 욕만 하면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중략) 단정한 ‘씨’와 깔끔한 ‘발’의 결합. 그것은 욕이 아니었다. 치욕이었다.
조금 후련해지면서도 더 슬퍼졌다. 씨발이 욕이 아니라 눈물 같았다. (중략) 욕할 일이 어찌나 많았는지 씨발로 가글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좀 인용이 많습니다. 그래도 작가 김혼비님을 가장 잘 드러내는건 그의 언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땀과 눈물, 그리고 술로 빚어낸 글들 중, 제가 좋아 메모해둔 글들을 나열해 봤습니다.
솔직히, 첫 작품 '우호여축'이 너무 대단해, 그 재기발랄함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첫 책이 놀랍게 대단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둘째 책에서도 같은 정도의, 아니 좀 더 텐션이 높으면서도 전권에 고르게, 넉넉하고 우아하게 뻗고 있는 글들의 힘을 봤고, '아 천상 글쟁이구나. 어쩌면 대단한 작가의 탄생을 실시간으로 목도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Inuit Points ★★★★★
술을 마셔도 이렇게 다양하게 재미난 생각을 하고 먹으면, 취해도 해학적이고, 깨면 자못 철학적일듯 합니다.
리뷰 적으면서 갑자기 술이 댕깁니다. 무얼 마시고 싶은지 생각해보니, 지금 가장 마시고 싶은건 바르셀로나 부둣가에서 햇살 부서지는 물을 바라보며 아내와 마셨던 화이트 와인입니다. 아니 포르투에서 대학생된 아이들과 같이 마셨던 포르투 와인입니다, 아니 아니, 풀기없이 파삭한 파전에 친구들과 마신 막걸리도 생각납니다.
잠시만 생각해도 맛난 술이 많은데, 그 맛보다 누구와 마시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랑 관계 있나 봅니다. 작가분과 스쳐지나며 인사는 나눴지만, 언제 어느때 알게 되었어도 꽤 재미난 술친구가 되었을것 같습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다 호인이잖아요. 글에 취해 별점 다섯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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